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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이 혐오의 시대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등록 2021-03-11 10:01수정 2021-03-11 22:18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 (44)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다를까…대만 영화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공 자한(진호삼 분)과 버디(증경화 분). 출처: 네이버 영화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공 자한(진호삼 분)과 버디(증경화 분). 출처: 네이버 영화

2021년 2월 말, 두 개의 부고를 연달아 들었다. 한 명은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경력이 있으며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를 이끌었다. 다른 한 명은 육군에서 하사로 복무하다 휴가 중 성전환 수술을 받았고, 돌아와서 여군으로 전환해 복무하길 희망했으나 강제 전역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둘에게 가해진 고통은 너무 깊었다.

젠더 문제라는 깊은 골은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혐오다. ‘혐오의 시대’라 할 만큼 많은 혐오의 선이 그어진다. 성을, 연령을, 신체적 특성을, 경제적 조건을 이유로 혐오를 표출하는 일은 계속 사회에 짐을 지웠던 차별과 함께 점차 증폭되고 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해결책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서로를 비난하는 말만 더 넘쳐난다.

‘인사이드 아웃’ (2015)의 ‘까칠이’. 원래 이름은 disgust, 즉 혐오다. 기쁨, 슬픔, 분노는 사라지고 혐오만 커진 세상이 된 것 같다. 출처: 아이엠디비
‘인사이드 아웃’ (2015)의 ‘까칠이’. 원래 이름은 disgust, 즉 혐오다. 기쁨, 슬픔, 분노는 사라지고 혐오만 커진 세상이 된 것 같다. 출처: 아이엠디비

대만의 2020년 영화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1987년을 배경으로 한다. 대만을 이끌던 국민당 정부가 내린 계엄령이 40년 만에 해제된 해다. 국민당이 반공을 이유로 독재 체제를 유지했던 시기가 끝이 났지만, 변화의 시대가 항상 그러했듯 과거의 질서와 새로운 의식의 변화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두 소년이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느끼는 사랑과 고통을 영화는 격정적인 시선으로 담아냈다. 이것이 먼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역사 때문, 최근 벌어진 슬픈 일들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은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을, 그 위에 그어진 도덕적 선들을 읽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우리 사회로 돌아가자. 이 혐오의 시대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이야기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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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찬란하고도 잔인한 것: ‘버디’와 나

주인공 자한은 가톨릭 계열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다. 오랫동안 기숙 남학교로 운영됐던 고등학교도 계엄령 해제 앞에서 변화를 기다리는 중이다. 곧 학교는 남녀 공학이 되고 두발 규제도 사라질 것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들의 연애도 허용될 것이다. 젊음의 힘을 이기진 못할 테니까. 하지만, 학교도, 사회도 허용하지 않는 것, 허용하지 않을 것이 하나 있다. 동성애다.

남자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보니 동성애적 경향을 보이는 아이들이 나타나고, 이들은 배척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집단 폭행을 당하곤 한다. 밤에 몰래 월담을 하여 여학생을 만나는 학생들이지만, 기숙사 내에서 남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혐오스러운 일로 여긴다.

자신의 성적 지향을 모르던 자한은 수영장에서 처음 버디를 마주치게 된다. 신기한 녀석이었던 버디는 어느덧 자한의 절친이 되고, 자한은 버디로부터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그토록 또래 집단으로부터 경멸의 이유였던, 동성을 향한 사랑임을 알게 되는 데엔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한 소년의 사랑을 다룬 2017년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이 영화에 겹쳐 보이는데, 카메라가 배우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데 집중한다는 것과 제목에 두 영화 모두 ‘당신의 이름’이 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두 영화는 또 다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는 물론 사회의 편견이나 시선이 엿보이긴 하나 이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일은 없다.

2017년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티모시 샬라메 분)와 올리버(아미 해머 분).
2017년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티모시 샬라메 분)와 올리버(아미 해머 분).

그러나,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공은 부정하는 시선이라고 할 만큼, 영화 곳곳에 벽이 등장한다. 자한과 버디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둘은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아상을 넘어야 한다. 주변의 친구들에게서 오는 멸시의 시선은 물론이요, 그런 그들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 가정과 학교도 높다란 벽을 세운다.

예컨대, 장제스 총통의 추모식 참석을 핑계로 둘은 타이베이 여행을 떠나는데, 시장에서 한 시위자를 만난다. 여장을 한 그는 ‘결혼은 모두의 것’이라는 팻말을 들고 동성 결혼을 외친다. 그러나 곧 그를 막으려는 사람들과 경찰에 의해 시위는 금방 끝이 난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벽은 자신이다.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지만, 또한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을 표출하는 자한은 자신이 동성애적 성향이 있음을 부정하려 한다. 버디를 향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그는 자신을, 친구를 미워하여 벽을 정당화하려 하지만, 그것은 상처를 남길 뿐이다. 자한은 큰 고통을 넘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성공한다. 하지만.

