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 카르텔’ 유령이 떠돈다
2005년 7월16일 자정 10Kg이 샛다…65명이 병원에 실려갔지만
인근 주민 30만명은 아침방송을 보고서여 사고를 알았다
알아서 침묵해주기는 주변 공장들도 마찬가지
1984년 12월3일 새벽, 두 개의 호수와 아름다운 사원들을 지닌 도시 외곽에 자리한 화학공장의 원료저장탱크 밸브가 파열됐다. 거기서 새나온 메틸이소시안염(MIC) 36t은 독가스로 변해 도시로 퍼져나갔다. 사고 발생 2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한 주민들은 가슴이 타는 듯한 통증에 잠에서 깨어나, 영문도 모른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정부통계로 주민 75만명 가운데 3500명이 사고 직후 목숨을 잃었고, 1만5000여명은 후유증에 시달리다 숨을 거뒀다.
2005년 7월16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푸른 바다와 붉은 동백꽃이 어우러진 풍광을 자랑하는 바닷가 산업단지의 한 화학공장에서 항생제 제조용 중간혼합물 10㎏이 유출됐다. 유출과 동시에 발생한 염화수소로 추정되는 유독가스는 공장 주변으로 번져나갔다. 사고가 난 공장과 인근 공장 노동자를 포함해 모두 65명이 가스를 마시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산업단지에서 5~6㎞ 떨어진 도시지역 주민 30만여명은 아침에 방송뉴스를 보고서야 간밤의 사고를 알았다.
세계4위 화학산업 대국인데도…
전자는 인도의 보팔, 후자는 한국의 여수에서 일어난 사고다. 피해 규모로 볼 때 두 사고는 비교할 수 조차 없다. 하지만 우리는 보팔에서와 같은 대참사는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유독물질 유출사고의 안전지대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김광일 인제대 화학방제연구센터장(보건안전공학과 교수)은 “우리나라는 에틸렌 생산규모 세계 4위의 화학산업 대국”이라며 “짧은 기간에 화학물질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난 가운데 새로운 화학물질들이 계속 개발되고 있는 반면, 관련자들의 안전의식은 낮아 사고 위험성이 상존한다”고 대답했다.
이런 사고 위험에 대비한 대응체계는 제도적으로는 어느 정도 틀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학공장들이 입주해 있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수립하는 안전관리계획에는 유독물질 유출사고에 대한 대응방안이 포함돼 있다.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은 모두 3만9000여종에 이르는 화학물질 가운데 테러대비물질 38종과 유독물 548종에 대한 자료를 모은 화학물질사고대응정보시스템을 구축해, 경찰과 군, 소방관서 등에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정부의 화학테러대응 세부시행계획도 이와 관련된 대책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여수와 울산 등 화학공장들이 밀집해 있는 전국 4개 지역에는 이런 사고를 전담하는 중대산업사고예방센터까지 설치돼 있다.
하지만 지난 16일 여수에서 이런 대응체계는 어느 하나도 가동되지 못했다. 사고 공장이 시청, 경찰서, 소방서 등 어디에도 사고 발생을 알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고 사업장의 신고에 의해서만 시동이 걸릴 수 있는 현행 대응체계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화학업체를 규율하는 현행 법들에 사고 업체의 신고 의무가 규정돼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를 강제할 장치는 유해화학물질관리법에 규정된 50만원 이하 과태료가 전부다. 그러다보니 사고가 외부로 드러날 경우의 회사 이미지 훼손을 우려해 우선 자체적으로 처리하려 하고, 그것이 대형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알리지않아도 과태료 겨우 50만원
진명호 환경부 화학물질안전과 사무관은 “내년 1월부터 과태료가 100만원으로 인상되지만 여전히 처벌로는 미흡해 신고는 계속 업체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고에 대한 조기경보를 이처럼 원인 제공자에만 의존하는 것은 정부가 이미 전국 318개 주요 사업장의 790여개 굴뚝에 대기오염물질 자동측정장치를 설치해 자료를 실시간 취합하는 시스템을 운영중인 점에 비춰 볼 때 쉬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환경단체에서는 특히 이번에 사고 공장에 인접한 다른 공장들에서도 직원들이 사고 공장에서 번진 유독가스를 맡고 병원에 실려갔는데도, 어느 공장도 사고 발생 신고를 하지 않았던 점에 주목하고 있다. 강흥순 여수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산단 입주업체들이 환경·안전사고의 축소, 은폐를 위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재영 노동부 산업안전과장은 “신고가 없으면 관계당국이 사고를 알 수 없는 경보체계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이번 사고의 교훈”이라며 “관련기관이 보완을 적극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공장 밖에서 이뤄지는 유통과정에서의 사고다. 환경부 자료를 보면 지난 1998년에 1418만t이었던 유독성 화학물질 유통량은 이후 5년 동안 꾸준히 증가해 2003년에는 2125만t으로 2000만t을 훌쩍 넘었다. 유독물 운송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운반트럭은 지금도 교통량이 많은 고속도로나 국도를 이용하며, 도시지역과 상수원으로 사용되는 하천변을 무시로 지나다니고 있다.
운송트럭 30%가 소화기조차 없어
현행법은 운송과정에서의 사고로 인한 유독성 화학물질 유출에 대비해 운송업체에 교육과 기본적 방제장비 비치 등을 의무화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얼마전 환경부 조사결과를 보면 운전자들에게 그들이 운전하는 트럭에 실린 유독물의 특성과 사고발생 때의 대응요령 등을 제대로 교육한 운송업체는 40%에 불과했다. 운반차량에 유출사고 때 응급방제를 위한 소화기, 삽 등 기본적 장비조차 갖추지 않은 업체도 30%에 가까왔다.
김광일 교수는 “선진 외국에서 유독물 운반차량은 에스코트를 받아 움직이도록 하고, 통과 지역이나 운행시간 등에 규제를 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화학물질 관련 산업의 해외 가격경쟁력이 이처럼 안전에 대한 비용부담이 적은 데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이제는 우리도 선진국 수준의 유독물 유출사고에 대한 안전장치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