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18년 영화 “어느 가족”. 출처: IMDb
(“어느 가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가족이 있습니다. 할머니, 부부, 이모와 아들이 함께 사는 집은 풍족하진 않아요. 할머니가 받는 연금에 부부가 일용직에 종사해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 가족. 작은 집에서 복닥거리며 살지만, 가족은 참 화목해 보여요. 하지만 얼추 초등학생 나이일 아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고, 이모(처럼 보이는)는 유사 성행위 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네요. 이 좀도둑(万引き) 가족이 어느 날, 아파트 복도에서 배고파하며 밖을 내다보는 꼬마 아이를 만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18년 영화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The Shoplifters)”입니다.
이 가족은 사실 전통적인 의미에서 가족, 즉 혈연으로 묶인 관계는 아닙니다. 이모는 할머니의 손녀인 것 같지만, 이혼 후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의 딸이지요. 게다가, 부부와는 연이 전혀 없어요. 부부는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 같이 살게 되었고요. 남편이 자동차 절도를 하다가 차에 버려져 있던 아이를 구한 것이 아들입니다. 또, 부부는 꼬마 아이를 먹인 뒤 다시 집에 돌려보내려고 하지만 집 안에서 대판 싸움이 벌어진 것을 듣고는 아이를 잠시 데리고 있으려고 하지요. 그리하여 이 꼬마는 잠깐 이 가족의 막내딸이 됩니다.
이들은 각자 아픔을 지니고 있어요. 할머니는 남편에게 버림받아 늘그막에 혼자 살고 있었어요. 부부는 어떤 이유로 인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지요. 이모는 영화에서 뚜렷이 나오진 않지만 아마 동생을 더 사랑하는 부모로부터 정을 느끼지 못하고 가출했어요. 말씀드린 것처럼 아들은 차에 혼자 버려져 있었고, 그대로 놓아두었다면 햇빛으로 가열된 차 안에서 죽었을 수도 있지요. 새로 들어온 막내는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있습니다.
이런 아픔을 질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병균이나 외상 등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신체 외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하며, 병원에서 치료하는 과정을 통해 원인 요인을 없애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문제만을 질병으로 구분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에 질병 또는 질환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데 거부감이 있지요.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해요. 하나,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복합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이것 때문이라고 딱 끊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 둘, 이런 문제는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이 두 가정을 뒤집어 보면 어떨까요? 질환은 한가지 원인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병원에서 의료인이 치료하는 것이 해결책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문제에 더 풍성하게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에선 “어느 가족” 양 끝에 있는 두 사람, 할머니와 막내 이야기를 통해 위에서 말씀드린 생각을 살펴보려 해요. 두 사람이 겪고 있는 아픔은 질환이라 말할 수 있고, 그것은 병원에서 약을 먹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관심과 노력을 필요하다는 것을.
가족…외롭게 죽지 않으려는 할머니의 보험
새로 들어온 꼬마에게 음식을 먹이고 이유가 그려지지는 않지만 불안정해 보이는 이모를 보듬는 할머니. 그는 가족을 엮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혈연으로 엮여 있지 않은 이들에게 집을 제공하는 사람은 할머니입니다. 대화와 서사 진행으로 예측해보면 할머니가 혼자 살던 집에 부부가 우연한 계기로 들어오게 되고, 이 와중에 가출한 이모도 집에 합류하게 된 것으로 보여요. 평범하지 않은 이 가족이 한 지붕 아래에서 모일 수 있도록 한 것은 할머니이죠. 말씀드렸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은 가족 생계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할머니가 달마다 받는 연금입니다.
할머니는 부부에게 말합니다. 자신은 외롭게 죽지 않기 위해 보험을 들었다고. 그 보험은 다름 아닌, 집과 연금으로 함께 살게 된 가족입니다. 가족이 없는 할머니에게 때로 귀찮기도 하지만 따뜻한 온기를 주는 사람들은 사실 우연한 계기로 모였을 뿐,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어요. 하지만 카메라가 담아내는 그들의 모습은 다른 어떤 가족보다 따뜻합니다. 영화 중간에 가족이 함께 저 멀리 강가에서 들려오는 불꽃놀이 소리를 들으려 처마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광경을 카메라는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지그시 바라보지요. 가족은 바다를 본 적이 없는 꼬마를 위해 함께 바다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일렬로 서서 파도 놀이를 하는 나머지 가족들을 바라보고 앉아 다리에 모래를 끼얹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련하지만 외로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영화 “어느 가족” 일본판 포스터. 가족이 함께 강가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 소리를 듣는 장면을 만화로 다시 표현했다. 강가는 집에서 멀기에 가족들은 앉아서 불꽃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집 안에서 함께 모여 앉아 소리를 듣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어느 불꽃놀이보다 화려한 폭죽이 터지고 있지 않았을까. 출처: IMDb
가족(家族)은 원체 혈연집단을 의미하지만, 집(家)에 모여 있는 무리(族)라면 가족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혈연이 의미를 상실하고 오히려 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현대 사회에서 혈연 가족보다 이들이 만든 가족적 공동체가 더 따뜻해 보이기도 합니다.
