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기관총 연발 사격)를 현장에서 목격한 5·18민주유공자 이광영(64)씨.이광영씨 제공
“아스팔트에 불꽃이 일었어요.”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기관총 연발 사격)를 현장에서 목격한 5·18민주유공자 이광영(64)씨는 지난 2일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5월21일 세차례나 헬기에서 무차별 난사를 했다”고 말했다. 5·18 때 헬기기총 소사 공격을 받고 이 사격의 피해자를 발견해 병원으로 후송한 이씨는 헬기사격으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김인환(58)씨와 함께 헬기사격의 진상을 밝혀줄 중요한 증언자다.
그는 “헬기 사격을 당한 것은 오후 1시30분부터 2시30분 사이였다”고 말했다. 당시 오후 1시 광주 금남로에선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시민 수십명이 희생됐다. 헬기 기총소사 지점은 “광주시 남구 월산동 로터리에서 백운동 쪽으로 100m 쯤 가는 곳”이었다. 그는 양동시장에서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플래카드를 쓰고 제작해 지나가는 차량들에게 나눠준 뒤 3~4명과 군용 지프차를 잡아타고 시내를 돌던 중이었다. “우리가 탔던 지프차를 중심으로 총알을 연발로 놓고 쏘니까 ‘다다다다’하고 소리가 계속 났어요.” 이씨가 가 탄 지프차는 플라타너스 가로수 밑으로 숨었다.
하지만 상공의 헬기는 이후 두차례나 ‘유턴’해 이씨가 탄 지프차를 향해 사격을 이어갔다. “광주실내체육관 쪽에서 헬기가 넘어오면서 로터리 쪽에서 지나가면서 총을 쐈어요. 우리가 피신하니까 다시 회전해가지고 로터리 쪽으로 가면서 또 쐈고요.” 이 때문에 그는 당시 헬기의 연발 사격이 단순한 위협용이 아니라 “저격하기 위한 난사”라고 생각한다. 그는 “상공에서 군용 지프차를 탄 젊은 사람들을 적극적인 선동자로 봤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씨 등은 지프차에서 내려 인도로 가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헬기가 지나간 도로엔 부상자가 쓰러져 있었다. “헬기가 총을 난사를 하고 갔는데 지나가고 도로에 와서 보니까 한 사람이 쓰러져 피가 낭자했어요.” 이씨 등 대원 2명이 이 부상자를 부축해 50m 정도 떨어진 가게로 가 응급치료를 했다. 헬기 사격을 받은 부상자는 “팔·어깨·목 쪽을 맞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상태”였다. 이씨 등은 이 부상자를 지프차에 싣고 광주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후송했다. 부상자들이 서로 아우성치고 있는 응급실엔 의사가 2~3명밖에 안보였다. 이씨는 “남자 의사에게 ‘빨리 치료 좀 해달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더라”며 “그 의사가 ‘의약품도 피도 다 떨어졌다. 피나 의약품을 좀 조달해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80년 헌혈 권유를 하러 적십자 차량을 타고 다녔던 이광영(64)씨는 총상 부상자를 후송하려다가 척추에 총을 맞고 반신불수가 됐다. 지금도 그는 총상 후유증으로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광영씨 제공
이 때부터 이씨는 시민 4명과 함께 적십자사 차량에 태극기를 걸고 헌혈을 권유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저녁 7시께 적십자병원으로 가던 중 적십자 기를 본 시민들이 도움을 청했다. 누군가 골목 안에 총을 맞고 쓰러져 있는데, 공수부대 군인들의 총격 때문에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적십자 차가 가면 총을 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진입해 15명 이상의 시민들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2개조로 나눠 부상자를 싣는 순간, 척추에 총알이 꽂혔다. 이씨는 “풍선 터지는 듯한 멍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두차례나 큰 수술을 받았던 이씨는 하반신을 쓸 수 없고 지금도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일각에선 5월21일 숨진 박금희(16살·춘태여상 3)양을 헬기 기총소사 피해자로 오해하기도 한다. 