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테드 창의 공개 사진을 뉴럴 스타일 트랜스퍼 기법을 통해 피카소 화풍으로 수정한 그림.
다사다난했던 2019년, 문학계에도 여러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시적인 사건으로는 2018년 심사위원의 문제로 수상자를 뽑지 않았던 노벨 문학상이 한꺼번에 두 명을 각각 2018년, 2019년 수상자로 선정한 일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문학과 책의 지위가 변하는 가운데 작품활동을 하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죠. 국내를 예로 들면 이제 웹소설이 확실한 매체로 자리매김하여 활동하는 작가들이 외부로 노출되기 시작했고, 전통 문단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 독립출판과 구독이 새로운 판로를 만들어나갔습니다. 이 와중에 여러 분야의 변화도 나타났는데요. 여성 작가와 여성 문학이 강세를 보였죠. 한편 2019년은 SF가 약진한 해였습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엄청난 주목을 받은 김초엽 작가의 등장이나 ‘저 이승의 선지자’ 등 작품의 판권을 미국에 판 김보영 작가가 그 예죠. 외국에서도 드라마의 인기를 등에 업고 마거릿 애트우드가 ‘시녀 이야기’ 2부인 ‘증언들’을 발표했어요. 하지만 가장 주목을 받았던 소식은 평소 과작(寡作, 작품을 적게 지음)으로 유명한 미국의 SF 작가 테드 창(Ted Chiang)이 오랜만에 작품집을 발표했다는 거였죠.
2002년 첫 작품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발표한 창은 활동을 시작한 1990년부터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이 17편밖에 되지 않는 SF 소설가이지만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등 분야에서 저명한 상을 휩쓸고, 과학계 대표 학술지인 ‘네이처’가 그의 단편을 실을 정도로 영향력과 팬층이 두꺼운 작가죠. 첫 작품집에 실린 ‘네 인생의 이야기’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손을 거쳐 영화 ‘컨택트’로 재탄생,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덟 개 부문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이런 작가의 작품집을 손꼽아 기다려온 여러 팬의 기대에 부응하듯, 2019년에 발표된 창의 두 번째 작품집 ‘숨’은 상찬을 받으며 여러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영화 ‘컨택트’는 원형 문자를 사용하는 외계인을 만난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애덤스 분)의 이야기이다. 갑자기 나타난 우주선 속 외계인들과 소통하기 위해 협력을 요청받은 뱅크스는 외계인들의 언어가 한꺼번에 과거, 현재, 미래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된다. 과연, 그는 비극이 앞에 놓여 있음을 알더라도 같은 선택을 내릴까. 모든 생성은 원형이며 이 순간 자체를 절대적으로 긍정한다는 철학자 니체의 영원회귀와 맞닿아 있는 주제를 담은 창의 단편을 빌뇌브 감독은 특유의 미장센으로 아름답게 표현해 냈다. 시간의 문제는 창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이며, 작품집 ‘숨’의 여러 단편도 이 문제를 살피고 있다. 출처: 아이엠디비
애청하는 독서 팟캐스트에서 출연자 한 분이 ‘숨’을 2019년 최고의 작품으로 꼽은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이유지만, 위에서 나열한 이유 때문이라도 한 번은 창의 작품을 다뤄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어요. 한데, 소위 하드SF(‘과학의 언어에 명백히, 광범위하게 의존하고, 동시대 과학의 지식 안에 플롯과 혁신성을 포함시키며, 그러한 과학적 데이터를 둘러싼 서사를 조직하는 SF’[1])로 분류되며 과학과 기술의 외삽(外揷, 몇 개의 자료를 가지고 구간 바깥의 함수를 추정하는 일)으로 현기증 나는 통찰을 보여주는 창의 작품을 가지고 의료 또는 윤리와 관련한 이야기를 할 게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며 앞으로 첨예한 논의가 이어질 부분에 관해 창의 작품은 심도 있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바로 정치철학, 그중에서도 정의론인데요.
