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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아이는 부모의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등록 2021-01-26 08:59수정 2021-01-26 09:25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 (42)
‘야만적인 앨리스씨’, 폭력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프리다 칼로, 죽음의 마스크를 쓴 소녀(Girl with Death Mask, 1938).
프리다 칼로, 죽음의 마스크를 쓴 소녀(Girl with Death Mask, 1938).

한 아이의 죽음 앞에서 사회 전체가 분노했다. 많은 이들이 추모를 위해 아이의 이름을 호명하는 사진을 찍었다. 아이를 죽인 양부모의 재판정 앞에 많은 시민이 모여 시위했다. 많은 가능성과 꿈이 그 생명과 함께 사라졌다. 다시 한번, 아이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표한다. 그 작은 몸에 가해졌을 폭력과, 고통의 크기에 치가 떨린다.

금방 또 한 아이가 맹렬한 추위에서 밖을 헤맸다. 아이는 큰 위기에 처하기 전, 다행히 도움의 손길을 얻었다. 많은 사람이 아이를 돌보지 못한 부모를 욕했다. 그러나, 혼자 아이를 키우던 엄마는 그날도 출근을 준비하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아이를 어찌하지 못한 엄마는 그러면 집에 있으라 하고 나갔다. 아이는 집에서 버티고 버티다가 집에서 나왔다. 한파가 몰아치던 날이었다.

부모를 처벌하면 끝일까. 물론, 당연히 처벌도 필요하다. 하지만, 재발 방지에 관한 논의를 해야 한다. 어떤 범죄에선 둘은 한몸이다.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강한 처벌을 활용한다. 하지만, 아동을 향한 가정폭력은 다르다. 처벌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막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모두가 알고 있다. 처벌해야 하고, 제도적 접근으로 재발을 막아야 한다. 아동학대, 가정폭력을 막기 위해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교사, 의료인 등 아이를 돌보는 이들이 눈치챘을 때 신고해야 한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폭력이 이뤄졌는지 확인하고, 폭력이 있을 경우 부모와 아이를 분리하며, 상담에서 양육권 말소까지 이르는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여 아이를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한 제도는 있다.

그러나,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 교사와 의료인의 신고는 묵살되곤 한다. 경찰은 조사를 꺼린다. 가정과 분리된 아이는 갈 곳이 별로 없다.

제도의 수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전에 이 문제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문제는 아닌가? 자녀는 가정의 것이며, 따라서 일단 가정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 동양의, 아니 한국 전통의 관점이 모두를 유령처럼 사로잡고 있는데, 가족이라고 하는 신성한 제도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데, 과연 아동을 보호할 수 있을까?

전통은 지워졌다고, 우리는 과거의 질서와 단절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알지 못하면서 과거를 반복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날카롭게 분석한 이데올로기의 구조가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참여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사회적 현실에 참여한다. 가정—또는 효—이데올로기는 우리를 너무 강하게 사로잡고 있어서, 우리는 심지어 그것이 과거의 질서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가정의 존속을, 부모-자녀의 수직적 지배를 반복한다. 이것은 도처에 있다. 가정에도, 사회에도, 제도에도 있다. 예컨대, 우리가 제도적으로는 완비되어 있음에도 아동 보호가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녀가 부모의 것이라 믿는 믿음이 모두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것인데,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것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심지어 그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며 글을 쓰는 이에게도 깊이 심어져 있기에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이를 벗지 못하면 아동학대는, 가정폭력은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나의 폭력을 듣는 너희, 불편하라: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생활

그 폭력의 한 가운데에서, 세상이 뒤집히기를 바라는 목소리를 하나 들어보자. 황정은 작가의 2013년 작 ‘야만적인 앨리스씨’다. 소설의 주인공 앨리시어는 엄마의 지긋지긋한 폭력에 쩌들어 있다. 엄마는 꿈을 꾸었다고, 새 옷에 때가 묻었다고, 아니 그냥 거기 있다고 앨리시어와 동생을 때린다. 아버지 또는 ‘앨리시어의 노인’—이미 한 번 결혼했고, 장성한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후처를 맞아 새 아이들을 낳았다—은 폭력을 말리지 않는다. 아니 그에게는 개입할 힘이 없다. 엄마는 그 부모에게 심한 폭력을 당했다. “그녀는 너무너무 배우기를 원했으나 배우지 못했고 그녀 자신도 가장으로부터 누구 못지않게 맞으며 자란 뒤엔 요릿집 주방으로 보내졌으며 월급을 매달 아버지에게 빼앗겼고 참다못해 벌인 첫번째 월급 투쟁에서 발가벗겨져 집밖으로 쫓겨나 눈 속에 서 있어야 했다.”(40~41쪽) 그러나, 그것은 핑계가 될 수 없다. 앨리시어의 말처럼. “웃기시네.” (41쪽)

