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산불 발생 20년째인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인정리 산불 자연복원지 모습. 산불 발생 이전 전체 면적의 70~80%를 차지하던 소나무 숲이 대부분 사라지고 신갈나무를 비롯한 참나무류가 중심이 된 활엽수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김정수 선임기자
‘산불 참화’ 고성 자연복원지를 가다
봄철만 되면 전국 곳곳에서 나타나는 크고 작은 산불은 숲 속 동식물은 물론 토양에까지 회복되기 어려운 피해를 남긴다. 1996년 4월23일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의 한 군부대 사격장에서 시작된 ‘고성 산불’은 이런 산불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한테 최악의 산불로 기억된다. 사흘간 고성군 1개 읍 2개 면 16개 마을을 휩쓴 이 산불은 산림 3762㏊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피해 면적은 당시까지 공식 집계된 산불 가운데 최대였고, 4년 뒤 강원도 강릉·동해·삼척·고성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이른바 ‘동해안 산불’에 이어 역대 둘째로 기록되고 있다.
고성 산불의 광범위한 피해는 산불 피해지 복구 방법으로 통상적인 인공조림 외에 자연복원이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죽왕면 구성리와 인정리의 불탄 국유림 두 곳에 30㏊와 70㏊ 규모의 자연복원지를 설정해 자연이 스스로 회복하기를 기다리는 국립산림과학원의 실험은 그렇게 시작됐다.
산림 3762㏊ 휩쓴 최악 산불 뒤
자연회복 기다리는 실험 20년째
소나무 군락 거의 찾아볼 수 없어
자연복원이 숲 더 빨리 되돌렸지만
토양·생태계 회복까진 아직 먼 길
산불 발생 10년째인 2005년 4월 초 처음 찾았을 때 고성 산불 자연복원지는 온 산이 시뻘건 불덩이가 됐던 산불 참화의 상흔을 미처 지우지 못한 채였다. 불에 탄 나무 그루터기 옆에서 움싹으로 올라온 참나무류 교목과 진달래, 싸리류 등의 관목이 자리를 잡아가는 능선과 구릉 주변 곳곳에 숯으로 변한 나뭇가지들이 널려 있었고, 산불에 휩싸여 죽었지만 미처 쓰러지지 않은 나무들이 고사목처럼 곳곳에 서 있었다. 토심이 깊고 수분이 많은 계곡부 주변엔 불에 타버린 줄기를 에워싸고 6m 이상 자란 신갈나무와 굴참나무 등도 제법 있었지만, 황량한 느낌을 가려주진 못했다.
그때로부터 다시 10년이 흘러 산불 발생 20년째가 된 9일 다시 찾은 죽왕면 구성리 자연복원지는 밑동이 검게 그을린 채 서 있는 소나무들이 아니었다면 산불이 났던 곳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신갈나무가 우점종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싸리류와 진달래, 국수나무 등 관목 사이에 가슴높이지름이 30㎝ 가까운 소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숲의 모습은 산불 피해를 입지 않은 강원도 동해안의 여느 숲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참나무류 나무들의 새잎은 아직 연두색으로 물든 가지 끝에 숨어 있었지만, 이따금 눈에 띄는 생강나무와 낙엽을 비집고 올라온 노랑제비꽃은 곳곳에서 노란 꽃을 피워내 봄을 알리고 있었다.
고성 산불 자연복원지에서 산불 이후 20년 동안 이뤄진 가장 큰 변화는 소나무 군락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산불 이전 70~80%가 소나무숲이었던 죽왕면 인정리 자연복원지 70㏊는 신갈나무가 중심이 된 활엽수림으로 변했다. 이 지역에서 소나무는 토양층이 얕고 척박한 암석지와 능선부에만 조금씩 발견될 뿐이었다.
산불 이전 소나무숲이 30~40%를 차지했던 구성리 자연복원지 30㏊에서도 산불 이후 새로 자리잡은 소나무숲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간혹 보이는 소나무들은 모두 1996년 산불을 버텨낸, 가슴높이지름 20㎝가 넘는 큰 나무들이었다.
이들이 산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현장을 안내한 산림과학원 산림수토보전과 김정환 연구사는 “구성리 자연복원지가 산불 발생 당시 활엽수와 소나무가 혼재한 혼합림이어서 산불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 산림과학원이 몇년 전 20여년간 축적한 산불 통계 자료를 분석해보니 단일종으로 구성된 소나무숲은 다양한 나무로 이뤄진 혼합림에 비해 산불 연소 시간이 길어 산불 피해에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성 산불 이듬해 산불 잔존목을 모두 제거하고 소나무와 자작나무 등을 심은 조림지도 10년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인정리 자연복원지와 임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인공조림지의 소나무들은 평균 5~6m 이상의 높이에 가슴높이지름 8㎝ 안팎으로 튼실하게 자랐고, 2005년 평균 높이 3.6m에 불과하던 송지호 주변의 자작나무들도 10년 사이에 키가 두 배가량 훌쩍 자라 고성군이 산책로까지 조성해 놓았다. 하지만 산불 피해목에서 빠르게 성장한 참나무류 맹아림이 중심이 된 자연복원지에 비해서는 숲이 우거진 느낌은 덜했다.
정연숙 강원대 교수(생명과학과)는 “동해안 산불 피해 지역에서는 인공조림을 꼭 필요한 곳만 제한적으로 하고 자연에 맡겨 두면 훼손된 토양과 생태계 회복을 앞당길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산림과학원이 2000년에 산불이 났던 삼척 지역의 또다른 자연복원지에서 2013년 개미 서식 현황을 조사했더니, 관찰된 개미종 수가 26종으로 산불 피해가 없는 인근의 대조 지역에서 관찰된 종수(27종)와 비슷했다. 반면 인공조림지에 회복된 개미종 수는 21종에 그쳤다.
산불피해지 자연복원 연구를 총괄해온 임주훈 산림수토보전과장은 “고성 산불 자연복원지는 현재 외부에서 볼 때 거의 숲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토양을 포함한 생태계 전체가 회복되려면 아직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성/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자연회복 기다리는 실험 20년째
소나무 군락 거의 찾아볼 수 없어
자연복원이 숲 더 빨리 되돌렸지만
토양·생태계 회복까진 아직 먼 길
고성군 죽왕면 구성리 산불 자연복원지의 한 소나무 밑동에 19년 전 산불에 그을린 상흔이 남아 있다. 김정수 선임기자
고성군 죽왕면 송지호 주변 산불 피해 지역에 산불 발생 이듬해 조성한 자작나무 인공조림지. 심을 당시 어른 새끼손가락만하던 어린나무들이 가슴높이지름 8㎝ 안팎까지 자라나 제법 숲을 이루고 있다. 김정수 선임기자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인정리 산불 자연복원지의 2005년 4월초 모습. 산불이 꺼지고 10년이 지났지만 곳곳에 불탄 나무들이 그대로 서 있고, 토양이 그대로 노출된 곳이 많아 황량한 느낌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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