국내에선 정의론 하면 ‘정의란 무엇인가’ 덕분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인물은 ‘정의론’을 쓴 미국 철학자 존 롤즈(John Rawls)이죠. 그의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이라는 개념은 워낙 유명해 이름은 모르더라도 그에 기초한 주장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거예요. 한편,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그의 주장을 살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의지와 우연 개념입니다. 사람은 어디까지 자유롭게 행위하고, 어디부터 우연이 개입하여 자유의지를 무효화할까요? 개인은 자기 행동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요?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 물음은 최근 복지와 보건의료 정책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지요. 질병에 걸린 환자는 어디까지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할까요? 제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에서도 관련 내용을 조금씩 다룬 적이 있습니다만, 이론 자체를 소개했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새해를 맞아 작품집 ‘숨’에 실린 단편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을, 작품이 다루는 자유의지와 우연의 숨 가쁨을, 그리고 이 작품이 보여주는 광경이 우리가 정의론에 관해 말할 때 어떤 영향을 주는지(또는 정의에 관해 생각할 때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생각해보려 해요. 더하여, 최근 이런 논의가 보건의료의 풍경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지도 살펴볼 거예요.
가지 않은 길을 알 수 있다면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을 이끄는 핵심 장치는 프리즘, ‘플라가 세계간 신호 메커니즘’(Plaga interworld signaling mechanism)입니다. 이 장치는 양자물리학의 다세계 해석에 기초하고 있어요. 이것을 흔히 평행우주론이라고 부르죠. 이것은 2014년 영화 ‘인터스텔라’가 관객들에게 교차하는 책장의 이미지와 과거에 개입한 아버지의 서사로 많은 관객에게 각인시킨 내용입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와 동시에 수많은 우주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 각각은 어떤 분기로 인해 갈라져 미세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 차이는 지각할 수 없을 만큼 사소한 변이로부터 엄청나게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유명한 시, ‘가지 않은 길’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선택의 갈림길에 있었을 때 지금이 아닌 다른 경로를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는 시죠. 대략 말하면, 평행우주론은 내가 각각의 선택을 내린 세상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제가 아침에 사과를 먹을지, 안 먹을지 고민했고 결국 먹었다고 해 볼까요? 제가 사과를 먹을지 고민하는 순간, 두 세계가 나눠집니다. 한 세계, 내가 지금 위치한 세계에선 사과를 먹었지만, 다른 세계에선 사과를 먹지 않은 것이죠. 좀 더 추상적으로 말하면, 그저 먼지 하나의 위치 차이가 날 뿐인 두 우주가 동시에 존재하며, 그 차이 때문에 한 우주에선 누군가가 죽고 다른 우주에선 그가 살아 있는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양자물리와 관련하여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야기인 ‘슈레딩거의 고양이’를 평행우주론으로 읽을 수 있다. 슈레딩거의 고양이란 고양이, 독극물이 들어 있는 병, 방사성 물질인 라듐, 가이거 계수기, 망치를 상자에 넣어둔 상태를 가리킨다. 라듐이 붕괴하여 방사능이 검출되면 망치가 움직여 독극물이 상자 안에 퍼지고, 고양이는 죽게 된다. 상자 안은 볼 수 없고, 1시간 뒤 라듐이 붕괴할 확률은 50%이다. 여기에서 고양이의 생사를 묻는다. 슈레딩거는 이 사고실험을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증명하기 위한 예시로 들었지만, 이후 “살아있지도, 죽지도 않은 고양이”라는 이미지가 퍼졌다. 평행우주론은 1시간 뒤, 라듐이 붕괴한 세계와 라듐이 붕괴하지 않은 세계가 나눠진다고 본다. 한 세계에선 라듐이 붕괴, 고양이가 죽는다. 다른 세계에선 라듐이 붕괴하지 않고 고양이도 산다. 두 세계는 병립하지만, 서로 건너갈 방법은 없다. 창은 묻는다. 두 세계 사이 소통할 방법이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단편에 등장하는 프리즘이라는 장치는 이 두 가지 분기를 기록합니다. 양자 차원에서 분기가 양쪽으로 갈리게 되는 순간 두 평행세계가 만들어지고, 양쪽의 평행세계는 프리즘 안의 양자가 두 가지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 차이에서 출발하여 계속 다른 세계로 갈라져 갑니다. 프리즘 안에는 갈라져 분리한 두 우주에서 함께 접근할 수 있는 이온이 여러 개 들어 있어요. 이 함께 접근이 가능한 이온을 정보 전달 통로로 삼아, 두 우주가 소통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프리즘의 정보 전달 기능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이에요. 연인이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둘 중 한 사람만 죽었다면, 주인공은 다른 연인이 죽은 세계와 연결된 프리즘을 찾아 연인에게 팔려고 하지요. 물론, 그 연인은 슈퍼스타라서 아주 비싼 값에 프리즘을 사려 할 테고요.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단편이 바로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입니다.
