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는 기술과 신체의 계면이자, 장애와 과학이 어떻게 만날 것인지를 정면에서 물어본다. 출처: 아이엠디비
나는 직업적으로 장애를 접할 일이 상당히 있는 편이다. 소아치과를 전공했다 보니, 장애인 환자 또한 진료할 일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소아의 치과 치료와 장애인의 치과 치료가 기본 접근에서 같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장애인 환자를 볼 때마다 참 어려웠는데,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치료야 잘하면 되지만, 이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장애가 만든 조건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가, 아니면 당사자와 부모의 노력에 감탄해야 하는가? 그도 아니면, 이것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가? 장애의 경험에?
생각이 여기에 닿을 때마다, 장애의 가치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은 빼앗길 수 없는 권리를 가지므로, 장애인도 당연히 권리를 지니고 있는 고귀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과 이것은 별개인데, 장애 자체가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는가와 별개로, 장애는 개인에게 상당한, 엄청나기까지 한 불편을 안긴다. 그 불편마저 긍정할 것이 아니라면, 이런 말이 성립할 수는 있는 걸까?
그러나, 그럴수록 장애가 지닌 가치를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야 우리가 장애를 교정(장애는 치료의 대상이다)이나 시혜(장애인은 ‘정상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의 시각 바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는 두 가지 가치를 지닌다. 첫째, 장애는 문제임에도 사회 다수가 문제인지 알지 못하던 지점을 드러낸다. 둘째, 장애는 공동체성을 잊어 가는 사회에서 그 회복을 요청하고, 함께함을 실천하도록 이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전자를 장애의 인식론적 가치로, 후자를 장애의 윤리적 가치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애는 (타인에게) 불편하다. 다수가 자꾸 잊어버리고 잊고자 하는 것을 공론장으로 다시 소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장애는 소중하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잊어선 안 되는 것들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깨움을 나는 발전으로 이해한다. 발전이 삶의 높아짐이라면 앎과 함을 넓히는 것이야말로 발전이 아닌가. 그 증거를 김초엽 소설가와 김원영 변호사의 글에서 찾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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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탐구를 촉발하다
김초엽의 단편 ‘인지 공간’ 도입부에서 주인공 제나는 그동안 인지 공간의 관리자로서 살아온 삶을 벗어나려 한다. 주변 사람들은 만류한다. 그는 작은 공동체에 헌신했지만, 이제 “진짜 세계를 직면”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고 말한다.
제나가 사는 세상은 우리 세상과는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 인지 공간의 존재와 영향 때문인데, 격자 구조로 이루어진 인지 공간에 사람들은 공동의 지식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지적 능력을 공유하는 삶을 산다. 이 구조물이 없으면 이 세계의 인간은 동물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 인간은 뇌의 일부를 건물로 짓고 이를 통해 사유하고 지식을 저장하는 셈이다.
작품이 정확히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인지 공간에 들어가서 활동하기 위해선 신체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마 격자 구조라는 것이, 그 사이를 돌아다니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근력과 순발력을 요구하는 형태인 모양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친구 이브는 그런 신체 조건을 갖추지 못한 채 태어난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현격히 작고, 그저 넘어진 것만으로도 병실 신세를 져야 하는 이브. 제나는 또래에서 가장 키도, 몸집도 크다는 이유로 이브를 보호하고 이브가 지닌 특별함을 선망하기도 하지만, 그들 사이엔 명확한 벽이 있다.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 아이들은 인지 공간으로 들어가는데, 이브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제나는 인지 공간에 들어가서 자신의 지적 능력이 엄청나게 넓어진 것에 감탄하지만, 이브는 인지 공간이 지닌 한계를 지적한다. ‘인지 공간은 그 공간적 제약 때문에 일부 기억을 지워야 하며, 인지 공간이 내보이는 지식은 공동체의 평균인데 그것이 지식의 전체라고 할 수는 없다’라는. 그러나, 인지 공간이 보여주는 확장성에 매료된 상태였던 제나는 이브의 말을 무시한다.
얼마 뒤, 이브가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제나는 이브의 집을 방문하고, 그가 개인용 인지 공간인 스피어를 만들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공동체의 평균인 인지 공간이 진실이 아니라, 각자의 인식과 기억이 더해진 전체가 진실이라는 생각을 입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제나는 이브의 말을 실현하고자 한다. 직접 완성한 스피어와 함께 공동체 밖으로 탐험을 떠남으로써.
김초엽의 ‘인지 공간’이 실린 ‘2020 제 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출처: 알라딘
여운을 주는 김초엽의 이 단편은 여러 가닥으로 읽힌다. 예컨대, 다수의 평균 지식이 모인 인지 공간을 인터넷의, 허약하게 태어난 이브를 장애인의 은유로 해석하여 인터넷 접근성의 제약 또는 정보 격차(digital divide)를 비판한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또는, 단 하나의 진리만이 있다는 전통적인 철학적 관점에 반대하며 니체가 주장한 관점주의(perspectivism), 여러 관점을 합할 때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에스에프(SF)적 설정을 통해 다시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다. 또는 우리의 인지 능력은 뇌의 전기 신호뿐만 아니라 육체와 사물의 상호작용까지 포괄할 때만 제대로 설명 가능하다는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이론을 가상의 세계에 구현해 본 작품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여기에 하나 더하자면, 앞서 말한 장애의 가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너무도 허약하게 태어난 이브가 없었다면, 이 공동체의 누구도 개인의 인지 공간을 만들어서 이것을 들고 공동체 외부로 나갈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탐구를 촉발한 것은 장애다.
