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모두가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가운데 ‘코로나 블루’와 ‘코로나 레드’가 사회를 뒤덮고 있다. 신경증을 벗어나지 못한 뭉크의 그림처럼. 에드바르 뭉크, 불안 (1894)
안타깝게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는 당분간 계속될 예정입니다. 내년 말까지 이어질 거라는 예측이 간간이 보이지만, 지금으로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가는 것 같지요. 마스크를 쓰지만, 생활 여러 부분에 제한이 걸리고 처지가 어려운 사람도 많습니다. 세월호 이후처럼, 다시 나라 전체가 우울증에 빠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서로의 상황이 다르고 가끔만 만나다 보니, 자기 이야기를 하기도 어렵습니다. 바쁜 사람은 코로나19로 인해 일이 어려운 사람 앞에서 바쁘다고 이야기하기 어렵고, 괜찮은 사람은 혹시 아팠거나 코로나19에 엮였을까 조심스러워 괜찮다는 이야기를 선뜻 하지 못합니다. 아픈 사람은 혹시 확진자로 의심받을까 아픈 이야기를 꺼내기 힘들고, 어려운 사람은 자기 상황을 말하는 것이 혹시 징징대는 것으로 여겨질까 걱정입니다. 다들 힘들다고 말을 하지만, 속을 쉽게 터놓지 못하죠. 감염 차단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이제 우리의 마음 사이 거리도 벌리고 있습니다.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고, 다들 힘든 시기에 약한 소리 하는 게 별 득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조심하게 됩니다. 마치 말을 더듬는 사람처럼, 말을 꺼내는 것이 자기 약점을 드러낼까 봐 무서워 합니다. 점점 사회는 적막에 빠지고, 갈 곳 없는 말은 인터넷에만 와글댑니다.
이런 시점에 정용준 작가의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1] 말을 더듬는 주인공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공동체에서 힘을 얻는 모습을 보면서 울컥하게 된 것은, 제가 이런 자리를 너무도 그리워 하고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오늘은 소설 속 주인공이 말을 더듬는다는 이유로 겪는 고통을, 그 고통으로 인해 만나게 되는 사람을, 그 사람들로 인해 그가 얻는 “강제 위로”를 살펴보려 합니다(강제 위로는 정용준 작가가 인터뷰에서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 위로가, 코로나19로 침묵하게 된 우리에게 가닿으리라 믿으며.
“내가 말하고 있잖아”. 정용준 작가는 작품에서 얼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내보이는 편이다. 그것은 얼어붙은 마음이기도 하고, 얼어붙은 말이기도 하다. 얼음은 사람들 사이 간극을 만들지만, 그 얼음을 품에 안은 사람들끼리 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출처: 알라딘
소년, 말하기 위한 분투
‘나’는 열네 살 소년입니다. 엄마와 둘이 살고 있지요. 때는 세기말이라고 불렸던 1999년입니다. 말을 더듬는 것 때문에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나’는 우연히 스프링 언어 교정원에 다니게 됩니다. 이전 언어 치료소에서 호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나’는 이곳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말더듬증을 병으로 여기는 사람들, 끊임없이 할 수 있다고 다그치는 사람들은 도무지 왜 말이 나오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이리라 지레짐작하기 때문입니다.
말은 커다란 덩어리처럼 걸려서 입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나’를 이해하는(본인도 말더듬증이 있었던) 교정원 원장은 ‘나’에게 말 덩어리를 줄이고 부드럽게 만들어서 밖으로 빼내는 연습을 시켜요. 한편, 이곳에는 각자의 이유로 말을 더듬거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루트’, ‘마야코프스키’, ‘핑퐁’, ‘모티프’, ‘처방전’, ‘곰곰이’.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였다.” (15쪽) 사람들에게 부여된 별명은 지금 발음하기 가장 어려운 단어입니다. ‘나’의 이름은 일단 ‘무연’이 되었습니다. ‘무연’이란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의 이름인데, 자기소개를 시작하면서 “무연중을 다닙니다”라는 말도 꺼내지 못했기에 이런 별명이 붙은 겁니다. 원장은 ‘나’와 비슷한 또래도, 같은 학교에 다니고 방송반 활동을 하며 왜 여기를 다니는지 이해가 안 되는 ‘루트’, 그리고 기타를 매고 다니며 말을 하지 않고 필담으로만 대화하려는 ‘곰곰이’를 이어줍니다.
‘나’는 교정원에서 만난 사람들에 익숙해지며 나름 말을 쉽게 꺼내는 방법을 찾아 나갑니다. ‘루트’와 ‘곰곰이’는 수업 시간마다 읽기 발표를 시켜 ‘나’를 괴롭히는 국어 선생에게 복수하는 계획을 함께 세우고, 외과 의사인 ‘처방전’ 이모와 ‘할머니’는 주인공이 집에서 받지 못하던 따스함을 전해줍니다. ‘나’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엄마는 일하느라 바쁘기도 하지만 애인을 자꾸 바꾸면서 주인공이 안정을 찾지 못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거든요.
