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파 피그’의 새 등장인물 맨디 마우스. 출처: 유튜브
이젠 슬슬 고전의 반열에 올라가야 할 것 같은 드림웍스의 만화영화 ‘슈렉’은 디즈니가 내세우던 왕자 대신 주인공으로 녹색 피부의 괴물을 등장시켰다. 명랑한 기존 디즈니 만화영화를 한번 꼬아서 제시한 ‘슈렉’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왕자는 금발의 흰 피부라는 공식을 깨면서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을 넘어서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아직도 내 딸을 포함한 많은 어린이가 주제가를 기억하는 ‘겨울왕국’은 디즈니의 전통을 패러디하던 드림웍스에 대한 디즈니의 반격이었다. 주인공 엘사는 얼음을 조종하는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 힘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해 동생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린다. 이런 엘사의 모습은 통제할 수 없는 내적 힘을 지닌 누군가가, 더 나아가 세상이 배척하는 특징을 지닌 어떤 사람이 성장의 계기를(물론, 이 계기는 사랑이다) 통해 주변과 사회에 이득을 가져올 수 있음을 웅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화는(드림웍스나 디즈니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동화니까 여기에 같이 포함하자) 아이들에게 세상의 모습을 비교적 단순한 형태로 바꾸어 보여주며, 그 안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전달한다. 오랫동안 디즈니 만화영화가 보여준 세상은 주인공이 역경을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곳이었다. 주인공의 처지와 성격은 작품마다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젊고 아름다웠다(더하여 몇 작품을 제외하면 모두 백인이었다).
21세기가 되어서야 주인공은 녹색 괴물이 되기도 하고, 마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구제 불능의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주인공이 되지 못한 인물이 있다. 휠체어를 탄 공주, 농인 왕자는 여전히 동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못한다.
사실, 이야기의 구조적 측면으로 볼 때 이건 신기한 일이다. 동화는(사실 우리가 읽고 보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지닌다. 주인공이 있고, 악당이 그에게 시련을 제시한다. 주인공은 원래 지니고 있던 고귀한 품성(즉, 인물의 덕)으로 시련을 극복한다. 악당은 처벌을 받고 모두가 행복을 누린다. 이런 구조에선 주인공의 시련이 클수록, 모든 것이 해결된 다음에 독자나 관객이 느끼는 쾌감이 더 커지기 마련이다. 주인공이 장애인이라면 그가 극복해야 하는 시련은 훨씬 클 것이고, 그만큼 결말에서 이야기의 기쁨도 커질 것이다.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런데도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은 것은 제작자의 실수라는 말이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주인공만 장애인으로 바뀐 동화를 보는 아이들은 어색해하거나, 심한 경우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모든 작품에서 장애는 악당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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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에서 장애인은 왜 지워지는가
어맨다 레덕의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는 인상적인 인용구로 시작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신체장애인이자 시각장애인인 남자가 테베를 두고 싸우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애학자인 토빈 시버스의 글에 나오는 이 말은 이름도 유명한 ‘오이디푸스’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오이디푸스는 어릴 때 발뒤꿈치를 꿰여 ‘부은 발’(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이 지닌 의미다)이라는 이름을 얻은 신체장애인이며, 자신이 알지도 못한 채 지은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의 죄 앞에서 자기 눈을 찌른 시각장애인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장애는 비극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레덕의 책에 명확한 답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가 제시하는 여러 논의를 종합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싶다. 우리의 문화적 상징체계에서 장애가 부정성을 의미하지 않는 방법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장애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야기가 우리에겐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맨다 레덕의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 표지. 출처: 알라딘
이 말을 설명하려면 책의 탐구를 조금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레덕은 뇌성마비로 걸음이 불편한 작가로, 책에서 장애와 동화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다. 서양 동화의 역사를 따지면서 그 안에서 장애가 나타나는 방식을 살펴보고, 디즈니의 명작 만화영화나 최근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며, 장애와 이야기에 관한 이론적 작업도 훑는다. 이를테면 그림동화 중 하나인 ‘고슴도치 한스’(고슴도치의 모습을 하고 태어난 한스가 여행을 떠나 결국 공주와 결혼하고, 고슴도치의 외피도 벗어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를 살피다가 장애를 다루는 여러 관점을 생각해보고, 이어 에세이스트 수전 손택이 명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언급한, 질병과 장애에 부여된 도덕적 의미를 참조하는 식이다. 상당히 폭이 넓은 레덕의 지적 모험을 연결하고 있는 것은 작가 본인의 치료와 삶에서 나온 경험이다.
