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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5월 30일 한겨레신문 18면 ‘김훈의 거리의 칼럼’
김훈 기자
월드컵 열기 속에서, 축구공은 문명의 아이콘으로 추앙받고 있다. 축구공 속에는 평화와 인류애 같은, 문명의 온갖 아름다운 가치와 적성이 내장되어 있다는 믿음이 경기장을 흔드는 감격의 도덕적 바탕이다. 축구는 단순한 공차기가 아니라 문명의 위상을 누린다.
이 '거룩한' 축구공은 아시아 저개발국가 어린이들의 수탈노동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축구공은 오각형의 가죽조각을 손으로 꿰매서 만든다. 아디다스 등 스포츠용품업계의 초국적기업들은 파키스탄, 인도, 스리랑카 같은 아시아 저임금지대를 옮겨가며 생산공장을 차리고 값싼 어린이노동을 고용했다.
'월드컵 후원 초국적기업 반대 공동행동'은 축구공을 꿰매는 어린이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방한한 국제시민단체의 연대조직이다. 축구공을 꿰매다가 눈이 먼 인도 소녀 소니아(15)도 따라왔다. '공동행동'은 세계 최대의 축구공 생산지인 파키스탄에서 1만5천여 명의 어린이들이 한 개에 120~200원을 받고 축구공을 꿰매고 있다고 밝히고, 이에 대한 세계축구연맹(피파)의 답변을 요구했다. 초국적기업들의 후원금은 텔레비전 중계료와 함께 피파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다. 월드컵의 함성에 묻혀서, 축구공 속에 들어있는 세계의 온전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월드컵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고 멀다.
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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