시작부터 만만찮은 내용을 설명해 드린 이유는, 평행우주라는 개념이 흥미로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이성을 지닌 존재로서 스스로 판단과 결정을 내리며 산다고 생각하고 살지요. 하지만 그 결정은 외부의 어떠한 영향도 없이 오로지 나 스스로만 내린 걸까요? 그래야만 나는 ‘자유롭게’ 결정을 내린 걸 테니까요. 어떤 외부의 영향 때문에 결정을 내린다면, 그 순간 나는 나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해 어떤 결정에 도달하는 셈이 됩니다. 신경과학은 이런 문제에 대해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제시하고 있죠. 198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였던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이 실험을 통해 의지보다 뇌의 전기 신호가 빨리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 이후 자유의지는 환상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2] 하지만, 이런 개체 차원의 논의를 넘어 생각해 볼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를 개인의 선택이라고 봐야 할까요?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 때 그것은 개인의 선택에 의한 걸까요, 아니면 그저 우연이거나 외부적인 요인의 귀결일 뿐일까요? 창의 단편은 이 질문에 관해 흥미로운 답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프리즘은 역사적 변화의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방법을 제공했다. 연구자들은 평행세계 갈래들의 뉴스 헤드라인을 비교해서 불일치하는 부분을 찾고 그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 분기는 차량 검문을 하다가 수배범이 잡힌 경우처럼 명백하게 무작위적인 사건에 의해 야기됐다. 또 다른 경우 분기는 한 개인이 두 개의 평행세계에서 각기 다른 행동을 선택한 결과였다. 이럴 경우 연구자들은 해당 인물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 인물이 공인일 경우 그들은 대개 자신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관해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았다. 이 두 범주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을 경우, 연구자들은 불일치가 발생하기 몇 주 전 기사들부터 뒤져 차이가 생긴 원인을 알아내야 했다. 보통 이것은 증권시장이나 소셜미디어의 확률적 흔들림을 조사하는 시도로 이어졌다.[3]
소설 속 프리즘의 존재는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행세계의 자신을 질투하기도 하고, 도덕적 방탕에 빠지기도 하며, 다른 세계를 보며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선택하지 않았던 길에서 더 좋은 결과를 얻은 자신이 너무 부럽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았던 길도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 내 선택이 사실은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결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결국 자유의지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책임 때문입니다. 내가 자유롭게 결정하지 않은 일에 관해 나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 내가 결정한 것이라면, 그리하며 나에게 그 원인이 있다면 나는 그 결정의 무거움을 평생 져야 하겠죠.
