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불어닥친 구제역
작은 농장을 건강하게 뛰놀던
순결이 식구들이 생매장됐다
“공장식 축산을 벗어나자”
외침은 컸지만 곧 잊혀졌다
진흙을 뒹굴고 풀을 뜯으며
평화는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또 구제역이 터진다면
작은 농장을 건강하게 뛰놀던
순결이 식구들이 생매장됐다
“공장식 축산을 벗어나자”
외침은 컸지만 곧 잊혀졌다
진흙을 뒹굴고 풀을 뜯으며
평화는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또 구제역이 터진다면
2010년 추운 겨울이었다. 경북 안동에서 시작된 죽음의 그림자는 어느새 경기도 파주의 들녘에 다가오고 있었다. 집 밖에서 김정호(55)씨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역 공무원들이었다.
“돼지들을 살처분해야겠습니다.”
“우리 돼지들은 건강한데요?”
“저기 아랫마을에서 구제역이 발생했어요. 반경 500m 안에 들기 때문에 예방적으로 살처분해야 합니다.”
김씨의 집 뒤뜰에는 돼지 60마리가 살고 있었다. 소규모 가족농으로 키워 한번도 병에 걸려 본 적이 없는 돼지들이었다. 공무원들이 몇 차례 더 들렀고, 김씨는 가족 같은 돼지들을 생으로 죽일 수 없다고 맞섰다. 돼지들마다 얼굴과 성격을 알고 그래서 ‘순결이’ ‘씩씩이’ 등 이름까지 붙인 이들을 보낼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듣고 동물보호단체 ‘카라’가 달려왔다. 카라는 공장식 축산업의 정반대에서 살고 있는 돼지들이 병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살처분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카라는 ‘순결이’라는 이름으로 국회의원들에게 편지를 썼다. 새끼를 낳는 모돈 이름이 순결이였기 때문이다.
“요즈음 매일 꿈을 꾸어요. 너무 무섭고 너무 아프고 두려워요. 하루빨리 생매장을 중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절대로 생매장을 하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어주세요.”
이 일로 순결이는 유명해졌다. 공장식 축산업이 낳은 ‘동물 재난’에 희생되는 건강한 생명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열흘째 되던 날, 김씨는 막걸리를 마시고 집에서 나갔다. 김씨의 아들이 대신 살처분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하얀 위생복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돼지들은 트럭 위로 쫓겨 몰려갔다. 동물보호단체 회원들은 ‘살처분 중단’ 펼침막을 내걸고 저항했다. 단 하루 전에 태어난 새끼 8마리도 끌려갔다. 볏짚 안에 몸을 파묻은 새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흘렀다. 지난 3일 순결이가 코를 내밀고 킁킁거렸다. 옆에는 씩씩이가 있었다. 김씨는 예전에 다른 농가에 분양한 순결이 형제의 자식들을 데려왔다. 구제역때 끌려간 돼지들을 생각하며 모돈은 순결이, 종돈은 씩씩이라고 이름 붙였다. 순결이는 지난해부터 두차례 새끼를 낳았고 최근 임신에 성공해 다시 배가 부른 상태다. 농장의 돼지는 70마리로 불어났다. 돼지들에게 이씨가 풀을 베어 던져주며 말했다.
“우리 농장은 소규모 축산이에요. 일부러 많이 안 해요. 옛날 농부들이 농사짓기 위해 필요한 거름을 얻을 정도로 하는 거죠.”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순결이는 한평생 ‘스톨’에 살았을 것이다. 관행(공장식) 축산에서 쓰이는 스톨은 너비 60㎝, 길이 20㎝의 금속 울타리다. 워낙 스톨이 작아 어미돼지는 뒤돌아설 수조차 없다. 포유기 직후 20일을 제외하곤 일년 내내 이 스톨에 산다. 인공수정, 유도분만제 투여 등의 방법도 동원된다.
반면 김씨 농장의 돼지들은 흙바닥에서 풀을 먹고 진흙 목욕장에서 데굴데굴 구른다. 종돈 씩씩이와도 맘에 내킬 때 인공수정이 아닌 자연교배를 한다. 김씨는 “순결이가 새끼를 낳을 적에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출산 과정을 돼지들끼리 알아서 하도록 놔둔다”고 말했다.
관행 축산에선 돼지들이 심한 스트레스로 서로를 공격하기 때문에 송곳니나 꼬리를 자르지만, 김씨 농장의 돼지들은 원 모습 그대로다. 그리고 주변에 흔한 잡풀과 발효 사료를 먹고 산다. 항생제와 예방주사를 맞지 않아도 건강하다. 농장을 뛰놀면서 면역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김씨의 신념은 옛날 시골에서처럼 돼지를 키우는 것이다. 모돈을 3~5마리 이상 들이지 않는 게 원칙이다.
2010년 11월 시작된 구제역 사태는 다섯달 동안 소·돼지 등 348만마리를 희생시키면서 국내 축산업계를 초토화했다. 돼지의 생매장 현장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공장식 축산과 육식 문화에 대한 성찰도 일어났다.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의 신승철 전문연구위원은 “교통 발달로 인구 이동이 잦고 가축 분뇨와 사료의 이동이 빈번해졌다”며 “전염병이 발생한 농장 인근의 500m~3㎞의 전염 매개체(가축)를 살처분하는 ‘미리 비우기’ 방식이 과연 효과가 있냐는 회의론이 제기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초 정부는 축산업 허가제 도입을 뼈대로 하는 ‘축산업선진화방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신 연구위원은 “가축을 적게 기르고 적게 먹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안전한 먹을거리 위주로, 육식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지적했다. 새로 도입된 동물복지 농장 인증제도 복잡한 인증 조건 때문에 소규모 가족농이 인증받기 힘든 조건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가축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생매장을 금지하는 조항을 법률에 넣자는 논의도 일었지만, 구제역 사태가 끝나면서 유야무야됐다. 김씨가 말했다.
“순결이와 씩씩이는 늙어서 죽을 때까지 가만히 놔둘 거예요. 과거에도 그래왔고요. 지금까지 80마리 이상의 새끼를 낳아서 우리에게 도움을 줬는데, 마지막 보낼 땐 예의가 있어야죠.”
소규모 가족농의 가축들은 면역력이 강해 전염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 김씨와 같은 농법을 쓰는 농가 50곳 중 한곳에서도 돼지들은 구제역에 걸리지 않았다. 순결이는 근본적인 대안을 품고 있다. 하지만 공장식 축산업에 포위되어 있는 한 제2, 제3의 순결이는 다시 나올 수 있다는 게 김씨 같은 소규모 가족농들의 두려움이다. 파주/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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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씨는 “농장 한켠에 식물을 재배한 뒤 돼지들을 들여보내 먹도록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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