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환경

호랑이는 사냥꾼보다 농사꾼이 더 무서웠다

등록 2016-01-08 20:00수정 2016-01-10 11:11

1917년 한반도에서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을 벌였던 정호군의 기록. 정호군을 이끈 일본인 자본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왼쪽)가 호랑이를 포획한 뒤 조선인 포수 최순원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정호군의 호랑이 사냥을 영화 <대호>가 많이 참고했다.  한국범보전기금 제공(출처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정호기>)
1917년 한반도에서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을 벌였던 정호군의 기록. 정호군을 이끈 일본인 자본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왼쪽)가 호랑이를 포획한 뒤 조선인 포수 최순원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정호군의 호랑이 사냥을 영화 <대호>가 많이 참고했다.  한국범보전기금 제공(출처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정호기>)
[토요판] 생명
영화 <대호>, 오해와 진실
▶ 영화 <대호>로 사라진 조선호랑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한반도 이남에서 사라졌지만 같은 종의 호랑이가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에 450마리 산다. 최근 출몰 소식이 보고되는 중국 연변 지역은 백두산에서 불과 200㎞ 떨어져 있다. 호랑이 소식이 끊긴 백두산이 다시 산중호걸의 터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범보전기금(savetiger.kr)은 백두산 호랑이 복원을 위한 생태·사회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호랑이 먹이자원과 생태 통로, 주민과의 갈등 소지 등을 조사하고 있다.

지난달 영화 <대호>(연출 박훈정)가 개봉해 5일까지 173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리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를 제외하면, 호랑이가 주인공이 된 흔치 않은 영화다. 일본군이 지리산의 마지막 호랑이 ‘대호’를 잡으려 혈안이 된 가운데 은퇴한 조선인 명포수 천만덕(최민식)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호랑이는 일반적으로 일제시대 해수구제(인간에게 해로운 짐승을 제거하는 정책) 때문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고관 마에조노(오스기 렌)는 귀국 전에 고가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또다른 조선인 포수 구경(정만식)은 복수하기 위해 대호를 쫓는다. 영물 호랑이의 계략에 휘둘리면서 이들은 은퇴한 명포수 천만덕을 부르고 만덕은 대호를 쉽게 잡으려 나서지 않는다. 민족주의에 포박되지 않으려는 긴장이 이야기 내내 나타나지만, 영화는 호랑이가 일제의 폭압적 통치 때문에 멸종됐다는 신화를 이탈하지 않는다. 호랑이는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호랑이를 연구해온 생태사학자 김동진(50·한국생태환경사학회장) 박사를 6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 <대호>의 호랑이는 ‘산군’(山君)이라고 불리면서 사람 두 명 정도는 될 정도로 거대한 덩치를 자랑한다.

“조선시대 호피를 공납받을 때, 대호, 중호, 소호 등으로 분류했다. 대호는 머리에서 꼬리 전까지 체장이 1.9m 넘는 호랑이다. 그에 비하면 영화의 대호(3.8m, 400㎏)는 비현실적으로 크다. 산군으로 불릴 정도의 큰 호랑이라면 먹잇감이 가장 많은 곳에서 영역을 확보하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런 곳은 지리산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전남 진도나 해남의 뻘에 형성된 갈대밭이 더 좋은 서식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보통 대호라고 하면 ‘지리산 호랑이’나 ‘태백산 호랑이’를 연상하는데.

“생각과 달리 호랑이는 습지나 갈대밭, 야산에 많이 살았다. 사슴, 노루, 멧돼지 등 먹이가 많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동물들은 과거 산속보다 초지에 많이 살았고 시야가 트인 곳이 호랑이가 사냥하기에도 편했다. 전남 목포초등학교에 박제가 보관된 불갑산 호랑이(남한에 있는 유일한 야생 조선호랑이 박제)도 능선을 타 넘으면 뻘 지대가 펼쳐진다. 호랑이를 책으로 배운 세대는 호랑이는 깊은 산중에 산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사실 습지나 갈대숲이 먹이 조건이 좋다. 연구를 하면서 역사 기록과 구전 채록이 호랑이 생태에 더 가깝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김동진 한국생태환경사학회장은 일제의 해수구제와 조선의 토호정책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호랑이굴을 조사하는 김동진 회장. 남종영 기자
김동진 한국생태환경사학회장은 일제의 해수구제와 조선의 토호정책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호랑이굴을 조사하는 김동진 회장. 남종영 기자

일제의 폭압적인 해수구제로
조선호랑이는 사라졌을까
‘농본주의’ 내세운 조선시대
농지확장으로 호환 잦아져

500년 국가적 포획으로
서식지와 개체수 줄었고
‘씨 말리겠다’ 근대 제국의
해수구제가 마침표 찍었다

착호군 활동하던 조선시대

호랑이 토벌을 한 건 일제가 처음이 아니었다. 고려 때까지 국가이념이었던 불교는 살생유택의 ‘내세의 도’를 중시했지만, 조선이 채택한 유교는 백성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치국의 도’를 숭상했다.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농본주의가 국가이념이 되었고 전국적으로 농지개간과 양전사업이 이뤄졌다. 1389년 80여만결이던 농지는 16세기 후반 150만~170만결로 늘어났다. 야생에 살던 호랑이와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호환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농지확장과 동시에 국가적인 범(호랑이·표범) 포획 작업이 조선왕조 내내 이어졌다. 범 포획 전문 군사조직인 ‘착호군’이 활동했고 호피공납제, 포호포상제, 호속목 등 호랑이 잡는 다양한 제도가 시행됐다. 중앙집권체제 강화, 관료제 발전 등 조선의 근대성이 강화되면서 동시에 호랑이와 같은 자연은 ‘관리’받았다. 호랑이의 이동 통로, 서식지 등이 기록됐다. 국가적인 호랑이 퇴치 작업으로 조선 말기 호랑이 개체수는 이미 꽤 감소해 있었다.

