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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과학

질병의 공포 앞에서 운명을 빚는 인간

등록 2021-06-01 08:59수정 2021-06-01 09:25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48)
철학자와 의료인류학자, 함께 유방암을 마주하다
프란츠 폰 슈투크. ‘시시포스’ (1920).
프란츠 폰 슈투크. ‘시시포스’ (1920).

한 철학자가 있다. 그는 우연을 주제로 오랫동안 연구해 왔으며, 대학을 중심으로 자신의 활동 범위를 유지해 왔지만 연애와 사랑에 관한 책을 쓰고 엮기도 했다. 그는 십여 년 전에 유방암에 걸렸고, 여러 번 치료를 받았으나 최근 의사로부터 몇 달 남지 않았으니 호스피스를 미리 알아보는 게 좋겠다는 설명을 들은 상태다.

한 의료인류학자가 있다. 운동을 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인류학의 세계에 이끌렸고, 이후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대학에 적을 두고 몸, 질환, 음식 등을 둘러싼 문화를 탐구해 왔다. 참, 두 사람은 거의 동년배다. 시민 대상 강연을 기획하는 우연한 기회에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고, 강연 기획 때문에 의료인류학자는 철학자의 투병 사실을 알게 된다. 평소라면, 그런 이야기를 들을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철학자는 생각한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우리 함께 편지를 주고받지 않을래요. 의료인류학자는 철학자에게 질병의 우연과 필연을 묻고, 철학자는 의료인류학자에게 의료 문화에 관한 조언을 얻는다. 그렇게 편지 왕래가 오가길 십여 차례(또는, 주고받는 것을 각각 세면 이십여 회), 철학자의 상태는 악화되어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편지가 책으로 묶여 나오는 것을 보며 세상을 떠난다. 서간집, 미야노 마키코와 이소노 마호의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이야기다.

한 의료윤리학자가 있다. 당연히 환자를 보는 일을 하리라 믿었던 그도 우연한 일로 의료인문학과 의료윤리학을 공부하는 길에 빠져들었다. 한편, 그는 또한 한 사람의 의료인으로서 오랫동안 확률에 관해 고민해 왔다. 통계학이 의학의 언어가 된 지도 오래, 아직 통계학이 도입되던 시절에 의학을 공부했던 선배들과 달리 그는 통계학이 제시하는 것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의학적 사건은 확률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은 참이다. 단지, 우리가 그 확률을 모를 뿐이다. 문제는,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질병 경험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는 데에 있다.

예컨대, 그는 자기 몸이 왜 아픈가를 자문해 본다. 그는 오랫동안 어깨가 아팠고, 심할 때는 차라리 어깨를 잘라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정형외과에서는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근골격계 질환이라고 설명을 들었고, 그 설명이 맞다고 그도 생각한다. 하지만, 주변에 아프지 않고 잘 진료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상념에 잠길 때가 있다. 유전적 특징, 자세, 습관, 성격 등이 모두 영향을 미쳐 그에게 통증이라는 결과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그인가? 그가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던가. 그렇다면, 그것을 운명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내 성격이나 습관 때문이었든, 피할 수 없는 일이었든지 간에, 그 모두는 운명이 아닌가.

미야노 마키코와 이소노 마호의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출처: 알라딘
미야노 마키코와 이소노 마호의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출처: 알라딘

유방암을 마주하여 우연과 필연, 문화와 사회를 고심한 두 사람의 책을 읽는 한 사람은 이 이야기를 설명해보기로 한다. 여러 이야기가 섞여 있지만, 결국 책이 다룬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통계학이 설명하는 것은 경향성이다. 우리에게 발생한 질환 경험은 운명이다. 확률이란 세계가 움직이는 경향성이다. 세계는 어느 방향으로인가 가고 있다. 그 안에 우리는 휘말려 있다. 운명이란 그런 경향성 속에서 내가 결정한 것들의 총합이다. 우리는 수많은 경향성 사이에서 우리의 운명을 만들어 간다.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우리가 내린 결정으로 인하여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고, 우리는 그 운명을 때로는 수용하고 때로는 거스른다.

확률과 운명이 이런 거라고? 하는 생각이 드실 것 같다. 심지어, 이 글을 읽기 전에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책을 보신 분도 책이 그런 이야기였어? 하는 생각이 드실 수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의 편지글을 좀 더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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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환이라는 가능성의 공포 앞에 서다

두 사람의 서신 왕래는 철학자가 의사에게 들은,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 모른다”는 말에 관한 생각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말을 듣고 의료인류학자는 생각한다. 아니, 그 말은 곧 죽을 것이라는 말을 그저 둘러서 말한 것뿐 아닌가? “어느 역학자가 만든 수식에 대입하여 계산한 ‘일어날지도 모를’ 확률은 한 개인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서 미래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립니다.”(21쪽) 의료인류학자의 해석을 들은 철학자는 대답한다. “환자는 ‘이 앞에 기다리는 미래가 이러하니, 이 길로 나아가겠다’ 하며 운명론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43쪽) 무슨 의미냐 하면, 우리는 병원에서 확률을 듣지만, 그에 따라 환자는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은 확률을 내놓고, 인간은 삶을 결정한다.