앨리시어의 동생은 모자란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모자람이 지적장애인지, 아니면 폭력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행동 불능 상태가 타인에게 모자람으로 인식되는지 알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동생은 학교에서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해 결국 바지에 똥을 싸고, 모자란 아이로 교실에서 기피 대상이 된다. 그 일을 들은 엄마는 “병신 같은 새끼가 쌀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네? 세계에 그런 병신은 오로지 너 뿐일 거다”하며 다시금 폭력을 휘두른다(40쪽). 그렇다면, 동생이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만든 것은 그 자신의 문제인가, 학교인가, 아니면 엄마인가.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출처: 알라딘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출처: 알라딘

반복되는 폭력에 앨리시어는 대항하고자 한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힘으로 엄마를 응징하는 것. 어느 순간 자신이 엄마보다 커지고 있음을, 더 힘이 세졌을 수도 있음을, 그래서 “언젠가는, 조만간은, 이제 곧, 역전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음을 아는 앨리시어는 그래도 자신의 힘을 휘두르지 않는다. 아직 “앨리시어에게 그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125쪽). 다른 방법은 사회에 호소하는 것이다. 친구 고미와 구청을 찾아간 앨리시어는 제도의 무능함을 본다. 앨리시어는 가정복지과가 임시 건물로 지어진 신관에 있음을 알고 바로 찾아가지만, 공무원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여기는 상담하는 곳이 아니고 행정 업무를 보는 곳이라서, 음, 그러니까 행정적인 부분을 처리하는 곳이고, 사설기관에 상담을 맡기고 있다며 필요하다면 전화번호를 주겠다고 덧붙인다.” (104쪽) 겨우 받아든 외주 상담 업체의 전화번호를 통해 재차 도움을 찾으려던 앨리시어는 듣는다. 부모와 상담하라고.

그래요…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 상당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고, 가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나는 판단해요. 그렇지만 이런 경우 부모님 각각이 지니고 있는 상처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거거든요. … 우리 학생은 가족에 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만, 만사의 근원은 가족인 거예요. 가족이 붕괴되면 사회가 붕괴되고 사회가 붕괴되면 나라가 아주 망조가 드는 거거든. 그래서 우리 센터의 활동 목적이 붕괴된 가족을 복구해 보자… (107~108쪽)

따라서, 앨리시어가 이 상황을 역전하는 방법은 현실에 없다. 앨리시어는 동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게 견주어 탈출구를 찾아보지만, 그는 자신의 위치를 다시 확인할 뿐이다. 앨리스가 정원에서 찾았던 구멍에 자신도 들어가긴 했지만, 무한히 떨어지고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그는 앨리스(Alice)의 분노(ire), 앨리시어(Alicire)로 남아서 우리에게 말한다.

그대는 어디에 있나.

이제 그대의 차례가 되었다. 이것을 기록할 단 한 사람인 그대,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이것을 어디까지 들었나.(161~162쪽)

아동 학대의 죄를 정상 가족에 묻는다

가정폭력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그것이 환기하는 불편함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하는 태도다. 악인을 단죄하는 것으로 책임이 끝났다 여기면, 현실에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폭력을 만들고 대물림하는 구조는 굳건하다. 그것은, 가정이 사회의 기초이며 따라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이 오히려 현실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그렇다. 가정의 신성함이 내뿜는 악취는 잊힌다. 아니, 잊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가 안전하니까.

오랫동안 아이는 가정의 것이었고, 그 처분은 부모에 달려 있었다. 유교적 질서는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그 이념적 후손을 자처하던 조선에서 더욱 강해졌고, 효는 가정과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원리로 자리 잡았다. 여전히 우리는 자녀가 부모를 섬겨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그래서일까. 아동복지법은 학대로 분리된 아이를 다시 원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돌아간 아이는 열에 아홉 다시 학대당한다.

그 구조 안에서 아이들이 병든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받는다. 어딘가에선 아이들이 죽어간다. 여성들도 병든다. 가부장주의라고 말하지만, 서양의 후견주의(paternalism)와 동양의 가부장주의는 분명 다르다. 전자가 남성의 권력만을 말했다면, 후자에는 가족의 권력이 덧붙어 있다.

혹자는 그것이 그렇게 부정적이기만 한가 물을 것이다. 분명, 가족은 중요하고,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기본 구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가족이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음에도 우리의 ‘정상 가족’, 아버지, 어머니, 딸, 아들의 4인 구성을 지켜야 하는가. 고통을 잊어서라도 가족을 지켜야 하는가. 아이들의 아픔을 묻어서까지 그런 가족은 신성시되어야 할 어떤 것인가.

이 위에서, 제도의 변화를 묻는다. 여러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고 그런 가족 각각의 형태를 존중할 것을, 서로를 보듬고 맞잡는 모든 형식의 가족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때에만, 아이들을 구하려는 노력이 실체화될 수 있다.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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