노령화 사회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살다 죽음을 맞는 고독사가 점점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지요. 한 자료에 의하면 국내에서 최근 5년(2014~2018년)간 무연고 사망자가 8173명이었다고 합니다.[1] 일본은 고독사에 해당하는 ‘고립사’라는 표현을 1980년대부터 사용했고, 2016년 전체 사망자 중 3.5%가 고립사로 사망했다고 해요.[2] 아직 우리나라는 고독사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가닥을 잡고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물론 외국이라고 해서 상황이 더 나은 것은 아닙니다. 단지 통계가 더 구체적으로 잡히고 예방을 위한 여러 노력을 시행하고 있지만, 역부족인 상태이지요.
영화 중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발견한 가족은 연금을 계속 받기 위해서, 또 자신들이 사망 신고를 할 수 있는 정당한 법적 주체가 아님을 알기에 시신을 집 안에 묻기로 합니다. 이들이 내린 선택에 대해선 충분히 비난할 수 있지요. 하지만, 영화는 은근히 묻습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할머니는 혼자서 쓸쓸히 사망했을 것이고, 며칠에 한 번씩 방문하는 공무원에 의해 뒤늦게 시신이 발견되었을 거예요. 그런 고독사가 나았을까요, 아니면 비록 장례를 치르지는 못하지만 생의 마지막 날까지 함께 하고 시신을 처리해줄 누군가가 있는 게 나았을까요.
엄마와 아이…같은 흉터, 다른 사연
아파트 복도에 있던 아이는 챙겨줄 부모가 없는 상태였어요. 아직 혼자 둘 나이가 아닌데도 아이는 복도에서 혼자 놀고 있지요. 좀도둑질을 한 아빠와 아들은 크로켓을 먹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와 마주칩니다. 크로켓을 보며 군침을 다시는 아이에게 밥이라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아빠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갑니다.
가족은 함께 모여 저녁을 먹습니다. 할머니는 밥을 먹던 아이를 유심히 보다, 팔 여기저기에 상처가 있는 걸 알게 되지요. 이때까진 가족은 아이에게 큰 관심을 보이진 않습니다. 밥을 잘 먹여서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하지요. 괜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잠든 아이를 업고 집 앞에 도착한 부부는 거칠게 다투는 소리를 듣게 되지요. 아이를 낳은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며 물리적으로 다투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듣고, 아내는 주저앉으며 안고 있던 아이를 꼭 껴안습니다.
어떤 기억이 떠올랐던 걸까요.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살기로 합니다. 아이에게 집에 돌아가고 싶냐고 묻지만, 오히려 아이 쪽에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죠. 아이 실종을 보도하는 방송을 본 가족은 아이에게 가짜 이름을 붙여주고 머리카락을 다듬어 다른 모습으로 꾸미려 노력합니다.
어느 날, 엄마는 아이와 함께 목욕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팔에 나 있는 상처를 보고 왜 그랬냐고 물어보고, 엄마는 다리미에 데인 흉터라고 대답하지요. 아이는 팔을 들어 보여주면서 자기에게도 같은 게 있다고 말합니다. 엄마의 왼팔에 있는 데인 자국과 아이의 오른팔에 있는 흉터는 길이는 비슷하지만, 엄마의 흉터는 매끈하고 아이의 흉터는 경계면이 울퉁불퉁하지요. 아이의 흉터는 다리미에 실수로 데인 것이 아닙니다. 그건 가정 폭력으로 인한 학대의 흔적이지요.
가족은 집에서 학대받던 아이를 새로운 가족 구성원으로 품는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혈연을 부정할 수는 없다며, 그런데도 공동체를 구성해 가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싶다고 답했다. 전통적인 가족이 분해되어 가는 가운데 ‘가족’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 우리는 가족의 기능을 어떻게 보완해야 할까. 단숨에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출처: IMDb
작년 7월과 올해 2월 일본에선 부모의 가혹행위로 인해 여아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3] 일본 정부는 대응책을 내놓았지만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하지요. 2018년 일본에서 보고된 아동 학대 의심 사례는 8만104명입니다. 통계 작성 이후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고 해요. 특히 2018년은 전년 대비 22.4% 늘어난 숫자라고 하네요.
국내는 어떨까요?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발간한 “2017년 전국아동학대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전국 60개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접수된 아동 학대 의심 사례는 총 3만923건이었다고 합니다.[4] 이중 아동 학대로 판단된 사례는 2만2367건이었다고 해요. 일본의 1/4이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국내도 마찬가지로 신고 접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2017년도 전년 대비 15.1% 상승한 수치예요. 이중 사망 아동 사례는 46건으로, 결코 적은 수는 아니지요.
