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브라질 원주민과 활동가들이 에코사이드(환경파괴·생태학살)를 ‘국제 범죄’로 규정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브뤼셀/EPA 연합뉴스
‘공산주의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이 최고로 달할 즈음인 1848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 출간된 <공산당선언>에 나온 이 한 문장은 세계의 혁명가와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세계 녹색당 계열의 정치인과 활동가가 모인 ‘세계녹색당 총회’가 11일 폐막했다.
나흘 일정으로 진행된 총회 분위기는 내내 가볍고 활기찼다. 술루(피지)와 기모노(일본) 같은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 ‘석탄·가스 발전 중단’ 스티커를 나눠주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나는 ‘왠지 가져가야 할 거 같아’ 찬장에 처박아둔 텀블러를 모시고 갔는데, 일부 참가자들이 ‘씩’ 웃으면서 플라스틱 생수병을 들이키는 걸 보고 무장해제됐다. 일본에서는 약 20여명의 참가자가 건너왔다. 한 일본 당원은 기자인 나를 알아채고는 번역기를 이용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는 현지 여론’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개막 이틀째인 9일에는 온종일 수십 건의 주제별 회의와 토론회가 열렸다. 오후에는 유럽연합 녹색당이 주최한 ‘에코사이드: 지속가능한 세계를 위한 법적 체제’ 토론회가 있었다.
■ 에코사이드, 기후위기를 보는 새로운 창
에코사이드는 기후위기를 바라보는 새로운 창이다. 국내에선 종종 ‘생태학살’로 번역되는데, 역사적 맥락을 알지 못하면 그 뜻이 협소해질 우려가 있다.
에코사이드는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 살포를 ‘전쟁 범죄’로 포함하자는 논의부터 시작됐다. 공중 폭격과 적군 수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뿌려진 고독성 제초제인 에이전트 오렌지는 베트남 숲을 초토화했고, 동시에 여기에 터를 잡고 살던 주민들의 몸과 경제적 토대를 붕괴시켰다. ‘들소 한 마리를 죽이면, 인디언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며,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제적∙문화적 토대였던 들소를 대량 살상했던 백인 식민주의자들처럼 말이다. 이렇게 에코사이드와 제노사이드는 연결되어 있다.
에코사이드 법제화를 위해 뛰고 있는 환경단체 ‘스톱 에코사이드 인터내셔널’의 조조 메타 대표가 청중의 질의에 응답하고 있다. 오른쪽은 유럽연합 녹색당 전 대표와 브뤼셀 환경장관을 맡았던 벨기에 생태당의 에블린 하위테부르크 의원.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환경단체 ‘스톱 에코사이드 인터내셔널’의 창립자이자 영국의 환경변호사인 폴리 히긴스가 2010년 유엔 국제법위원회에 에코사이드를 범죄로 규정해야 한다고 제안서를 낸다. 정의는 이렇다. “특정 지역의 생태계에 대한 광범위한 손상, 파괴 또는 손실로 인해 해당 지역 주민의 평화로운 향유가 심각하게 감소하는 것.”
이를테면, 아마존 열대우림 파괴는 원주민의 실업과 가난, 이산(離散)으로 구체화한다. 하지만 정작 환경훼손은 기업의 이윤 추구 행위나 국가 지도자의 통치 행위로 가려지고, 이들은 법적 책임과 처벌을 면제 받는다. 에코사이드를 국제 범죄로 규정하면, 개인도 처벌할 수 있다.
2019년 남태평양 도서국인 바누아투와 몰디브는 에코사이드를 국제형사재판소(ICJ)가 다루는 국제범죄에 포함할 것을 요구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세계 공동체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범죄, 즉 대량 학살(제노사이드), 반인도적 범죄, 전쟁 범죄, 침략 범죄 등 4대 범죄를 관할한다.
폴 히긴스와 함께 ‘스톱 에코사이드 인터내셔널’를 창립한 조조 메타는 이날 토론회에서 시종일관 열정적이었다. 동료 히긴스는 2019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무거운 짐이 그에게 오롯이 남았다.
