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듣는 것 만으로도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 출처: 픽스퓨얼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황망과 비탄에 빠진 2020년 초,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접촉이 줄어들었음에도 우리 귀와 눈에 계속 들어오던 소식이 있었습니다. 2019년 11월, 한겨레의 보도로 인해 텔레그램 엔(n)번방을 대상으로 한 추적단 불꽃의 잠입 취재가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전모가 드러나면서 많은 사람을 경악시킨 것. 조주빈이 ‘박사’라는 이름으로 만든 ‘박사방’에서 시작한 범행은 유사한 내용으로 구성된 엔(n)번방, 고담방 등으로 확대되었고, 수백 명의 피해자를 몇 명의 운영자와 함께한 이용자들이 함께 성착취한 사건입니다.
사건이 일으킨 쟁점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공적 공간에선 주로 누구까지를 가해자로 잡을 것인지와 처벌 강도는 어떠해야 하는지가 다뤄졌습니다.[1] ‘박사’, ‘갓갓’, ‘와치맨’ 등 성착취를 주도한 이들이 있으나, 채팅방에 참여한 이들도 들어가기 위해 가입비를 내는 것이 끝이 아니라 음란 동영상을 공유하고 성착취 행위를 주문했다는 점에서 가해자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기존 음란물 생산과 공유에 관해 기존 법원의 처분이 약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박사’를 뒤이은 ‘켈리’가 1년 형을 선고받은 것이 처벌 관련 논의에 불을 지폈습니다.[2]
워낙 이용자가 많은 것으로 추산되었기에 어디까지 추적해서 가해자로 포함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고, 결국 대검찰청은 2020년 4월9일 ‘디지털 성범죄 사건 처리 기준’을 마련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성착취 영상물’의 경우 관여한 모든 사람을 처벌 대상으로 합니다. 뒤이어 4월30일 국회는 ‘n번방 방지법’을 통과시켰으며, 불법 성적 촬영물을 소지·구매·저장·시청한 사람에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여 단순 소지자도 처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3]
언론에서 주로 다뤄지는 것은 가해자와 그 소식입니다. ‘박사’가 누구이며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적절한 형량은 얼마만큼이고 법원이 이를 반영하고 있는지, 이런 범죄의 재발을 차단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연일 논의되어 왔습니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에, 이런 내용을 다루는 것은 시의적절하며 꼭 필요한 부분일 겁니다. 하지만, 생각해보게 됩니다. 벌어진 범죄에 대해 처벌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피해를 본 여성들을, 아이들을 돕는 일이 아닌지 말입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노출될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법기관의 처리 과정에서, 일상생활에서 이차적인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직도, 가족에게 알려질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피해자의 개명, 영상물 삭제, 경제적 지원책이 언급되면서[4] 오히려 엔(n)번방에 관한 논의가 수그러들거나, 굳이 피해자 지원까지 세금으로 해야 하나 하는 이야기도 들립니다.[5] 처벌에는 엄격하지만, 회복에는 관심이 없는 것. 타인에 무관심한 세태는 결국 피해자에 관한 무지에서 비롯될 겁니다. 그렇다면, 피해자에 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피해자에 관해 알 수 없으며, 알아서도 안 됩니다. 피해자에 관해 알려야 하지만 그 정보를 노출해선 안 된다면, 이 이율배반을 해소할 수 있을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럴 때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문학 작품입니다. 허구의 피해자가 등장하는 작품을 읽고 봄을 통해, 그들의 고통을 대리 체험하는 것, 그리하여 현실에서 피해자를 보면서 같이 슬퍼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소설이 해온 ‘공감적 충동의 보편화’ 기능이었습니다.[6] 성범죄로 인해 피해를 본 이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한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할 겁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작품은 닉 드로나소의 그래픽 노블 ‘사브리나’입니다.[7] 그래픽 노블이란 만화 중 일부 작품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으로, 주로 무게 있는 내용을 다루는 만화 작품을 이 이름으로 분류합니다. ‘사브리나’는 띠지에 있는 박찬욱 감독의 추천사, “자극적인 묘사도 화려한 기법도 없지만, 단조롭게 정지된 프레임 안에서 유독한 감정이 스며나온다. 