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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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19일 한겨레신문 14면 ‘김훈의 거리의 칼럼’
김훈 기자
중국 여객기 추락사고의 유가족 500여 명이 모여 있는 김해시청 별관 5층 식당에는 17일부터 정치인들의 위로방문이 줄을 이었다. 이회창, 노무현, 이부영, 이상희 후보 등 여야 경선주자들과 지역출신 의원, 인접 광역단체장들이 잇따라 다녀갔다. 모두들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시청복도에서 서로 마주치며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유족들은 평소에 삶의 유대나 안면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졸지에 참변을 당한 민간인이라는 동질성만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치인들에 대한 유족들의 반응은 더욱 진솔한 것일 수 있었다.
정치인들이 어깨를 싸안아 주면 유족들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팔에 안겨 울었다. 그러나 마이크를 쥔 정치인들의 말이 끝나면 유족들은 "사진 찍으러 왔느냐?", "뭘 좀 알고 얘기해라", "당신들의 말은 다 거짓말이다. 필요 없다. 가라"며 격렬히 항의했다. 그러면서도 유족들은 한결같이 "제발 힘없는 우리들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이부영 후보의 말이 끝났을 때, 경남 함안에서 왔다는 늙은 농부는 "왜 우리는 정당만 있고, 나라는 없느냐? 우리가 조국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며 울었다. 유족들은 18일부터 제가끔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러 병원을 뒤지고 있다. 그들은 나라를 믿기 어려운 국민들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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