‘나’는 교정원 사람들과 원장의 노력으로 조금씩 말하는 방법을 찾아가지만, 원장이 그에게 나름 큰 도전을 제시했을 때 이를 성취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교정원에서 도망칩니다. 그동안, 엄마는 한번 떠나갔던 애인을 다시 만납니다. 엄마도, 애인도 싫은 ‘나’는 그 마음을 공책에 적어 나갑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마음껏 표현해 놓은 공책이 어느날, 엄마 애인의 손에 들어가요. 공책을 읽고 다시 ‘나’와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애인에게 덤빈 ‘나’. 엄마, 애인, ‘내’가 취조받는 장면에 나타나는 것은 교정원 사람들입니다.
풀려나가는 결말도 좋지만, 이 책을 다 읽고 손에 놓을 수 없는 이유는 마음을 찌르는 대사들 때문입니다. 원장은 할 수 있다고, 힘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나’에게 말하죠. “하지만 아니잖아. 천천히 말해도 안 되잖아. 차분하게 말해도 어렵잖아. 떨려서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말을 못 해서 떨리는 건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 (12쪽) 엄마는 일기를 쓰는 나를 보고 말하죠. “할 일 없이 일기 같은 걸 쓰면 나중에 글쟁이가 된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불만이 많고 허황된 생각만 하고 살아. 현실 감각도 없고 생활력도 없어서 굶어 죽기 딱 좋은 인생이 되는 거지.” (81-82쪽) 용감 아저씨(처음에 ‘모티프’라는 별명으로 불리던)는 딸의 사진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얘가 네 살인데 말을 말을 더듬어. 나를, 나를 닮아서. 그래서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지. 내가, 내가 더듬지 않아야, 연서 연서도 안 더듬을 테니까.” (92쪽)
실패의 힘
작품을 읽으면서 아무래도 비슷한 성장 소설의 구도를 지닌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이 떠오릅니다. 열네 살 소년 모모의 눈을 통해 프랑스 구석, 소외된 삶을 보여주는 ‘자기 앞의 생’은 차오르는 슬픔을 냉소로 치우려 하죠. 모모의 냉소가 오히려 독자에게 소외된 이들의 사랑을, 서로에게 주는 위안을 보여준다면,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정공법을 취합니다. ‘나’의 약한 점을 공유하는 사람들, 그들은 나에게 멋진 성공담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대신, 그들은 함께 실패하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나의 실패 옆에 같이 있어 줍니다.
주인공이 도망쳤던 것은 지하철역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언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그 모습을 보던 ‘루트’(나중에 ‘24번’으로 별명이 바뀝니다)는 말합니다. “나는 이걸 고치길 원하면서 정작 말을 더듬을 것 같으면 도망가 버렸어. 어렵지 않은 말, 문제없는 말만 계속하면서. 그런데 넌 아니었어. 넌 잘했어. 넌 정말 잘했어. 내가 봤어. 너 말하는 거.”(126쪽)
사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안녕하십니까”밖에 말하지 못했습니다. 객관적인 평가표를 들이댄다면, 주인공의 행동을 채점한다면 실패했다고 말해야 할 거예요. 하지만, 교정원의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성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시도했음이, 실패하여 넘어지더라도 한번 넘어졌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들 또한 그 지점에서 몇 번이나 걸려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자기계발서를 읽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어떻게든 성취하며 살아야 하는 ‘성과사회’에 사는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르겠어요.[2] 취업을 위해, 승진을 위해, 뭐 하나라도 얻기 위해 안달하며 살아야 하는 지금, 실패한 이야기가 뭐 그리 중요할까요. 소설 속 ‘나’는 교정원에서 잘 배워서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멋진 발언을 해내고, 소설 결말 부에선 완전히 말더듬증을 극복해야죠. 그래야 읽는 사람들에게 극복의 희망을 줄 테니까요. 하지만, 소설이 보여주는 모습은 다른 곳을 향합니다. 주인공이 보여주는 것은 노력을 통한 극복이 아니라, 서로 아픈 사람들이 이룬 공동체입니다.
예컨대, 외과 의사인 이모는 주인공이 보기엔 똑똑하고 말도 잘해서, 교정원에 다닐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모는 말합니다. “음, 스프링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내 이름이 뭐였는지 알아? … 미꾸라지. 다른 사람은 다 노트에 적힌, 말하기 어려운 단어로 이름을 지었는데 나는 늘 말하기 어려운 말을 말하려 하지 않고 계속 빠져나가고 도망친다고 원장이 ‘미꾸라지’라고 이름표에 적었지. 나는 겁쟁이란다. 말을 잘 하는 게 아니야. 어려운 걸 포기하고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거지.” (47쪽) ‘나’도, 이모도 완성되어 있지 않아요. 그저, 서로의 한계를 내보이며 함께 걸어갈 뿐.