사람을 천천히 미치게 만드는 전염병처럼.”이 눈길을 강하게 끄는 작품으로, 어느날 갑자기 납치된 사브리나의 남자친구 테디를 돕기 위해 잠깐 그를 집에 들여 함께 사는 캘빈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강박적인 네모 틀로 처음부터 끝까지 구성된 만화는 부드러운 그림체, 밝은 색채로 인해 전혀 무거워 보이지 않지만, 작품을 읽는 독자를 고통의 진폭 안, 그 끝까지 끌고 들어갑니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가 범죄를 다루는 방식이 고통을 어떻게 증폭하고 있는지, 인터넷은 여기에서 얼마나 끔찍한 매체로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엔(n)번방에 관한 논의를 진전시킬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
닉 드르나소의 “사브리나”는 파스텔 톤의 채색과 부드러운 그림체로 읽는 이를 고통에 빠뜨리는 마법을 부린다. 그래픽 노블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 후보로 오른 작품은 충격적인 사건을 전시하지 않고, 피해자 주변 인물들을 충실히 담아낸다. 장을 넘기면, 고통의 우물 속으로 서서히 잠겨 드는 기분이 든다. 출처: 아르테 블로그[8]
사브리나, 실종되다
제목은 ‘사브리나’이지만, 사브리나가 등장하는 것은 작품 맨 처음 몇 장뿐입니다. 여동생과 함께 최근 겪은 어려움과 여행 이야기를 나누던 사브리나. 갑자기 아무 설명도 없이 작품은 다른 인물의 얼굴을 비추고, 이 인물을 공항에서 맞이하는 주인공 캘빈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캘빈은 미 공군 상병으로, 정보보안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캘빈은 별거 중으로, 아내는 딸 씨씨를 데리고 다른 지역에 가 있습니다. 그가 집으로 데리고 온 인물은 사브리나의 남자친구 테디로, 사브리나는 어느 날 밤 갑자기 실종되었고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테디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캘빈이 테디, 그리고 직장동료와 나누는 가벼운 대화에서 작품은 다루려는 문제들을 이미 전개하며, 이슈들은 질문의 형식으로 등장인물 사이 대화처럼 제시되나 그 질문은 독자에게 직접 던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무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20쪽) “이봐, 뭐 재미난 뉴스 없어?” (24쪽) “실종? 무슨 일이 있었는데?” (30쪽)
악몽을 꾸고 일상생활을 이어가지 못하는 테디를 돌보는 와중, 캘빈의 삶도 서서히 그 자장에 끌려들어 갑니다. 캘빈도 별거 중인 가족과 잘 지내고 있지 못하다는 장면이 스쳐 지나가고, 작품은 바로 문제의 핵을 터뜨립니다. 사브리나로 추정되는 여성이 살해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언론사로 배달된 것.
소식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미국 전역으로 퍼지고, 이 소식을 들은 테디는 광분합니다. 이 와중, 테디는 음모론을 설파하는 라디오 방송을 접하고 그 메시지에 빠져들게 되고, 사브리나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꼬이는 것은 이 지점부터입니다. 사브리나를 살해한 자는 이미 자살한 상태였고, 음모론 방송은 사브리나가 살해당한 것은 조작이라고 강변합니다. “그 사건의 배후에는 뭔가 좀 더 복잡한 음모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108쪽)
결국, 사브리나 살해 장면은 인터넷으로 유출되고, 언론은 테디와 캘빈을 취재하려 하며, 음모론에 경도된 자들은 캘빈에게 정체를 드러내라며 협박 편지를 보냅니다. 그들의 음모론에선 이 모든 사건은 다른 큰 일을 은폐하기 위한 조작이고, 피해자인 사브리나, 테디, 캘빈은 재연 배우가 됩니다. 이런 정신 없는 상황 속에서 그저 테디를 도우려 했던 캘빈의 생활은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고, 이 뒤얽힌 상황은 진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인터넷 시대, 피해자가 사라지다
‘사브리나’를 읽는 경험이 끔찍한 이유는, 이런 상황의 혼란스러움에 독자를 그대로 끌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작품은 바둑판처럼 짜인 칸의 배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하여 역동성을 배제하고, 이것은 ‘사브리나’를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모든 쪽은 왼쪽 위부터 오른쪽 아래 순서로 배치되어 있지만, 칸이 강박적으로 균일하게 세워져 있기에 순서가 혼란스러워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주요 화자가 캘빈인 것은 친구를 돕고자 하던 그의 선행이 그 삶에 가져오는 악몽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통로가 됩니다. 캘빈은 작품에서 그려진 고통의 한 걸음 바깥에 위치한 인물입니다. 직접 사브리나와 관계가 있지도 않은 데다가, 사실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그러나 테디를 도우려던 캘빈은 언론과 음모론자들에 의해 당사자 중 한 명이 되고, 테디의 고통을 같이 경험하면서 절망에 빠져듭니다.