“10년 전, 내 딸이 프레킹(천연가스 시추를 위해 높은 수압으로 암반을 파쇄하는 것)을 보고는 울었습니다. 왜 땅속으로 독을 집어넣느냐고요. 어떤 이에게 그런 행위가 범죄라는 건 아주 당연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가장 단순한 해결책을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걸 범죄화하면 됩니다.”
에코사이드가 기존의 법률에 따른 환경규제와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이 나오자, 그가 대답했다.
“가장 큰 잠재력은 개인을 상대로 한다는 겁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개인을 처벌합니다. 법인이나 국가는 대응할 수 있는 자원이 있어요. 하지만 개인은 그러기 힘들죠. 개인을 처벌하면 환경 훼손 억제 수단으로서 더 큰 효과가 있습니다.”
아마존의 열대우림은 소 방목지나 작물 경작지로 사용하기 위해 개간된다. 아마존 강과 숲에 삶을 의탁하고 있는 원주민의 경제와 문화를 위협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유럽연합에서도 법제화 작업
에코사이드 법제화는 환경운동가의 허황한 꿈이 아니다. 프랑스, 우크라이나, 에콰도르, 베트남 등 10여개 국가에서 이미 법률에 포함됐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는 지난 1월 러시아 침공으로 2303건의 에코사이드가 있었다고 주장했고, 최근에도 러시아의 에코사이드를 남부 헤르손주의 노바 카호우카 댐이 폭파된 사건과 관련해 국제형사재판소에 세우겠다고 밝힌 바 있다.
유럽연합에서도 에코사이드 법제화는 속도를 내고 있다. 마리 투생 유럽연합 의회 의원은 “2021년 3월 유럽연합 의회가 에코사이드를 범죄로 규정한 보고서를 채택했다”고 소개했다.
생태당(ECOLO)이 강세를 보이는 벨기에도 마찬가지다. 이 정당 소속 벨기에 국회의원인 사무엘 코골라티는 “2020년 12월 유럽 최초로 에코사이드를 범죄화해야 한다고 지지한 나라가 벨기에”라며 “벨기에 의회에서도 최근 결의안을 채택했다”고 말했다.
일본 녹색당의 당원은 더듬거리는 영어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에코사이드에 해당하느냐’고 물었다. 제주도에서 온 당원은 강정 해군기지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브라질에서 온 당원도 발언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포르투갈어잖아!
사회를 맡은 에블린 하위테부르크가 말했다. (그는 브뤼셀 환경장관을 10년 지낸 유럽연합의 유력 녹색정치인이다.)
“포르투갈어 통역해주실 분 계세요? 아, 없군요. 그럼 일단 듣는 데까지 들어봅시다”
알 수 없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참가자들은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노력했다.
우리나라에서 토론회 취재를 가면, 대개 시민이 울분을 토한 뒤 정치인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녹색당 세계총회는 달랐다. 정치인과 활동가, 시민이 공통의 목적과 가치를 위해 머리를 맞대고 토론했다. 그것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지난 8일부터 나흘 동안 인천 연수구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세계녹색당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녹색당 제공
■ 녹색당의 가치와 사고가 필요하다
<공산당선언>으로 시작된, 자본주의를 타파하겠다는 시도는 멋들어지게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최첨단으로 진화했다. 자본주의의 먹이는 동식물과 땅과 바다, 깨끗한 공기다.
<공산당선언> 출간 175년 만에 자본주의는 ‘지구 포식자’(world-eater)가 됐다. “전 지구적 기술자본주의는 자연자원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파헤치고 갈아내고 뽑아내고 폐기”한다. (조효제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중)
지구를 염려하는 사람에게도 조국은 없다.
우리가 편안함을 느끼는 숲과 애정하는 동식물, 날이 갈수록 걱정스럽게 바라보게 되는 하늘과 구름이야말로 만국의 공통 언어이자 세계인의 보편적 감수성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녹색당의 가장 큰 자산이자 에너지다. 기후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녹색당의 가벼움과 활기참, 얽매이지 않음 그리고 에코사이드 같은 ‘혁명적 사고’가 필요한 건 아닐까?
인천/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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