코로나19 앞, 실패로 함께한다는 것
최근 매체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표현으로 ‘코로나 블루’와 ‘코로나 레드’가 있지요. 코로나19에 색깔을 칠한 건 아니고, 코로나19로 인한 블루(슬픔 또는 우울감)와 코로나19로 인한 레드(분노 또는 공격성)를 가리킵니다. 집에 갇혀 있다 보니 답답하고 불안해서 우울과 분노가 심해진다고 정신의학적 해석이 덧붙습니다. 여기에, 우울감과 공격성을 설명하는 축을 하나 더 얹어봅니다. 감염병이 가져오는 불안과 공포입니다.
불안과 공포는 비슷한 기분인 것 같지만, 대상의 유무에 차이가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불안은 명확한 대상이 없음에도 느끼는 불쾌감을 가리켜요. 반면, 공포란 사태나 대상의 발현을 예상하기에 느끼는 불쾌감이지요. 코로나19로 인하여 경제 활동이 제한되고, 당장 생활에 어려움이 닥칠 때 느끼는 감정은 공포입니다. 반면, 막연히 코로나19에 걸릴까,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미래는 어떨까 생각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불안입니다.
감염병이 일 년 가까이 지속하면서 우린 두 감정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병에 걸리는 것은 당면한, 예측 가능한 공포가 되었지만, 경제 위기는 당장 다가올 것 같으면서도 멀리 걸린 먹구름처럼 그림자로 드리워 사람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문학 작품은 이런 감정을 잘 묘사하고 있지요. 공포와 불안의 혼재가 가져오는 좌절과 무력감 말입니다. 예컨대 ‘페스트’에서 카뮈는 감염병에 둘러싸인 도시를 놓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자 개인의 운명이란 더 이상 없었고, 페스트라는 집단의 역사와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감정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극심한 것은 이별과 유배의 감정이었으며, 거기에는 공포와 분노가 담겨 있었다.”[3] ‘로빈슨 크루소’로 유명한 다니엘 디포가 1665년 런던 대역병을 배경으로 쓴 ‘전염병 연대기’에는 여러 공포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페스트를 향한 공포, 격리될 것에 대한 공포, 구원이 없는 상황으로 인한 절망과 공포심까지.[4]
17세기 런던을 덮친 페스트의 위력을 그린 그림. 도시를 배경으로 가운데 죽음이 사람들을 내몰고 있다. 오른쪽에는 도망치는 사람들과 격리 조치를 위해 그들을 막는 이들이 보인다. 왼편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관이 정적인 그림에 긴박감을 안기며, 이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 불안을 전달한다. 이 그림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Plague in London (1625). 출처: 사이언스 포토 라이브러리
공포와 불안으로 우리는 무력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의 방역 결과를 손 모아 기다리고, 감염자 수가 줄어들면 함께 기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경제적인 피해를 가져오긴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무자비한 감염병을 통제할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려는 거지요. 하지만, 그 생각이 좌절감을 떨쳐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단지 개인에게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죠. 사회 전체가 불안과 공포에 휩쓸려 우울과 분노로 흐르고 있습니다.
코로나 블루를 극복하기 위해 산책을 하고 코로나 레드를 위해 분노를 다스리는 대화법을 찾는 것도 필요합니다. 심한 분들에겐 정신의학적 도움을 드릴 방법을 제도적으로 논의, 정신과의 접근성을 높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불안과 공포를 함께 다독일 방법은 없는 걸까요. 이미 코로나 블루와 코로나 레드는 심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해결 방법 하나를, ‘내가 말하고 있잖아’의 교정원 사람들에서 엿봅니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내던져진 2020년이라는 삶에서 각자 실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시는 많은 분도 계시죠. 하지만 최소한 저에겐 하루하루는 버겁고, 매번 예측과 다르게 흘러가는 일들 때문에 매일은 고통스럽습니다. 이렇게 통제를 잃은 삶을 소설 속 주인공이 경험하는 말더듬증에 빗대 봅니다.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는 말과, 원하는 대로 굴러가지 않는 생활의 계획들은 얼추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실패의 경험을 통해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성공담이나 빛나는 모습이 아니라, 삶에서 어려운 경험을 서로에게 나누는 것. ‘잘해, 성공해, 이겨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그대로도 멋있어’라고 말하는 것.
낭만적인 말, 그리 달갑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 삶에 빠진 것, 이 공포와 슬픔을 함께하는 방법을 성공담이 아닌 실패의 경험에서 찾는다는 생각은 저에게 작은 위로를 줍니다. 쉽게 물러가지 않을 코로나19 앞, 우리의 실패가 쌓여 만들어 낼 작은 그물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성공한 이들의 빠른 경주가 아닌, 실패한 이들의 견고한 어깨로 만들어져 있지요.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참고 문헌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한병철. 김태환 옮김.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알베르 카뮈. 최윤주 옮김. 페스트. 열린책들; 2015.
다니엘 디포. 박영의 옮김. 전염병 연대기. 신원문화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