위 인용한 문단은 그 구분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뉴스를 비교하면 두 평행세계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거예요. 두 세계에서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컨대, 테러라거나 비행기 사고, 금융 위기를 가져온 범죄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럼 이제 두 세계를 놓고 비교해봅니다.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은 무엇인가? 단편은 둘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명백하게 무작위적“이거나, “한 개인이 두 개의 평행세계에서 각기 다른 행동을 선택한 결과”라고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일의 원인은 둘 중 하나임을. 그것은 우연 또는 운이거나(또는 이를 물질적 결과라고 할 수 있겠죠), 선택입니다. 우연과 선택이 낳은 결과는 여러 차이를 가져옵니다. 그 차이는 두 사람 사이를 현격히 벌려 놓기도 합니다. 예컨대, 영화 ‘기생충’에서 언덕 위 높은 곳에 사는 부유한 박 사장과 저 아래 땅 밑 반지하에 사는 김 씨의 차이 같은 것. 그것을 우리는 불평등이라고 말하죠. 그런데, 불평등이 필요할까요? 그 불평등을 개인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혹시,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면 사회에 나타나는 불평등은 없애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자유의지와 우연이 다투는 세계에서 정의를 말하는 법
이런 질문을 가장 강력하게 던졌던 사람이 롤즈였어요.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Bill Clinton)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철학자”라고 불렀던 그는 우리가 철학 하면 생각나는 개념, 이론이나 삶의 방식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대신, 우리 삶의 조건에 관해 물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인류가 현재 도달한 가장 훌륭한 정치체제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은 독재정치 등을 민주주의와 비교하여 민주주의가 더 낫다는 결론을 얻는 데 만족합니다. 하지만 롤즈는 그것으로 충분한지, 과연 민주주의가 가장 훌륭한 정치체제일 수 있는지 묻습니다.
롤즈는 결코 민주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또한 민주주의는 가장 훌륭한 정치체제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주변에 만연한 불평등을 해결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훌륭한 정치체제일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불평등을 없애는 실험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이 이미 충분히 하고 있지 않았나요? 롤즈는 이 문제에 관해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이 다르게 접근해 나갑니다.
그는 우리가 사회 체제 또는 제도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 사고 실험을 해봐야 한다고 제안해요. 아시다시피 사고 실험이란 직접 해 볼 수 없는 실험을 머릿속에서 굴려보는 과학자와 철학자의 강력한 무기죠. 롤즈는 사람들이 모여서 제도를 결정할 때—민주적으로—조건을 하나 겁니다. 사람들은 제도가 결정된 다음, 자신이 어떤 조건에 처하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산다면 자신이 트럼프 대통령처럼 엄청난 부자일지, 슬럼가에 사는 노숙자일지 모른다는 거죠. 사람들이 처한 이 모르는 상태를 롤즈는 ‘무지의 베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떤 제도를 선택할까요?
이런 상황, 롤즈의 용어로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롤즈는 생각합니다. 일단 평등하게 기본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평등한 자유의 원칙’). 기본적인 자유를 빼앗는 제도를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으리라고 롤즈는 믿었고, 그것은 역사가 증명해 왔습니다. 다음, 가장 약자(‘최소 수혜자’)에게 최대한의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제도를 선택할 겁니다(‘차등의 원칙’). 사람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평생 살아야 하거나, 만성 질환에 걸렸지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제도를 선택하지 않고, 대신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제도 중 가장 약자에게 가장 많은 혜택을 주는 제도를 선택할 것이라고 롤즈는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제도를 선택하는 사람이 나중에 자신이 가장 약자가 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면, 이런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권위를 지니는 직책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돌아가야 합니다(‘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 마지막은 쉽죠. 예컨대, 정치인의 경우 신분이나 재산으로 사전에 조건을 제한해선 안 되고, 누구나 입후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결정된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그것은 공정한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선택된 사회에서 여전히 불평등이 남아 있지만, 최소한의 안전과 안정이 보장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다른 모든 제도를 비교해 보았을 때, 지금 선택한 이 제도가 가장 약한 자에게 가장 많은 혜택을 배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제도는 인간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 부여는 인정하여 경쟁과 노력에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즉, 제도를 선택한 인간이 최악의 불운으로 사회에서 가장 나쁜 입장에 처하더라도 그는 사회에서 버려지지 않을 것을 압니다. 그의 노력과 선택은 보상받을 겁니다. 잠깐, 불운과 선택은 아까 창의 단편에서 살펴본 내용입니다. 결국 롤즈의 논의 중심에 있는 것 또한 자유의지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죠.
