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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환경

“고래야, 네 증조할머니를 내가 기억한단다”

등록 2016-12-12 08:25수정 2016-12-12 08:46

[미래] 바다와 우리의 미래
우연히 간 학교 현장학습에서
스텔왜건 바다의 혹등고래 떼 목격
‘연구·교육형’ 고래관광 탄생

한정적인 생태자원 소모하지 않고
콘텐츠 개발로 산업적 성공
기업-과학자-시민 협력이 일궜다
기업과 과학이 협력하는 연구·교육형 고래관광의 모델을 만든 미국 뉴잉글랜드 프로빈스타운의 업체 ‘돌핀플리트'의 배에 10월16일 탑승해 혹등고래를 관찰했다.  스텔왜건/남종영 기자
기업과 과학이 협력하는 연구·교육형 고래관광의 모델을 만든 미국 뉴잉글랜드 프로빈스타운의 업체 ‘돌핀플리트'의 배에 10월16일 탑승해 혹등고래를 관찰했다. 스텔왜건/남종영 기자

“기자 양반,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말 아시오?”

찰스 스토미 메이오 수석연구원이 불쑥 물었다. 10월17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프로빈스타운의 연안연구센터(CCS)에서 만난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우연이 겹쳐 아주 좋은 결과가 난 것이죠. 고래관광이 그랬지요. 1975년 한 학교에서 프로빈스타운의 어부 앨 아벨라에게 학생들을 배에 태우고 각종 새와 야생동물을 보여달라고 한 거죠. 아벨라가 확성기를 주면서 나한테 부탁했죠. 자기는 바다 동물을 잘 모르니까, 학생들한테 교육해달라고. 25달러를 받고 나갔죠.”

마침 메이오는 해양생물학 박사학위를 따고선 요트를 직접 만들겠다며 홀연히 프로빈스타운에 내려와 있었다. 메이오가 아벨라를 알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을 데리고 바다에 나가보니, 새보다 고래가 많았다. 아벨라는 고래 관찰이 사업이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자신의 어선을 개조해 고래관광 업체 ‘돌핀플리트’를 설립했다. 메이오에게는 학구열이 다시 생겼다. 해양생물학자에게 가장 큰 부담은 배를 빌리는 비용이다. 고래관광 배를 타면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메이오는 돌핀플리트 가이드를 하면서 혹등고래의 꼬리지느러미 사진을 찍고 이름을 붙여갔다. 기업과 과학자가 협력하는 ‘뉴잉글랜드 고래관광 모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미국 동부 연안의 뉴잉글랜드는 18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포경의 중심지였다. 프로빈스타운, 낸터킷, 뉴베드퍼드 등 주요 포경 항구가 있었다. 태평양과 북극해를 드나드는 포경선이 내뱉은 땀 냄새와 고래기름 냄새 그리고 일확천금이 거리에 부를 가져다줬다. 고래를 잡아 추출한 기름으로 만드는 양초는 전기가 없던 시절 전세계의 도시를 밝혔다. 하지만 포경은 지속가능한 산업이 아니었다. 한정된 자원인 고래는 점차 멸종으로 치달았고 1850년 전후로 석유를 조명용 연료로 쓰는 방법이 개발되면서 자연착취적인 포경산업은 종말로 향해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갔던 바다가…

두 남자가 모르고 갔다가 많은 고래를 보고 놀란 곳은 스텔왜건 바다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이 시작되는 곳이자, 뉴잉글랜드의 포경선들이 원양으로 진출하기 전부터 고래를 잡아왔던 곳이다. 1927년 뉴베드퍼드의 마지막 포경선이 출항했고 1985년에는 세계적으로 상업포경이 금지됐지만, 뉴잉글랜드의 후손들은 이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고래와 다시 만났다. ‘죽은 고래’가 아닌 ‘산 고래’가 돈을 가져다주는 고래관광 산업이 시작됐다.

미국 뉴잉글랜드 프로빈스타운의 돌핀플리트의 고래관광선.  남종영 기자
미국 뉴잉글랜드 프로빈스타운의 돌핀플리트의 고래관광선. 남종영 기자
과학자들이 개체 식별을 할 때 이용하는 혹등고래의 지느러미.  남종영 기자
과학자들이 개체 식별을 할 때 이용하는 혹등고래의 지느러미. 남종영 기자
미국 스텔웨건 해양보호구역의 혹등고래들이 버블클라우딩(공기방울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아먹는 사냥법)을 하고 있다. 남종영 기자
미국 스텔웨건 해양보호구역의 혹등고래들이 버블클라우딩(공기방울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아먹는 사냥법)을 하고 있다. 남종영 기자
10월16일 돌핀플리트의 배를 탔을 때도 13~14마리의 혹등고래를 볼 수 있었다. 네댓 마리씩 짝을 이룬 혹등고래는 공기 방울로 덫을 만들어 물고기를 사냥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혹등고래가 크게 숨을 쉬자 분수공에서 나온 물보라가 배를 덮쳤다. 고래가 배 밑으로 잠영할 때마다 승객들은 중심을 잡기 위해 난간에 매달려야 했다.