-조선에는 체계적으로 호랑이를 잡는 시스템이 있었던 것 같다.

“건국 초기부터 전국 330여 군·현에서 매년 겨울 세달 동안 호랑이와 표범을 매달 1마리씩 사냥해 가죽 3장을 공물과 진상 등으로 바치게 했다. 성종 때 1만장 넘는 호피가 쌓여 썩어가고 있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러한 제도가 200년 이상 안정적으로 시행됐다. 1670년께에는 우역이 만연하면서 호랑이의 먹이인 사슴과 멧돼지가 전멸했다. 당시 호랑이가 미쳐서 백주 대낮에 마을을 횡행했다는 기록이 여럿 있다. 먹을 게 없어서 마을까지 내려온 것이다. 더이상 호랑이와 표범을 잡기 어려워지자 17세기 초에는 군·현별로 바치는 호피와 표피의 수를 1~2장으로 줄여주고, 1724년에는 호속목(범을 잡지 못한 대가로 내는 벌금) 제도도 혁파된다.”

-반면 일제시대 잡힌 호랑이 개체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여러 흩어진 자료를 취합하면 일제시대 30여년 동안 호랑이 141마리, 표범 1092마리가 포획된 것으로 나온다.(이순우, 2003년 4월16일 <오마이뉴스>‘누가 마지막 조선호랑이를 보았나?’) 1930년대 들어선 일년에 한두 마리 정도밖에 안 잡히는 등 사실상 절멸로 치달은 것 같다.

“일제시대 해수구제 정책의 대상은 호랑이, 표범은 물론 늑대, 곰 그리고 농작물을 훼손하는 사슴, 노루, 고라니도 있었다. 호랑이, 표범의 포획 지역도 남해안 일부 지역과 평안도, 함경도 등이 대부분이었다. 표범은 해방 이후에도 한반도 이남에 살았고, 1970년대 가야산에서 잡힌 게 마지막이었다. 일제시대 민간인 피해가 가장 크면서 가장 많이 잡힌 것은 오히려 늑대였다. 호랑이와 표범이 사라진 지역에 늑대가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고, 맹수 피해의 대부분도 늑대로 인한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일제시대 해수구제로 야생동물 개체수가 상당히 감소했고, 이것이 상위 포식자인 호랑이와 표범이 줄어드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 이남의 호랑이는 누가 절멸시켰나? 조선인가, 일제인가?

“조선시대의 포호정책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 또한 조선의 포호정책을 흉내 낸 측면이 있다.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면서 자신들의 용맹함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고려와 조선이 이념으로 삼은 불교와 유교는 균형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조선시대 국가적으로 호랑이를 포획했지만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걸 막기 위해서였지 일본처럼 씨를 말리려고 하지 않았다. 연산군이 궁궐 후원에 호랑이 등을 가두고 동물원을 차릴 때에도 유학자들은 반대했다. 반면 제국주의는 과학과 물질 만능주의로 인간을 해치는 것은 박멸 대상으로 삼는다. 호랑이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시대 사실상 호랑이는 한반도 이남에서 자취를 감춘다. 근대성이 가진 불합리함이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동물을 폭압적으로 사냥하고 기행을 일삼은 연산군 같은 군주가 있었다. 전라도 각 고을에 고래를 잡아오라고 어명을 내리고 두어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관직을 박탈했고(연산군일기 59권), 우리에 큰 호랑이와 큰 멧돼지를 실어 (궁궐) 후원에 들여오기도 하고 혹 호랑이를 대성전 안에 가둬놓고 벽에 구멍을 뚫어 화살을 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61권) 김전 같은 신하는 “전하께서 과도하게 시행한 일이 너무 많으니, 청컨대 두루 생각해보고 둘러보시어 모든 토목공사와 내원의 동물이나 노리개 거리를 일체 정지하고 없애소서”(연산군일기 12권)라고 말했다.

아직 멸종되지 않았다

-영화 <대호>에서 일본군에 내몰리는 산군이 마치 식민지 조선인을 표상하는 것 같다. 육당 최남선은 1908년 잡지 <소년>창간호에서 호랑이가 두 다리를 뻗고 대륙으로 웅비하는 모양의 한반도 지도를 싣기도 했다. 해수구제에 대한 조선인들의 인식은 어땠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랑이, 표범, 늑대 등 야생동물이 해롭다고 느꼈고 그것을 없애는 데 특별한 거부반응은 없었다. 1917년 일본인 자본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의 정호군이 대대적으로 벌인 호랑이 사냥 때도 구경하고 환영하는 사람들이 몰렸다. 지금과 같은 야생보전 개념이 없었을 때다. 민중은 호랑이를 영험한 동물로 여겼지만, 호랑이 잡지 말자고 했던 건 아니었다. 낭만주의적으로 보지 않고 시대적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조선호랑이는 멸종한 것인가?

“현재 연해주와 중국 만주에 사는 아무르(시베리아)호랑이와 유전적으로 같다. 즉, 한반도 이남에서 지역적으로 절멸한 것이지 멸종한 것은 아니다.”

-호랑이를 복원할 수 있을까?

“울타리 없는 완전한 야생방사는 현실적인 여건상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전제하에서 백두대간 축보다 습지가 오히려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어 있으니 산이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하는데, 호랑이 입장에서는 높은 산보다 습지가 고라니, 노루 등 먹을 게 많고 사냥하기 쉽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지금 당장 기후 행동”
한겨레와 함께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