작품이 성폭력을 직접 다룬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엔(n)번방 사건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브리나’는 엔(n)번방 사건을 생각할 때 우리가 문제로 삼아야 할 지점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한 걸음 바깥에서 문제를 다루면서 오히려 독자들을 문제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합니다. 무엇보다, 인터넷 문화와 그것이 초래하는 문제가 ‘사브리나’와 엔(n)번방 사건의 교집합을 이룹니다. 논의는 흔히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등 기술 자체를 문제 삼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술을 통해 사람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입니다. 인터넷의 편재성과 가속도는 사람들이 더 말초적인 자극을, 흥분을, 더 가볍고 더 강렬한 ‘뉴스’를 찾아다닐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직접 대면하지 않고 화면으로 접하는 세상이기에, 사람들은 자극의 원천으로만 인터넷을 대하고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은 잊어버립니다. ‘사브리나’의 경우, 사브리나 살해 소식은 자극적인 언론 보도와 음모론으로 얼룩지고, 피해자들을 후벼 팝니다. 엔(n)번방 사건의 경우, 텔레그램이 제공한 익명의 장소 뒤에 숨은 자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피해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할 수 있었고, 이것은 다시 그 안에 형성된 폐쇄적인 거래망 속에서 돈과 영상을 교환하는 순환 구조를 정립했습니다. 사건이 폭로되어 수사망에 잡힌 이후, 언론과 여론은 어떻게 하면 이들 ‘악마’를 더 강하게 처벌할 것인가에만 집중합니다. 피해자의 보호와 관련된 논의가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 ‘순전한 피해자’ 논의로 이야기가 전도되는 것은[9]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가 살도, 피도 없는 차가운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을 통한 연합을 위하여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꾼’이라는 에세이에서 정보와 이야기를 구분합니다.[10] 둘은 시공간적으로 떨어진 먼 곳에서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선 같지만, 이야기가 무언가를 속에 숨겨놓고 있다면 정보는 설명과 이해가 가능한 것이라는 차이점을 지닙니다. 벤야민의 평가를 위에서 풀어낸 것과 연결해 본다면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이야기는 몸을 지니고 있지만, 정보는 몸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이야기꾼이 자신의 육성과 몸짓, 표정으로 전달하는 이야기는 청취자에게 비밀을 함께 전달합니다. 발화된 말이 전하는 내용에 채 담기지 못한 것을 이야기꾼의 몸이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이, 이제 인터넷이 전하는 정보는 그 자체로 완결된 것입니다. 정보는 정보 그 자신을 온전히 전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소멸합니다. 그렇기에, 정보 뒤에 있는 사람에게 우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것이 나에게 유용한지 따져보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여기에 윤리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엔(n)번방에 접속하던 이들에게, 텔레그램 속 인물은 그저 자신의 자극을 채울 성인물 영상 배우와 같은 것으로 다가왔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브리나’ 속 인터넷 여론이 캘빈, 테디, 사브리나를 배우로 다룬 것처럼. 그들이 몸을 박탈당하고 정보로만 남았기에, 얼마든지 자극과 즐거움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프리다 칼로, ‘부서진 기둥’ (1944). 18세의 칼로는 교통사고로 버스 철제 난간 기둥에 관통당하는 큰 외상을 입는다. 어릴 적 의사가 되기를 꿈꾸던 칼로는 꿈을 포기해야 했고, 평생 고통에 시달린다. 그림에서 칼로의 몸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부서진 기둥(broken column)으로 은유된 척추(spinal column)이다. 칼로의 척추는 사고로 망가졌고 평생 그를 괴롭히는 원인이었지만, 그 고통을 담아낸 예술은 불멸로 남아 우리 자신의 고통을 반추하게 한다. 고통은, 너무도 다른 우리를 묶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다.
물론, 우리는 엔(n)번방 사건이 우리 사회의 성적 담론이나 가부장적 사회 구도를 일깨우고 있는 부분에 관해 충실히 다뤄야 합니다. 어긋난 성 관념을 바로잡고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경제적 제도를 고쳐야 합니다. 더하여, 재발을 막기 위해 충분한 처벌의 강도 또한 논의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터넷 사회였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음을 잊어선 안 됩니다. 철학적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현실이 정보로 바뀌면서 나타난 역효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계가 정보가 되었기에,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에 더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 와중, 인터넷은 빠른 자극에만 관심을 두는 관계들을 통해 가학의 극장을 빚어냅니다. 이 극장을 처음 만들어낸 ‘박사’와 일당들, 그곳에서 함께 여성들을, 아이들을 착취한 이들이 주연이 되는 무대를, 우리 또한 관람하면서 자극이 만들어내는 열광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묻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모두 다 잘못했으니 성착취자들을 벌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있고, 오십 보는 백 보와 다릅니다. 이는, 우리가 가해자에게만 맞추고 있는 관심의 초점을 고통받고 있는 이에게 돌려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분명 고통스러운 경험이 되겠지만, 그 시작으로 ‘사브리나’를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 함께 연합해 이 문제를 상대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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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주. 성착취물 보기만 해도 징역 3년…국회 통과한 ‘n번방 방지법’ 내용은. 뉴스1 [Internet]. 2020년 4월 30일 [cited at 2020년 5월 2일]. Retrieved from: https://www.news1.kr/articles/?3922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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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드로나소. 박산호 옮김. 사브리나. 아르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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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이야기꾼: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 서사·기억·비평의 자리. 도서출판 길;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