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오후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 동백동산 람사르습지를 찾은 탐방객들이 탐방안내소 뒤쪽 숲길을 걷고 있다. 제주/김정수 선임기자
제주 동백동산 습지 선흘1리 마을
70년대초부터 보호지역 묶여
제주 곶자왈 원형 잘 보존되고
람사르습지 등록 생태보고됐지만
개발행위 규제로 침체됐던 마을
생태관광 추진하며 활기 살아나
70년대초부터 보호지역 묶여
제주 곶자왈 원형 잘 보존되고
람사르습지 등록 생태보고됐지만
개발행위 규제로 침체됐던 마을
생태관광 추진하며 활기 살아나
“들어가겠습니다.” 지난 21일 낮 12시50분께 길 안내를 맡은 문윤숙 선흘1리 생태관광협의체 사무국장이 이끄는 대로 숲에 머리 숙여 절하고 동백동산 서쪽 숲길에 들어섰다. 제주도 중산간 지역인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에 있는 동백동산 숲 가운데 ‘먼물깍’ 습지를 포함한 절반쯤(0.59㎢)이 습지의 보전과 현명한 이용을 목적으로 하는 람사르협약에 따른 보호 습지(람사르습지)로 지정돼 있다.
숲에는 참나무과 상록수인 종가시나무와 참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등이 우점종을 이루지만 이름처럼 동백나무도 많다. 이곳 동백나무는 다른 나무와 경쟁하느라 대부분 굵기에 비해 키가 웃자라 흔히 보는 동백나무와는 다른 모습이다.
구실잣밤나무 꽃과 때죽나무 꽃이 뒤섞인 비릿한 향기와 섬휘파람새의 맑은 울음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5분쯤 걸으니 길옆에 대나무 말뚝을 박고 줄을 친 곳이 나타났다. 줄에 매달린 안내문에는 ‘이곳은 역사·문화·생태·예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므로 영원히 보존돼야 합니다. 선흘1리 마을회’라고 쓰여 있다. “시가 소나무 재선충 방제작업을 위해 중장비를 투입해 숲을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설치한 것”이라고 문 사무국장은 설명했다.
10분쯤 더 들어가자 우거진 나무에 가려졌던 하늘이 활짝 열리며 그림같은 연못이 눈앞에 펼쳐진다. 동백동산 습지의 핵심 지역인 먼물깍이다. 먼물깍은 제주말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물’이라는 의미다. 넓이 2000여㎡의 수면은 멸종위기종 식물인 순채로 뒤덮이다시피 했고, 순채 사이로 여러해살이 수생식물인 올방개가 삐죽삐죽 올라와 있었다.
먼물깍을 출발해 탐방안내소 쪽으로 가는 숲길로 들어서자 터널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길 양옆 나무들은 아직 잎이 다 자라지 않았는데도 한낮의 햇살도 쉽게 뚫지 못하는 짙은 숲그늘을 만들어냈다. 숲터널은 2㎞ 남짓 떨어진 탐방안내소까지 거의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500여년 전부터 마을을 이룬 선흘1리 사람들은 동백동산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먼물깍을 비롯한 50여개의 크고 작은 숲속 습지는 사람과 가축에게 필요한 물을 제공했다. 숲의 나무는 땔감이 됐고, 동백나무 열매에서는 기름을 얻었다. 숲 곳곳의 작은 용암동굴들은 압박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의 은신처가 됐다.
동백동산은 1971년에 제주도 문화재로 지정됐다. 일찍 보호지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제주도 중산간 어느 지역보다 곶자왈의 원형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세계에서 제주에만 자생하는 제주고사리삼, 멸종위기종이면서 천연기념물인 팔색조 등 법정보호생물만 15종이 이곳에서 살아간다.
2011년 람사르습지 등록과 생태관광 추진은 인구 600여명의 농촌 마을인 선흘1리 주민들이 동백동산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됐다. 환경부 국립습지센터 지원을 받은 제주생태관광 고제량 대표가 40년 이상 보호지역으로 묶여 있는 것을 마뜩잖아하는 주민들을 상대로 생태관광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중심이 돼 동백동산의 생태와 주변의 4·3 성터 등 역사·문화 자원을 연계한 관광 프로그램을 운영하자는 아이디어였다.
마을에서는 박현수 이장이 팔을 걷어붙였다. 주민들과 행정기관, 환경단체, 생태관광 여행사,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생태관광협의체가 꾸려졌다. 생태관광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는 ‘리민 큰마당’이라는 이름의 원탁회의에서 논의해 결정하는 틀도 갖췄다.
지난해 2월 처음 열린 뒤 지금까지 두차례 더 열린 원탁회의를 통해 주민들은 마을을 상징하는 깃발과 ‘선흘1리 생명약속’을 제정했다. 여행자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생물다양성 보전에 기여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여행자들에게 쓰레기를 되가져가고 숲과 마을에서 금연해줄 것 등을 주문하는 내용이다.
주민 사이에 개발만이 아니라 보존도 마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침체했던 마을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질토래비’(제주말로 길 안내자라는 뜻)로 나서며 동백동산의 환경 지킴이를 자청했다. 멸종위기종인 제주고사리삼과 백서향 복원에 적극 참여했고, 재선충 방제작업으로 동백동산이 훼손되는 것을 막았다. 부녀회에서는 동백동산에서 나는 도토리를 이용한 칼국수와 묵 등 요리 체험을 이끌었고, 마을의 어르신들은 현대사의 비극인 4·3의 경험과 마을 역사를 전해주는 해설자가 됐다.
생태관광 추진 이전 1만명이 안 되던 탐방객도 2013년 1만7000여명, 지난해 1만9000여명으로 꾸준히 늘어났다. 덕분에 생산한 농산물을 팔기가 쉬워지고, 외지로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와 식당을 여는 등 생태관광이 소득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활발한 주민 참여를 바탕으로 선흘1리는 지난해 환경부의 ‘생태관광 성공모델’로 뽑혀 다른 지역에서 배우러 찾아오는 곳이 됐다.
고 대표는 “생태관광 프로그램에 반신반의하던 주민들도 이제 달라졌다. 마을에서 무엇을 하든 동백동산 보존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22일 동백동산 탐방안내소에서 만난 박현수 이장은 “동백동산은 올레 코스처럼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천천히 보고 느끼고 가는 곳이 돼야 한다”며 “생태관광을 주민 복지 사업과 연결시키기 위해 생태관광 마을 사업단을 협동조합 형태로 조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동백동산 람사르습지의 핵심 지역인 먼물깍 전경. 2천여㎡의 수면이 멸종위기종 식물인 순채로 덮여 있다. 제주/김정수 선임기자
선흘1리 주민들이 지난해 6월28일 마을 체육관에서 ‘마을 선언문 만들기’를 주제로 원탁회의를 열고 있다. 선흘1리 생태관광협의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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