케이크를 공평하게 나눠 먹는 방법은 무엇일까? 흔히 “마지막으로 먹는 사람이 자른다“는 답이 제시되곤 한다. 자기 몫이 마지막에 돌아오므로 자르는 사람은 최대한 비슷한 크기로 자를 것이라는 통찰이 이 답의 근거다. 롤즈가 한 주장도 비슷하다. 어떻게 가능한 한 공정한 사회 제도를 만들까? 내가 가장 약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제도를 입안, 선택한다. 그것은 약자에게 공감과 연민을 품는 것을 넘어, 내가 그런 위치에 정말로 빠질 위기 속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책임으로 인한 결과까지 제도가 책임질 수는 없다. 여기서 질문이 나온다. 자유의지와 우연으로 인한 결과를 구분할 수 있을까?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 프리즘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그런 구분이 가능한 세계다. 출처: 픽셀즈
롤즈의 말을 볼까요? “일반적인 관점을 명시하기 위해 이러한 지위들을 선정함으로써 우리는 두 원칙이란 자연적 우연성과 사회적 운수의 횡포를 완화하려는 것이라는 관념을 따르게 된다.”[4] 네, 롤즈가 하고자 했던 일은 결국 우연으로 인한 나쁜 결과를 줄이고자 함이었어요.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삶에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이런 일은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을. 단편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또한, 이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확인시켜줍니다. 소설 등장 인물은 과거 실수를 저질렀고 친구에게 피해를 줬습니다. 친구는 그 일 때문에 인생을 망쳤고, 그 사람은 평생 죄의식에 갇혀 살았죠. 하지만 프리즘으로 다른 평행우주 여럿을 살펴보니, 그가 실수하지 않더라도 친구는 결국 그 시점을 계기로 인생을 망치게 되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창은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로 이 일을 정리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곳과는 다르게 행동한 평행세계들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 원인은 당신이 아니에요.”[5]
질환은 이런 원인-결과 논의에서 상당히 중심부에 있습니다. 내가 어떤 질병에 걸린 것은 내 행동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저 우연 때문일까요? 우연이라면—예컨대 미세먼지, 유전자와 특정 환경의 결합 등—그 치료는 사회가 부담해야 하지 않을까요? 롤즈의 생각은 보건의료에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하지만 항상 문제는, 질환에 걸린 원인이 환자의 선택 때문인지 단지 불운인지 명확히 말하기 어려우며, 더구나 불운 또한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악운과 어느 정도 개인의 선택에 따르는 운 두 가지로 나눠진다는 것이죠.
질환의 책임은 제한된 보건의료 재정에서 어려운 문제예요. 하지만,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을 읽으며 거꾸로 물어볼 수 있을 거예요. “우리에게 프리즘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하는 질문 말이죠. 그 질문은 이 책임의 난문을 생각해보는 데 있어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 줄 거예요.
김준혁/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1. 셰릴 빈트. 전행선, 옮김. 에스에프 에스프리. 아르테; 2019. 43쪽.
2. 송민령. 맥락을 놓치기 쉬운, 만들어진 ‘자유의지 논란’. 한겨레 [Internet]. 2017년 2월 10일 [cited 2020년 1월 27일]. Retrieved from: http://scienceon.hani.co.kr/490654.
3. 테드 창. 김상훈, 옮김.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숨. 엘리; 2019. 431쪽.
4. 존 롤즈. 황경식, 옮김. 정의론. 이학사; 2003. 146쪽.
5. 테드 창. 김상훈, 옮김.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숨. 엘리; 2019. 4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