영화의 시간은 두 개다. 하나는 1987년 두 소년의 학생 시절이며, 다른 하나는 30년 뒤인 2020년 지금이다. 이렇게 구성한 이유는 젊은 시절의 사랑을 추억하고 다시 떠올리는 현재의 인물이라는 표면 위에 여러 가지를 겹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적 시간이었던 대만의 이전 상황과 그를 돌아보는 현재를, 좀 더 직접적으로는 성적 지향에 관한 우리의 인식 변화를 겹쳐 놓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를 본 후 그때의 구속은 정말 옳은 것이었을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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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무게

삶에는 물론 여러 질곡이 있으며,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떤 선택은 다른 선택에 비해 강한 압력을 받는다.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그중에서 아마 가장 저항이 큰 선택에 속할 것이다.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에선 30년이 지나 이제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기마저도 어렵다.

그런 벽이 영화의 두 사람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한다. 2월, 우리에게 부고로 다가온 두 사람을 누른 것도 그 벽이고, 그 위에 혐오가 무게를 더한다. 혐오는 다양한 방향에서 주어져서, 어떻게 개념화하고 상대해야 할지도 그려보기 어렵다. 모두로부터 배척을 받는 사람, 모두로부터 미움을 받는 인생. 그 증오에 명확한 이유가 있다면 정당한 분노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향한 증오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이런 증오는, 혐오는 어디에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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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는 오염을 향한 두려움에서 나온다

마사 누스바움은 법과 제도에서 감정의 역할을 논한 책 ‘혐오와 수치심’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혐오의 사고 내용은 전염이라는 신비적 생각과 순수성, 불멸성, 비동물성—우리가 아는 인간 삶의 선상에 놓여 있지 않은—에 대한 불가능한 열망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전형적으로 비합리적이다.” 분노와 혐오는 대상을 향한 폭력성이라는 면에서는 일치하나, 대상을 상정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둔다. 분노는 맞상대로부터 느낀다. 혐오는 나를 더럽힐 수 있는 것에게 느낀다.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왜 혐오가 죄악, 그리고 신의 징벌과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스 사회를 괴롭히던 전염병은 도시를 부정한 자가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같은 침대를 쓰고 있기에 도시는 오염되었다. 오염을 정화하는 데 필요한 것은 오이디푸스의 추방이다.

샤를 프랑수아 잘라베르,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1842).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를 피하는 시민들.
샤를 프랑수아 잘라베르,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1842).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를 피하는 시민들.

이렇게 혐오는 나를 더럽게 만드는 무언가를 향한 적개심과 공포를 표현하며, 대상을 배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 다른 성별을 향한 혐오, 타인종을 향한 혐오, 다른 사회적 계층을 향한 혐오 모두가 같은 구조를 지닌다. 그것은 상대방으로 인하여 내가 오염될 것을 두려워하는 감정이다. 예컨대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이유가, 그들을 보고 자녀가 따라할까 봐 무섭다는 인식이 혐오의 기본적 차원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코로나 시대’에 왜 혐오가 더 강해지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의 마음이 담아낼 수 있는 감정의 폭에는 한계가 있다. 이미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하여 걱정과 염려로 사람들의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상태라, 작은 염려에도 사람들이 크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혐오를 벗어나기 위해선 이 ‘오염’이라는 관념을, 감각을 상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저기 있는 저 사람이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체험해야 한다. 그의 생각 속에 들어가더라도 나는 더러워지지 않음을 직접 겪어보아야 한다. 그런 매체로, 소설과 영화보다 적절한 것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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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나와 그는 무엇이 다른가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보면서 혐오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지금 우리에게 다른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이것은 도덕의 문제고, 윤리의 문제다. 차별과 혐오를 철폐하라는 것이 윤리의 명령이라면, 도덕(또는 개인이나 사회가 지닌 규칙)은 그 차별과 혐오의 대상을 승인하거나 부인한다.

최근 부각된 서사윤리학이라는 분야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설을 읽는 일(또는 시를, 논픽션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일, 사진을 보는 일)이 독자에게 도덕적 명령을 내린다고 말한다. 소설 속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등장인물이 반응하는 방식과 세계가 그에 응답하는 일을 보면서 독자는 도덕적 반응을 보인다. 자신의 반응을 살피고 이를 승인할 것인지, 바꿀 것인지 묻는 것이 서사의 힘이기에, 서사윤리학은 말한다. 소설을 읽으라(영화를 보라), 그리고 그에 응답하라.

그렇다면 적어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혐오를 말하기 전에, 이 영화를 보라. 소위 ‘퀴어 영화’로서가 아니라, 비슷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가진 한 국가가 계엄령 이후에 어떤 변화를 겪는가를 은유한 작품으로 읽어도 좋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우리 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관점을 선물로 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영화는 둘의 관계에 관한 당신의 반응을 살펴보라고 명령할 것이다. 그것은 진정 악을 향한 정당한 분노인가? 오염될 것을 그저 두려워하고 있었을 뿐은 아닌가?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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