고래관광 업체 ‘돌핀플리트’는 뉴잉글랜드에 ‘연구·교육형’ 고래관광을 유행시켰다. 과학자가 가이드를 하면서 생태 자료를 수집하고, 탐방객은 과학자에게 수준 높은 생태 설명을 듣고, 기업은 돈을 버는 ‘삼중의 윈윈 효과’를 실현했다. 심지어 국제포경위원회(IWC) 과학위원회 소속 과학자가 가이드를 할 정도다. 환경단체와 동물단체도 가세해 야생보호 메시지를 전하는 데 앞장섰다. 고래관광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는 1980년대 반포경 운동과 연대했으며(지금도 돌핀플리트는 탐방객에게 일본 과학포경을 반대하는 서명을 받곤 한다), 프로빈스타운 항구에는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 국립해양대기청(NOAA)이 세운 입간판이 서 있다. “1975년을 기점으로 프로빈스타운과 고래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고래 관광객들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1992년 스텔왜건 바다는 국립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국제동물복지기금(IFAW)의 보고서를 보면, 2008년 91만명이 뉴잉글랜드로 고래관광을 하러 와 1억2600만달러(약 1431억원)을 쓰고 갔다. 현재는 동부 연안을 따라 프로빈스타운, 낸터킷, 글로스터, 보스턴 등의 18개 업체가 고래관광선을 출항시킨다. 전성기인 1990년대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남획으로 인한 어획량 감소로 어려움을 겪는 글로스터 등 항구도시에 대체 수익원이 되어주고 있다. 보고서는 “일자리 창출 효과뿐만 아니라 고래 연구와 고래 보호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1976년 메이오가 설립한 연안연구센터와 1979년 글로스터에서 설립된 뉴잉글랜드 고래센터의 과학자들은 고래관광 업체와 협력해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연안연구센터를 이끌다가 수석연구원으로 물러난 메이오가 말했다.

“지금까지 혹등고래 700~800마리를 식별했어요. 4세대를 봤습니다. 새끼를 보고 전 이렇게 말하죠. 내가 네 증조할머니가 누군지도 안다.”

수집벽이 일군 낸터킷의 성공

프로빈스타운에서 바다를 건너면 인구 1만5000명의 낸터킷 섬이 있다. 소설 <모비딕>에서 신출내기 선원 이슈마엘이 에이허브 선장을 따라 포경선 피쿼드호를 탔던 곳이다. 프로빈스타운이 과거 포경도시로서 정체성을 친환경적인 고래관광으로 바꿨다면, 낸터킷은 포경 역사유적 도시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웠다. 낸터킷은 또한 천연 사구와 습지가 발달했는데, 행정당국이 소유하고 보전단체가 사들여 섬의 절반이 개발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10월17일 낸터킷포경박물관의 페기 고드윈 해설사가 향고래 골격과 작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남종영 기자
10월17일 낸터킷포경박물관의 페기 고드윈 해설사가 향고래 골격과 작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남종영 기자
낸터킷은 포경산업이 쇠락한 뒤 먼지 낀 유물을 버리지 않았다. 항해일지, 스크림쇼(포경선원들이 고래 뼈에 새긴 장식품)는 물론 선원이 보내온 편지까지 닥치는 대로 모으고, 꿰맞추어 특성을 부여하고, 스토리텔링을 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두를 민간단체가 주도했다는 것이다. 1894년 설립된 낸터킷역사협회는 1930년 낸터킷포경박물관을 개장해 미국 포경의 역사를 보존했다. 양초 공장을 개조해 만든 포경박물관은 매년 관광객 6만명을 이 작은 섬으로 끌어오는 동력이다. 소설 <모비딕>의 소재가 된 ‘에식스호의 침몰 사건’에 대한 자료를 모았고, 2000년 너새니얼 필브릭의 베스트셀러 논픽션 <바다 한가운데서>로 다시 쓰이고, 지난해에는 할리우드 영화 <하트 오브 더 씨>로 제작돼 또다시 낸터킷의 존재를 전세계에 알렸다.

마잔 서자드 전시국장은 10월18일 “낸터킷은 미국 진보 역사의 축소판이다. 평화주의자 퀘이커 교도가 주류였던 섬에서 흑인은 노예가 아닌 노동자로 일했다. 흑인에서 자유인이 되었던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첫 연설을 한 곳도 낸터킷”이라고 설명했다. 박물관이 포경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통과했던 잔혹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며 “환경운동가들의 강연을 개최하는 등 고래 보전에 관한 전시도 보완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도시는 자원을 소모적으로 써버리지 않고, 이야기와 지식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성공한 흔치 않은 사례다. 과학자(해양포유류학자와 역사학자)와 지역 기업 그리고 커뮤니티가 사이좋게 문화를 일구며 선순환을 불러왔다.

두 도시의 미래가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스텔왜건 해양보호구역의 고래관광은 과열 양상을 보인다는 우려가 일부에서 제기된다. 낸터킷은 미국 동부 부호의 여름철 별장촌으로 이용되면서 집값이 올라 정작 사계절 거주 주민들의 지속가능성이 위협받고 있다.

멀리사 머피 낸터킷 관광문화국장은 “휴가철이 아니면 텅 빈 도시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시내에 사계절 문을 여는 상점을 늘리자는 운동 등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프로빈스타운·낸터킷(미국)/글·사진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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