두 사람이 살핀 것처럼, 질환은 가능성이다. 교통사고로 다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질환은 확률로 존재한다. 아니 심지어 교통사고가 나도 다칠 확률도 100%가 아니다. 어떻게 다칠지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확률, 즉 여러 번 해봤더니 그동안 결과가 이렇게 나왔더라 하는 자료 정리(와 여기에 엄밀성을 부여하는 수학적 계산)에 바탕을 두고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당장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삶을 어렵게 만드는 코로나19도, 이를 피하고자 맞는 백신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 걸렸을 때 상태가 위중해질 가능성이 있다. 백신을 맞았을 때 코로나19를 막을 가능성이 있다. 그 어느 하나도, 확실하게 이거다, 라는 답을 내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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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에서 운명의 세계로

그 안에서 인간은 분투하며, 어떻게든 더 나은 선택을 내리기 위해 고심한다. 그렇게 내린 선택이 쌓여 인생이, 역사가 된다. 한편, 우리는 그런 불확정적인 확률, 삶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파괴적인 힘에 이름을 붙여 그 무시무시함을 감추고자 한다.

의료인류학자가 다섯번째 편지에서 설명하는 ‘요술’이 좋은 예다. 아프리카의 아잔데 족은 불운을 요술 탓으로 돌린다. “나무 그루터기에 발이 걸려 다쳐도, 항아리가 깨져도, 농사가 흉작이어도, 아이가 열이 올라도 전부 요술 때문입니다.”(114쪽) 하지만, 모든 나쁜 일을 요술이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노력 바깥에서 벌어지는 불운에만 요술이 적용된다. “게으름, 부주의, 비윤리적 행위 등으로 인한 불운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 불운은 요술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115쪽) 즉, 불운이란 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벌어지는 나쁜 일이다.

여기에 철학자는 대답한다. “불운이라는 부조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인생을 고정한 순간 불행이라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129쪽) 그는 자신이 암에 걸린 불운(아잔데 족은 요술이라고 말하리라)에 분노하여 어떻게든 인생을 되찾으려 애쓰다가 그저 환자로서 죽어가게 되는 길을 택하는 대신, 그 환자라는 이름표를 거부하며 살아가고 있노라고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불운 앞에서 절망하고 순응하는 대신, 그에 화내고 질문할 수 있는 삶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그런 불운에, 요술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 예술 작품에는 해골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해골은 감상자에게 삶의 무상함과 죽음의 확실성을 깨닫게 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홀바인은 그림 아래에 해골을 그리되, 그것을 왜곡된 형태로 그려 극단적으로 그림 앞에 섰을 때만 보이도록 해 놓았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나는 홀바인이 죽음을 잊지 않으면서도 그에 저항하기 위해 이렇게 그린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죽음을 찌그러뜨리다니!
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 예술 작품에는 해골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해골은 감상자에게 삶의 무상함과 죽음의 확실성을 깨닫게 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홀바인은 그림 아래에 해골을 그리되, 그것을 왜곡된 형태로 그려 극단적으로 그림 앞에 섰을 때만 보이도록 해 놓았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나는 홀바인이 죽음을 잊지 않으면서도 그에 저항하기 위해 이렇게 그린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죽음을 찌그러뜨리다니!

이 지점을 축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반전한다. 이전까지 질환의 확률과 불확실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병이 생기지 않았으면 어땠을까’를 묻던 두 사람은, 이제 지금 앞에 있는 질환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병에 걸렸음에도 어떻게 나는 여전히 내가 될 수 있는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저는 생각하고 글을 씁니다. … 글에서 꿈틀대는 생에 대한 집착,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려 하는 힘의 시초이며 우연성을 살아내는 행위라는 걸 병을 앓으며 저는 깨달았습니다.”(201쪽)

두 사람의 편지 여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을, 확률을 운명으로 바꾸는 곳에 도착한다. 물론, 병에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둘이 만나지 않았을 수도,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을 수도, 그리하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만났고 서로 편지를 교환했으며 한 사람이 곧 떠난다 할지라도 책이 기억으로,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수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부 반전되어 일어났다는 말, 저는 무척 기뻤습니다.”(261쪽)

그렇게, 두 사람은 불확실성, 우연의 세계를 벗어나 운명의 세계로 들어간다. 두 사람이 엮어낸 운명은 이것이다. 두 사람의 편지는 엮여 책으로 남을 것이다. 그 책은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전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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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 앞에서 서로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죽음을, 질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 책을 덮은 의료윤리학자는 생각한다. 두 사람이 보여준 것처럼, 불확실성을 운명으로 만드는 것이 인간이며 인간의 일이다.

우리는 질환의 무시무시함을, 죽음의 불안을 우리 것으로 껴안아 세상을 만드는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비록 그것이 같은 자리로 돌을 굴려 올리는 것과 같을지라도, 그 일은 절대 헛되지 않다. 적어도 누군가가 그 삶을 보았고, 보며,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질환과 죽음 앞에서 함께 살아간다. 질환의 불확실성 앞, 서로의 삶과 죽음에 관한 증인이 되기 위하여.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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