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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16일 한겨레신문 18면 ‘김훈의 거리의 칼럼’
김훈 기자
남의 신용카드를 훔쳐서 쓰다가 경찰서에 끌려오는 젊은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카드빚에 몰려서, 빚으로 빚을 갚으며 생애를 망쳐가는 사람들도 많다. 대체로 카드 사범들은 죄의식이 별로 없거나, 소유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카드는 실물이 아니라 기호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의 돈을 훔치면 절도지만, 남의 카드를 훔쳐서 쓰면 죄목은 복잡해진다. 카드를 훔친 행위는 절도이고, 훔친 카드로 물건을 구입하거나 현금을 인출하면 여신전문금융업법 위반이고, 점포 종업원 앞에서 타인 명의의 전표에 서명하면 사기에 해당한다.
법은 카드거래질서에 대해 촘촘한 그물망을 쳐놓고 있다. 카드와 실물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 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아득한 거리는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남의 카드를 훔치는 행위는 남의 기호를 빌려 쓰는 정도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대도시의 교통신호등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명멸하는 기호다. 카드는 욕망과 구매력 사이에서 인간을 유혹하는 또 다른 기호다. 시장의 거래질서가 세련될수록, 기호와 실물 사이에서, 욕망과 구매력 사이에서 블랙홀은 점점 더 커진다. 삶의 현실성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사람들이 줄줄이 그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
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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