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중봉 서남면에서 구상나무가 고사한 모습. 녹색연합 제공
기후변화에 취약한 구상나무가 지리산에서 집단으로 말라 죽고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하지만 올해 입법예고 될 ‘멸종위기 야생생물 목록’ 개정안에는 빠져있다. 이에 환경단체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녹색연합은 지난 2020년부터 이달까지 지리산 구상나무를 모니터링한 결과를 25일 발표했다. 녹색연합은 “지리산 구상나무의 대표적인 집단 자생지인 천왕봉, 중봉, 하봉 구간과 반야봉 일대에서 집단 고사가 빠른 속도로 확산하고 있다”며 “특히 천왕봉 남사면, 중봉 북서사면, 하봉 남사면은 전체 수목의 90%가량 고사가 진행된 상태”라고 했다.
녹색연합은 구상나무 고사 비율이 70~90%에 달하는 곳은 주로 100년 전후 나이의 구상나무가 많고, 구상나무로만 이뤄진 5~10ha 크기의 지역이라고 했다. 녹색연합은 “2020년부터 급속도로 고사가 진행돼 현재 탐방로 주변에서도 죽은 구상나무가 확인될 정도”라고 설명했다. 또 “구상나무 고사 비율이 50~70%에 달하는 지역에서도 이미 고사한 개체 외에 생육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개체가 다수 관찰됐다”며 “2~3년 안에 고사 비율 70∼90%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구상나무 고사로 산사태 위험이 커진다는 지적도 나왔다. 녹색연합은 “지리산 천왕봉 남사면의 구상나무 군락은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구상나무뿐이다.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관찰이 필요하다”며 “천왕봉 구조 쉼터 주변은 집단 고사지역 한가운데로 탐방로가 지나가는데, 죽은 구상나무의 뿌리가 들떠 산사태 위험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구상나무는 대표적인 기후변화 취약종이다. 한라산에서도 대규모 피해를 겪었다. 겨울 기온이 상승하고 적설량이 부족해 나타나는 ‘수분 부족’이 구상나무가 고사하는 주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과거 지리산 고산지대는 겨울철 내린 눈이 5월 초순까지 침엽수의 영양 공급원 역할을 했지만, 2010년 이후 적설량이 줄어들며 겨울철과 봄철에 건조해졌다. 녹색연합도 기후변화를 구상나무 고사 원인으로 짚었다. 녹색연합은 “과거 지리산은 구상나무가 자라는 데 유리한 기후환경이었으나 최근 기후변화로 인한 마름병을 앓고 있는 고사 개체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멸종위기종 선정 때 기후변화 전문가 확충해야”
현재 구상나무는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돼 있지 않다. 환경부가 조사 등을 할 수 있는 ‘관찰종’으로만 지정돼 있다. 5년마다 개정돼 올해 9월초 입법예고되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목록 개정안에서도 빠졌다.
반면, 멸종위기 ‘적색목록’을 작성하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구상나무를 ‘위기’(EN)종으로 보고 있다. 위급(CR)에 이어 보전이 시급한 종이다. 세계자연보전연맹은 “기후변화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서식지의 질이 지속해서 하락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다”고 평가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멸종위기종위원회 전문가들이 현재 자료로는 구상나무 수가 뚜렷한 감소세를 보인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관찰종 정밀 조사를 통해 구상나무가 실제로 얼마나 줄고 있는지 파악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리산 반야봉 일대에 죽은 구상나무가 쓰려져 있다. 녹색연합 제공
녹색연합은 환경부가 멸종위기종을 판단할 때 기후변화의 영향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멸종위기종위원회에 기후변화와 연관해 생물다양성을 다루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며 “관련 전문 인력 부족이 멸종위기종과 생물다양성 문제를 검토할 때 기후변화의 영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멸종위기종위원회의 당연직 외 위촉 위원 23명은 모두 식물, 포유류, 조류 등 각 동·식물류 전문가다. 이들도 기후변화를 다루긴 하지만, 좀 더 전문적인 인력이 보충돼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멸종위기종을 선정할 때, 기후변화 영향을 어떻게 반영할지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평년값을 깨는 기온과 강수량, 빈발하는 폭우, 달라진 계절 주기 등이 비정형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이상기후의 발현이 공간적으로도 예측이 힘들다는 점도 한 몫 한다. 따라서, 개체수 감소와 멸종의 속도를 예측하는 게 과학자들에게 더 어려운 일이 됐다. 세계자연보전연맹이 올해 펴낸 ‘적색목록 범주 및 기준 지침서’는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는 종에 적색목록을 적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관련 추가 지침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김윤주 기자
ky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