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구자들이 주도한 국제 공동연구팀이 금 원자들이 모여 나노 결정을 생성하는 순간을 세계 최초로 관찰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 `사이언스' 제공. © Paul Straathof/Paul's Lab
알렉산더 플레밍은 깜박 잊고 창문을 열어놓은 채 휴가를 다녀와 접시에 핀 푸른 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루이 파스퇴르도 내버려둔 콜레라균을 우연히 닭한테 주사해 백신 개발의 실마리를 얻었다. 국내 연구진이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며 10년 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결정핵 생성’ 순간을 관찰하는 데 성공해 논문이 과학저널 <사이언스> 28일(현지시각)치에 실렸다. (DOI :
10.1126/science.aaz7555)
우리가 보는 대다수 고체물질은 원자가 규칙적으로 모여 이뤄진 결정으로 구성돼 있다. 눈핵(빙정)에 과냉각된 수증기가 모여 눈송이를 만들듯이 물질이 형성되는 데는 원자들이 모여 ‘핵’을 생성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 핵 생성 과정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원자가 잘 정렬된 결정 구조가 핵을 형성해 그 구조를 유지하며 커질 것이라는 고전적인 이론과 비결정 구조에서 결정 구조로 변하면서 물질을 형성한다는 비고전적 이론만 제시됐을 뿐 실제로 핵 생성 과정의 관찰에 성공한 경우는 없었다.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기계공학과 이원철 교수는 2012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 연구원 시절에 같은 대학에서 박사 과정중이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박정원 교수 실험실에 들렀다가 그래핀 위에 이상한 무늬가 생기는 현상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이 무늬를 분석한 논문을 2015년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에 발표했다. 이상한 무늬는 금 원자를 방출하는 나노물질(AuCN 나노리본)이었는데, 전자현미경으로 사진을 깨끗하게 찍기 힘들었다. 사진을 찍으려 전자빔을 비추면 나노리본이 분해돼 금 나노결정으로 돌아가버렸다. 비록 원하는 사진을 얻지는 못해도 금 나노결정이 자라는 모습이 찍힌다는 데 두 사람은 주목했다. 나로리본을 찍는 대신 오히려 금 나노결정 형성 과정을 촬영하기로 연구 방향을 바꾸기로 의기투합했다. 촬영을 위해서는 미국 로렌스버클리국립연구소가 보유한 세계 최고 성능의 전자현미경이 필요했다.
처음부터 정렬돼 결정을 이루기 시작한다는 고전적 핵 생성 이론.
원자들이 무질서하게 뭉친 덩어리 구조와 원자가 정렬된 결정 구조의 두 상태를 가역적으로 왔다갔다하며 진행된다는 연구팀의 새로운 이론.
로렌스연구소의 전자현미경 전문가 피터 에르시어스를 연구팀에 합류시킨 뒤 2년여 동안 수없는 촬영을 거듭했다. 나노리본 시편이나 현미경 등 실험 조건을 최적화시켜도 나노 결정이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를 반복했다. 이원철 교수와 연구팀의 전성호 연구원은 “결정이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이 나타났다 구조가 무너진 비결정으로 돌아갔다는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또 한번의 연구 방향 선회는 공동연구팀의 여러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해결해야 했다. 다행히 기존 연구팀은 두 사람의 의견에 동의를 했고 외부의 다른 전문가들까지 합류해 연구의 질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논문 심사 과정에 “전자빔과 같은 특이한 원인에 의해 일어난 것일 수 있다”라는 지적은 뛰어넘지 못할 벽 같았다. ‘전자빔 없이 촬영이 불가능한 전자현미경 촬영 결과를 전자빔 없이 얻으라니.’ 연구팀은 좌절하지 않았다. 전자빔의 강도를 조금씩 낮춰 일만분의 일까지 줄였다. 다행히 같은 양상의 현상이 일어났다. 2019년 10월15일 제출된 논문은 심사에만 1년을 훌쩍 넘겨 지난해 12월28일 게재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박정원 서울대 교수와 한양대 전성호 연구원, 이원철 교수.
연구팀은 금 원자들이 모여 나노 결정을 생성하는 순간을 1천분의 1 수준의 초고속 초고해상도 영상으로 촬영했다. 연구팀은 이 영상을 바탕으로 핵 형성 과정은 금 원자들이 ‘무질서하게 뭉친 덩어리 구조’와 ‘원자가 정렬된 결정 구조’ 두 상태를 가역적으로 반복하며 진행된다는 새로운 이론을 세울 수 있었다.
박정원 교수는 “결정핵 생성의 새로운 원리를 발견하고 검증해 고체물질이 형성되는 과정의 근본 원리를 알아냈다”고 말했다. 이원철 교수는 “박막 증착 공정의 극 초기 상태를 실험적으로 재현했다는 의미가 있다”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관련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근영 기자
ky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