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상천동에서 금강송면 왕피리 속사마을까지 이어지는 왕피천 생태탐방로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는 학소대의 모습. 협곡 사이로 세차게 흐르는 왕피천이 잠시 숨을 고르며 쉬어가는 구간이다.
생태경관보전지역 10살 된 왕피천
“여름만 되면 마을 주변 물가 곳곳에 텐트촌이 들어서 온통 쓰레기장, 화장실로 변했어요. 피서철이 지나고 쓰레기를 5톤 트럭으로 3대분이나 수거한 적도 있습니다.” 왕피천이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왕피2리 안광정 이장의 회상이다. 경북 영양군 수비면 검마산 자락에서 발원하는 왕피천은 울진군 금강송면(옛 서면)과 근남면을 거치며 65㎞를 흘러 동해와 만난다.
댐으로 가로막힐 운명에서 벗어나
포유류 등에 안전한 피난처 됐지만
바다서 돌아오는 물고기들엔 먼곳
보 철거로 생태계 순환 회복 과제
늘어나는 계곡 트레킹·최상류 개발
하천 자정능력에 위협요인 될수도
“2005년 이후로는 달라졌어요. 계곡 주변에서 야영과 취사를 할 수 없게 되니까 찾는 사람이 크게 줄었어요. 민박을 치던 집들은 좀 불만이지만, 하천 주변이 깨끗해지고 조용해져 주민 대부분은 좋아하고 있습니다.”
10년 전인 2005년 환경부는 왕피1·2리를 중심으로 한 왕피천 유역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왕피천 유역 생태경관보전지역 면적은 102.84㎢. 환경부 지정 9개 생태경관보전지역의 42.6%를 차지하는 넓은 면적이다.
지난 2일 왕피천 생태탐방에 나선 탐방객 10여명과 일행이 돼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상천동에서 출발하는 생태탐방로에 들어섰다. 급경사를 내려가 너덜지대를 지나가는데 길 오른편에 탐방객들한테 주는 왕피천의 선물인 양 연분홍 상사화가 한무더기 피어 있다. 상사화와 헤어져 20분쯤 걸어 첫번째 휴식 지점에 올라서니, 협곡 아래 흰 화강암 암벽 사이로 시퍼렇게 고인 물이 보인다. 왕피천에서 가장 깊다는 용소다. 용소는 어떤 산간 계곡에서든 가장 깊은 소에 흔히 붙는 이름이다. 하지만 왕피천의 용소는 달랐다. 산자락을 따라 10분가량 돌아 상류 쪽 절벽 위에서 다시 내려다보니 “저래서 용소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용소 오른쪽에 튀어나온 흰 바위는 영락없이 입을 벌리고 큰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이다.
상천동마을에서 왕피천 중류에 해당하는 왕피리 속사마을까지 계곡 옆을 따라 이어지는 4.8㎞의 생태탐방로는 협곡과 절벽 사이에 감추어진 왕피천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용소 이외에도 학소대, 거북바위 등 기암절벽과 그 사이를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굽이치는 1급수 맑은 계곡물은, 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시원해진다.
오랜 가뭄 뒤끝인데도 수량은 꽤 풍부하다. 이날 자연환경해설사로 탐방객들을 안내한 구산3리 주민 김순란씨는 “아무리 가물어도 수량이 크게 줄지 않는 것이 왕피천”이라고 했다. 풍부한 수량에 물을 가두기 쉬운 협곡으로 이뤄진 탓에 왕피천은 전혀 다른 운명에 처할 뻔했다. 2001년 건설교통부가 왕피리 속사마을에 댐을 건설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왕피천 유역 생태경관보전지역 지정 당시 울진군청 환경보호과 환경보호팀장이던 방기룡 왕피천에코투어사업단 사무국장은 “울진에서 개발에 제약이 따르는 생태경관보전지역 지정에 적극 찬성하고 나선 데는 다시 왕피천에서 댐 건설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말했다.
왕피리를 비롯한 울진 지역 왕피천 주변 4개 마을 주민들은 2013년부터 ‘왕피천에코투어사업단’을 꾸려 왕피천을 생태관광자원으로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부터 왕피천과 생태경관보전지역 안 숲과 다락논(다랑논) 등의 역사문화유적을 함께 돌아보는 2개 코스를 ‘왕피길’로 개발한 뒤 누리집(www.wangpiecotour.com)을 통해 예약제로 안내하기 시작한 것이 사업단의 첫 작품이다. 하지만 무료 프로그램이어서 점심밥을 파는 것 외에는 여태껏 수익 모델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계곡 트레킹이 인기를 끌자 왕피천에는 탐방로가 아닌 계곡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2일 생태탐방 과정에서도 함께한 일행보다 더 많은 계곡 트레킹객들을 만났다. 누구나 자유롭게 왕피천 출입이 가능한 상황이라 굳이 예약하고 탐방하겠다는 사람을 끌어들이기란 쉽지 않다. 늘어나는 계곡 트레킹은 최상류인 영양군 수비면 지역의 개발 압력 등과 함께 왕피천의 자정 능력을 떨어뜨려 수질 악화를 초래할 잠재적 위협 요소다. 주민 사이에 탐방객이 줄더라도 전면적인 출입통제와 예약탐방제가 시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김순란 해설사는 “옛날 삼한시대 실직국 왕의 피난처였다는 왕피천이 이제는 멸종위기종 산양을 비롯한 수많은 야생동식물의 소중한 피난처가 됐다”고 말했다. 험준한 협곡으로 둘러싸여 사람의 접근이 쉽지 않은 천혜의 자연조건에 생태경관보전지역이라는 보호막까지 갖춰지자 왕피천은 탐방객들이 몰려드는 국립공원 지역보다 야생동물들한테 더 안전한 곳이 된 것은 사실이다.
환경부가 보전지역 지정 전인 2002년과 지정 뒤인 2012년에 각각 왕피천 지역에서 벌인 생태계 조사 결과를 비교해보면, 관찰된 포유류는 14종에서 16종으로 늘고, 조류는 58종에서 76종으로 늘어나는 등 생물다양성이 풍부해졌다. 하지만 하천 생태계의 핵심인 어류를 놓고 보면 왕피천은 여전히 인간의 간섭에서 풀려나지 못했다.
왕피천은 과거 봄에는 황어, 여름에는 은어, 가을에는 연어가 산란을 하려고 중상류까지 거슬러 오르던 곳이다. 바다에서 돌아와 왕피천을 힘차게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들의 모습은 아직 되찾지 못하고 있다. 하류의 수산교 위에 설치된 대형보를 비롯한 10여개의 보 때문이다.
방기룡 사무국장은 “바다에서 올라온 물고기들이 왕피천 상류까지 도달하고 그것을 다른 야생동물이 잡아먹는 식으로 생태계가 순환될 수 있어야 한다”며 “물고기가 상류로 올라갈 수 있도록 수산교 위쪽 가동보를 적절히 운영하고, 활용 가치가 사라진 보들을 가려내 철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울진/글·사진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포유류 등에 안전한 피난처 됐지만
바다서 돌아오는 물고기들엔 먼곳
보 철거로 생태계 순환 회복 과제
늘어나는 계곡 트레킹·최상류 개발
하천 자정능력에 위협요인 될수도
왕피천의 비경 가운데 하나인 용소 바로 위에 있는 용머리 바위 모습. 백룡이 입을 벌리고 큰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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