이브는 그 제약 조건 때문에 인지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받지 못하지만, 그 금지의 조건 때문에 다른 곳으로 자신의 눈을 돌릴 수 있다. 이브는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저 밖의 별은 어떤지 알고자 한다. 이런 질문은 우리, 인간의 지적 탐구가 출발했던 지점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브의 허약한 신체는 그동안 암묵적으로 부정되어 왔던 근본 질문을 향한 문을 연다. 이브는 덧없이 죽은 것이 아니다. 그의 생각이 남아 제나를 통해 실현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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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연립(聯立)하는 영웅이 되다
김초엽과 김원영이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와 기술의 만남을 장애 당사자의 관점에서 살핀다. 그 접점이 인간과 기술이 뒤섞인 사이보그이기에 둘은 자신을 사이보그로 여기며, 자신이 접한 기술을, 그리고 그 기술의 변화를 통한 인간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여정 중간에서, 김원영은 청테이프의 역할을 곰곰 생각해 본다.
덕트 테이프. 제2차 세계대전 중 베스타 스타우트라는 여성이 개발한 이 물건은 손쉽게 틈을 막아 안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려는 용도로 탄생했다. 하지만 쓰기 쉽고(섬유를 따라 뜯으면 쉽게 찢어진다) 어디에나 잘 붙으며(게다가 방수다) 튼튼한(처음에는 고무와 실, 이후 폴리프로필렌과 나일론 섬유로 만들어지고 있는 이 테이프는 붙은 다음에는 상당한 내구성을 자랑한다) 이 테이프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덕트 테이프는 우주선을 임시 수리하는 데 사용되어, 아폴로 13호와 17호가 덕트 테이프 덕에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이 덕인지, 최근 방영한 드라마 ‘시지프스’에서 주인공도 덕트 테이프로 비행기에 난 구멍을 막아 승객들을 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전쟁에서도 헬리콥터 등을 긴급 수리하는 데 사용되었고, 치료 물자가 없을 때 붕대 대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영화 ‘마션’에서 식물학자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 분)의 화성 생활을 지탱하는 것도 덕트 테이프다.
우리는 덕트 테이프의 친척 격인 청테이프를 일상에서 자주 활용한다. 붙이고 막고 잇는 데 청테이프만큼 자주 쓰이는 물건이 또 있을까. 물론, 청테이프가 완벽하진 않다. 하지만 우리 삶이 그렇게 완벽을 요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김원영은 이런 청테이프의 역할에 장애인의 삶을 비긴다. 이름하여 ‘장애의 청테이프 존재론’이다.
김초엽·김원영의 ‘사이보그가 되다’. 당사자 두 사람의 관점은 책에서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서도 섞이는데, 그것 자체로 연립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듯하다. 출처: 알라딘
그는 친구에게 다른 친구가 차량을 양도한 경험을 사례로 든다. 현재 학업 중인, 휠체어를 이용하고 청각장애와 여러 만성질환이 있는 한 친구가 차량을 필요로 하자, 건축사이자 청각장애가 있는 다른 친구가 그에게 저렴하게 쓰던 차량을 넘기려 한다. 이 양도 과정에 여러 사람이 개입한다. 일단 김원영 변호사는 차량을 인수하는 사람의 친구이자 휠체어 사용자로서, 그가 오토박스(차량에 휠체어를 자동으로 싣는 장치)가 필요함을 알고 도우려 한다. 그들은 함께 소아마비를 지닌 정비사를 만나는데, 정비사는 본인의 상황 때문에 오토박스나 지체장애인용 차량에 관해 잘 안다. 차량을 정비사에게 가져온 것은 차량 인계자의 아버지다. 그는 자녀가 건축사 시험을 보는 과정을 뒷바라지하면서, 그 삶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각자 역할을 맡아 기술을 중개한다.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없으면 자동차의 양도 과정이 수월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김원영은 이들의 모습에서 청테이프를 떠올린다. 그 자신 완벽하진 않으나 어디에나 붙어 서로 연결하는 존재. 이들은 장애를 극복하지 않았으나(그러므로 휴머니즘의 영웅은 아니다) 그럼에도 김원영은 이들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연결을 지탱하고 견딘다는 점”이 그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자존하며 자립하는 이를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그린다.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존재가 진정한 성인이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스티브 잡스의 혁신이 나온 원천을 그의 개별성에서 찾는 것까지. 우리는 홀로 모든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근대적 영웅으로서의 역할을 부여한다.
장애는 (김원영의 표현을 빌려) 청테이프적 영웅을 그에 맞세운다. 이들은 자립해 있을 때보다, 서로 연결되었을 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 연결을 견딤으로써, 그들은 공동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윤리적인데, 우리가 점차 잃어버리고 있는 연결과 연합을 우리에게 당위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자립하는 영웅이라는 20세기의 이상이 가져왔던 많은 고통과 슬픔을, 연립하는 영웅이 치료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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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믿는다. 우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그러나 그 발전의 방향은 다수에 속한 내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침묵 당했던 목소리들—여성의, 장애인의, 다른 인종과 민족의, 환자의 목소리가 대표적일 것이다—을 듣는 귀가 있어야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장애는 치료해야 하고 극복해야 할 조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장애를 바라보아야 하는 단일의 시각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커지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지금을,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 그리고, 이토록 명확히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는 장애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으라.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