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2002년 6월 2일 한겨레신문 15면 ‘김훈의 거리의 칼럼’
김훈 기자
세네갈 축구가 프랑스를 이겼다고 해서 온 세계가 탄성을 지르며 경악하고 있다. 이 세기적 경악은 예상된 승부를 뒤엎은 결과에 대한 놀라움이기도 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생명의 힘에 대한 찬탄일 것이다.
세네갈은 국제축구연맹 순위 42위로 월드컵 본선 진출은 이번이 처음이다. 프랑스의 '예술축구'는 랭킹 1위로 오랫동안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입증해 왔다. 옛 식민지와 종주국의 한판이라는 구도도 사람들을 조바심치게 했다.
인간의 몸과 인간의 생명이 나서는 자리에서, 모든 영광은 지나간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생명이 나서는 자리에서는 늘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국면이 열린다. 초강대국의 군대가 가난한 나라의 천막촌을 폭격하듯이 압도적인 군사력과 자본력과 과학기술의 힘을 동원한 싸움이라면, 그 승부는 인간을 감격시키지 못한다. 살아 있는 인간의 몸과 생명은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열어젖힌다. 폭발하는 저 42위의 힘에 갇혀서 프랑스의 '예술축구'는 미드필드에서 '예술적으로' 맴돌았을 뿐이다. 개막전이 열리던 서울 상암경기장은 전투기와 미사일의 엄호를 받았다. 늘 그랬듯이, 세계는 아직도 견딜 수 없이 불완전하다. 그 불완전한 세계의 한 경기장에서 토속춤으로 골 세리머니를 치르는 검은 선수들은 인간의 편으로 보였다.
김훈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