이씨가 박양을 당시 기독교병원으로 차를 태워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이씨가 후송했던 헬기 사격 피해자는 아니다. “안타까운 기억이 있어요. 적십자 차 이동 중에 어떤 여학생이 ‘헌혈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공원쪽 (헌혈센터)으로 가라’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랬더니 ‘병원으로 가면 안되겠느냐?’고 해요. 그래서 가는 길에 기독병원으로 데려다 줬어요.” 이씨는 기독병원에 들렀더니 ‘헌혈하고 돌아가는 중에 여학생이 총을 맞고 사망했다’고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이씨는 “헬기 사격과 박금희양을 전혀 연관을 못 지었고, (박금희양 일은) 그 다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80년 초부터 헬기 기총소사 목격담을 증언했지만, 처음엔 주변에서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지난 1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 총탄자국을 헬기 사격에 의한 것이라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까지 그는 고 조비오 신부와 함께 ‘외로운 증언자’였다. 이씨는 95년 전두환 등의 내란목적살인죄 검찰 수사에 참고인으로 나가 헬기기총 소사 피해자를 여학생으로 진술했다. “검사가 ‘여학생이 맞냐’고 몇번 강조해 묻더라구요. 맞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적십자병원 자료를 보여줘요. 나이도 나오고, 성별도 나오는 명단을 보여주면서 걸맞은 사람이 있느냐고 묻더라구요. 없더라구요.” 검찰은 결국 헬기 총격에 의한 피해자가 입원·치료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헬기사격이 없었다”며 수사를 종결했다.
하지만 그는 “(검찰 수사 이후) 구체적으로 상황을 더듬어보고, 당시 희생자가 여학생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여학생으로 ‘착각’했던 것을 ‘정신적인 충격’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헬기 기총소사 피해자를 줄기차게 17살 전후 여학생으로 이야기 해왔어요. 내가 다쳐 사경을 헤맬 때, 자동차만 봐도 불안해하는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장애)가 심했어요. 뇌에서 그 상황에 대한 정리가 되면서 어느 순간에 여학생일 것으로 자연스럽게 입력이 된 것 같아요.”
이씨는 ‘잊혀진 기억’을 어렵사리 떠올렸다. “헬기 사격 부상자를 응급조처한 후, 웃옷을 벗겼거든요. 팔 부분을 묶고, 환자를 꽉 안고, 무릎에 앉히고 피가 안나오도록 누르고 병원까지 갔어요. 여학생이었으면 브래지어도 있고 가슴이 있었으니까 웃옷도 못 벗겼을거예요. 여학생이 아닌 것이지요.” 이씨는 새로운 기억을 떠올린 뒤 ‘앞으로 증언할 기회가 생기면 이를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합병증이 도져 홀로 요양생활을 하면서 인터뷰 등을 멀리했다. 이씨는 “당시 나와 함께 지프차를 탔던 시민들의 증언이 나오면 좋겠다”며 “이번에는 꼭 헬기사격 진실이 밝혀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80년 그는 ‘진각’이라는 법명의 스님이었다. 5월19일 초파일을 맞아 광주 증심사로 가다가 금남로에서 시위에 휩쓸려 공수부대원에 붙잡혔다. 한 경찰관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한 그는 피묻은 승복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뒤 가까스로 현장을 빠져 나왔다. 척추에 총을 맞고 반신불수가 된 그가 환속하게 된 사연은 ‘소설’이다. 그는 병원에서 이모와 함께 병문안을 왔던 이모의 회사 후배 나영숙(56)씨를 운명처럼 만났다. 집안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그의 아내는 남편의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두 사람은 만화가게와 식품 납품업 등을 하며 악착같이 두 딸을 키웠다. 2006년 방광에 염증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던 그는 일부러 집을 떠나 경북 봉화의 한 폐농가에서 홀로 자연요법을 하며 병마와 싸우고 있다.
광주/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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