미국 스탠퍼드대학의 과학사학자 론다 시빙어 교수는 2005년 ‘젠더혁신’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2009년 7월 ‘젠더혁신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시빙어 교수 제공
“성과 젠더 차이를 고려해 연구하면 모두를 위한 발견과 혁신을 이룰 수 있다.” 이제 이런 주장은 유엔이나 유럽위원회(EC) 같은 국제기구에서도 낯설지 않을 정도로 성과 젠더 차이 연구는 과학기술계에서 중요한 관심사가 됐다. 하지만 10여년 전 이런 주장이 ‘젠더혁신’이라는 단어로 압축돼 처음 제기됐을 때는 낯선 개념이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과학사학자 론다 시빙어 교수(67·
사진)는 2005년 ‘젠더혁신’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2009년 7월 젠더혁신의 연구 방법과 사례를 구축하자는 ‘젠더혁신 프로젝트’를 제안한 사람이다. 시빙어 교수를 지난 5월28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젠더혁신’ 프로젝트 10돌을 축하드린다.
“우리가 이렇게 성공적일 줄 생각하지 못했다. 1984년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과학사)를 받았을 당시엔 여성과 젠더를 주제로 무언가 한다는 건 교수한테 자멸행위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틀렸다! 멋진 일이 이뤄졌고 이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젠더분석 연구방법은 큰 변화를 이뤄냈다. 이제 유럽위원회나 미국 국립보건원(NIH) 같은 기관들은 연구자들에게 성과 젠더 분석이 자신의 연구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설명하도록 요구한다. <랜싯>을 비롯한 여러 학술지도 성과 젠더 분석을 담은 논문을 요청한다.”
─역사학자인데 어떻게 ‘과학기술 젠더혁신’ 구상을 하게 됐나?
“과학이 엄격한 의미에서는 가치중립이 아니며 거기에 편향이 섞일 수 있음을 많은 연구가 보여주었다. 그런 편향은 종종 우리 건강에 해를 끼치고 많은 비용을 초래한다. 1990년대에 내가 깨달은 것은, 과학·공학의 연구 설계 단계에 도입할 수 있는 실용적인 젠더분석법이 있다면 그런 편향이나 실수를 미리 피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엄정한 과학, 재현되는 과학, 책임 있는 과학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주변 반응은 어땠나?
“만일 내가 과학자 500명이 있는 방에 들어가 ‘젠더편향’에 관해 말한다면 과학자들은 내가 그들의 실수를 비난한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젠더혁신’을 얘기하면 과학자들은 관심을 가질 테고 우리는 곧 공동연구자가 될 수 있다.”
─과학기술은 중립적이라고 믿는 10대 아이들이 당신 앞에 있다면 젠더혁신을 어떻게 설명하겠나?
“잘못된 연구는 생명과 돈을 희생시킨다. 미국에서 10개 약물이 심한 부작용으로 퇴출된 적이 있다. 그중 8개가 여성에게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약물 개발에 수십억달러가 들었지만 잘못된 결과로 피해와 고통을 낳았다. 많은 장치와 기계가 남성 신체에 맞춰 설계된다. 군사용·상업용 장치의 조종실은 전통적으로 남성 신체 규격에 맞춰 만들어진다. 몸집이 작은 여성한테는 위험하거나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줄 수 있다. 남성 신체에 맞춘 건물의 적정온도 기준으로 인해 여성은 추위를 느끼기도 한다. 작업장 안전장치는 여성이나 키 작은 남성에게 잘 맞지 않는다. 성과 젠더를 고려해 연구하면 생명과 돈을 아낄 수 있다.”
─프로젝트 제안 후 가장 중요한 변화는 무엇인가?
“연구자들이 쓸 수 있는 젠더분석 방법이 개발됐다. 새로운 정책들이 캐나다 보건연구원, 미 국립보건원, 독일 연구재단 등에서 시행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이뤄지길 고대한다.”
─젠더혁신의 미래에 대해 말해달라.
“기계학습, 인공지능, 영상인식, 로봇 등이 젠더혁신이 새롭게 주목하는 테크놀로지다. 성과 젠더 분석을 연구 설계 단계에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발견을 얻고 기술을 개선할 수 있다. 면역학에서 성별 차이에 따른 유전학과 호르몬 작용을 더 깊게 이해한다면 전에 없던 항암 면역치료법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얼굴인식 시스템이 검은 피부의 여성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지적은 기술을 더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젠더 차이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분야가 있나?
“젠더혁신 프로젝트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야는 건강과 의료 분야다. 현재 가장 활발히 연구되는 분야는 인공지능과 로봇 분야다. 기계공학이나 자동차 설계, 대중교통, 도시설계, 해양과학 등도 새롭고 흥미로운 분야다.”
─한국에서도 젠더혁신연구센터가 활동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해 기쁘다. 한국 젠더혁신연구센터는 많은 연구사례를 발표하고 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