그가 동화를 살펴보는 이유는 동화가 우리 삶의 기본적인 모습들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읽고 치우는 동화가 대수랴 싶지만, 우리가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 도덕 관념의 형성, 선악의 이해 등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은 동화이다. 앞에서도 잠깐 살폈지만, 아이들은 동화를 통해 세상의 질서를 내다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후 살아가면서 많은 변화가 오겠지만, 삶에 기본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동화이고 이야기이다. 그리고 레덕이 꼬집는 것은 그 질서에 장애인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화에서 지팡이를 짚는 것은 공주를 위기에 빠트릴 마녀다. ‘백설공주’에서 일곱 난쟁이는 악역은 아니지만, 그들은 백설공주에게 잠깐 휴식처를 제공할 뿐 이야기에서 금방 사라져버린다. 최근 작품에서도 별다른 점은 없다. ‘라이온 킹’에서 아빠 무파사를 죽이고 주인공 심바를 쫓아내는 비열한 삼촌은 ‘스카’라고 불리는데, 왼눈에 있는 흉터 때문이다. 그나마 ‘파리의 노트르담’ 주인공 콰지모도가 있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다른 동화처럼 사랑의 성취가 아니라 우정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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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서사와 대항서사
물론, 사회에서 흔히 장애인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작품에도 장애인이 등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화가 장애인을 그리는 방식은 장애인을 투명하게 만들고, 장애를 악덕으로 여기게 한다. 무슨 말이냐면, 장애인 없는 세상을, 장애가 있는 자는 나쁜 인간이라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이야기다. 이야기를 연구하는 분야인 서사학에서 말하는 대항서사,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지배적인 이야기 구조와는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에서 장애를 그리는 지배적인 이야기는 의학의 이야기 또는 자선의 이야기다. 장애인은 빨리 치료를 받아서 나아야 하는 존재이거나(치료법이 없는 장애면 안타깝지만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존재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모은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마지막에 왕이 된 것은 어릴 때 낙마 사고로 다리를 쓰지 못하는 브랜이다. 그는 여러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고, (아마 영화나 드라마에선 최초로) 휠체어를 탄 왕이 된다. 출처: 아이엠디비
이런 말은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 지배적인 이야기의 위력을 경험하고 계신 것이다. 장애란 신체나 정신의 문제 자체보다는, 그 문제로 인하여 개인이 어떤 일을 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신체의 문제가 있어도 어떤 일을 하는 데 크게 방해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장애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컨대, 맛을 느끼지 못하는 미각상실증이 있는 경우 이를 굳이 장애라고 부르지 않지만, 그가 이로 인하여 음식 섭취에 큰 문제를 겪는 경우, 더 나아가 쉐프나 소믈리에에게 갑자기 미각상실증이 발생하면 그것은 미각장애다.
신체의 문제가 일상의 여러 가지를 제약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장비나 기계의 도움을 받으면 다른 방식으로 해나갈 수 있는 데다가, 신체의 문제가 일의 불능으로 이어지는 것은 사회의 구조 탓인 경우가 많다. 흔히 다리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무용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용수 오마에 고이치의 경우(본 연재 36회, “반응하고 변화하는 몸…’아픈’ 몸은 ‘비정상’ 아닌 ‘다른’ 몸” 참조)나 극단 타이헨의 연출가, 배우 김만리처럼 오히려 비장애인이 할 수 없는 무대를 선보이는 장애인 예술가들이 있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무용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장애인가 아니면 사회인가. 그들이 무대로 오르는 것을 막는 것은 장애가 아닌 사회의 구조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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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동화를 쓰는 일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까? 말미에서 책은 말한다.
이것이 나의 몸이다. 목발을 짚고 있는 아이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이 아이의 진정한 목표는 보행 보조 기구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있는 몸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것을 목표로 삼는 경우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장애를 포함한 모든 삶의 경험이 지닌 가치를 인정하는 이야기, 삶을 그 자체로 수용하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 나는 비장애인 치과의사이자 이야기를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그런 작업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길 원한다. 환자와 의료인의 이야기를 공부하며 나는 읽고 듣고 쓰는 것이 상호적인 작업이며 이야기는 화자와 청자의 공동 창조물임을 배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거나 비난하는 이야기가 아닌 함께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서로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서로의 삶을 함께 축복하고 격려하기 위해.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