질환의 사회학…서로 손길 주며 끌어안아야
이런 일들을 질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아동학대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아동에게 피해를 주며 상흔을 오랫동안 남기기에 이를 질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럴 법하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그럼 고독사는 어떨까요? 사람이 죽는 일이니, 질환이라고 분류할 수도 있을까요? 국내 고독사 자료에서 사망자를 연령별로 분류해본 결과 70대 이상이 가장 많았지만(28.4%), 그 다음은 50대(22.6%)였어요.[1] 50대에 사망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사회적 연대와 관심을 잃은 분들은 나쁜 건강 상태에 처해 있다가 사망하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사회문제이지만, 의학적 문제이기도 한 것이죠.
하나 더 생각해볼 것은, 두 문제를 질환으로 분류하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거예요. 질환이니 병원에서 치료해야 할까요? 이를테면 자살은 어떻습니까? 일전에 정신의학과 원장인 친구와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자살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아마 저는 자살에 대한 사회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논문을 읽었던 것 같고, 친구는 그런 생각에 동의한다면서도 과연 실효성 있는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며 의구심을 표했어요. 자살에 의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현재 국내 상황에서 비용효과적으로 가장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정신의학과에서 상담과 투약을 진행하는 게 최소 비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저에게 다른 해결책이 없었기에 친구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아쉽다는 생각을 감추기 어려웠습니다. 의학적 해결책과 사회적, 문화적 해결책이 함께 협력할 수는 없는 걸까요.
우리가 최근 마주하고 있는 문제는 이제 하나의 해결책만으로는 다 막기 어렵게 된 것 같아요. 아니, 하나의 해결책으로 막을 수 있었던 건 이제 어느 정도 해결했기에 나머지가 불거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질환의 원인에 대해서, 영국의 마이클 마멋 경(Sir Michael Marmot)은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Social Determinants of Health)’에 대한 설득력 있는 자료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5] 전 세계적 자료를 통해 건강을 결정하는 데 사회집단, 생활환경, 직업, 습관 등 소위 사회적 요인이 감염성, 비감염성 질병 발생에 모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죠. 질환이 발생하는 이유가 복합적이라면, 그 접근 또한 복합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를 위해선, 단지 의학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이 함께 모여 문제를 탐구하고 해결책을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세계보건기구에서 제시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개념 틀. 개인이 처한 구조적 요인은 기본적인 건강의 위치를 결정하며, 여기에 환경, 습관, 사회심리적 요인, 보건의료가 영향을 주어 개인이 경험하는 건강격차로 나타난다. 건강격차는 다시 각자의 구조적 요인에 영향을 미친다. 의학적 접근은 여기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출처: 보고서[6]
그러나 개별 학문의 전문화가 점차 심화해 가고 있는 현 세태에서 여러 학문이 같이 모인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한때 유행했던 통섭(consilience)은 인문사회분야와 자연과학분야를 통합하는 범학문적 접근법이라고 자신을 치장했지만, 그것은 자연과학에 인문학이 종속되는 것을 의미했지요.[7] 여기저기에서 융합학문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이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예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독하게 죽어가는 누군가,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는 서로의 벽을 넘어 학문과 사회 분야가 함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분야 어느 쪽이 한 쪽을 주도하거나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협력하여 함께 문제를 끌어안기를 말입니다.
영화 마지막,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꼬마 아이는 또 혼자서 아파트 복도에서 놀다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으로 바깥을 바라봅니다. 이 아이에게 내밀어야 할 도움의 손길은 무엇일까요. 아마 의학이, 사회가, 학문이, 각자의 벽을 넘어서는 것이 시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질환은 단순히 약을 먹어서 치료하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무너진 삶의 조건을 가리켜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조금 다르게 문제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요. 비록 ‘좀도둑 가족’이 각자 문제를 안고 있는 이상한 가족이었지만, 아이에게 구원의 팔을 뻗었던 것처럼요.
김준혁/치과의사·부산대 의료인문학교실 박사과정(의료윤리학)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1. 고독사 매년 증가… “가정 붕괴 탓 50대 비율 높다”. 매일경제. 2019년 5월 7일 [cited 2019년 6월 9일]. Retrieved from: 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19/05/298683/.
2. 신지민. 고독사 예방, 다른 나라들은? 한겨레. 2018년 3월 4일 [cited 2019년 6월 9일]. Retrieved from: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34580.html.
3. 김태균. 일본, 유엔에서 ‘아동학대 후진국’ 지적 망신… 또 10세 여아 사망. 서울신문. 2019년 2월 10일 [cited 2019년 6월 10일]. Retrieved from: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210500064.
4.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2017년 전국아동학대현황보고서. 보건복지부 아동권리과; 2018.
5. Marmot M. Social Determinants of Health Inequalities. Lancet 2005;365(9464):1099-1104.
6. 한국건강증진재단. 건강불평등과 지역사회 건강증진. 건강증진총서 2014;1. WHO의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의 개념 틀(SDH conceptual framework); p. 18.
7. 손제민. “통섭, 왜곡 번역됐다”… 최종덕교수 세미나서 지적. 경향신문. 2007년 8월 6일 [cited 2019년 6월 10일]. Retrieved fr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