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교저수지에서 아이스크림고지로 이어지는 도로에 인접한 한 논에서 먹이를 쪼던 재두루미 가족이 도로를 지나던 생태도시 심포지엄 현장탐방단 버스가 멈춰 서자 천천히 논 안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두루미가족… 독수리떼… 쇠기러기떼… 푸드덕
동물원이 아닌 곳에서 그렇게 큰 새들을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미 둘과 새끼 둘로 이뤄진 가족으로 보이는 재두루미 4마리는 가을걷이가 끝난 빈 논 바닥에서 무엇인가를 쪼고 있었다. 숙이고 있는 긴 목만 세우면 어린 녀석들의 키도 1m는 넘을 듯 했다. 기자가 타고 있는 버스의 차창과 녀석들 사이의 거리는 아무리 멀게 잡아도 40m가 안 될 것 같았다.
국제심포지엄 참가자들과 함께
재두루미 가족은 지나가던 버스가 멈춰 섰는데도 별로 경계하지 않고 그저 느릿느릿 논 안쪽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버스 속의 탐방객들이 한참 셔터를 누르고 난 뒤에야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맨 앞 쪽에 있던 어미가 고개를 한번 까닥거렸고, 그것이 신호인 듯 두루미들은 날개를 펴고 대여섯 발자국 앞으로 달려가더니 땅을 박차고 날아 올랐다.
지난 6일 환경운동연합과 강원도, 한겨레신문사가 ‘비무장지대(DMZ) 일원의 지속가능한 보전 방안’을 주제로 공동 주최한 국제심포지엄 참석자들과 함께 찾아간 민통선 북쪽 철원평야는 두루미, 독수리 등 철새들의 세상이었다.
오전 11시 철원군 동송읍 양지검문소를 거쳐 민통선을 넘은 현장탐방단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철원을 찾아 오는 수많은 철새들의 휴식처인 토교저수지. 버스에서 내려 저수지 쪽으로 올라가면서 하늘을 보니 온 몸이 검은 커다란 새 수십마리가 저수지 앞 논 위 하늘에서 날개를 한껏 편 채 맴돌고 있었다. 독수리들이었다.
토교저수지 주변은 매년 겨울 몽골 초원에서 한국으로 날아와 겨울을 나는 독수리 1500여마리 가운데 철원을 찾는 500여마리의 집결지이다. 토교저수지 주변에 독수리들이 몰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들이 먹잇감을 찾지 못해 굶주리는 독수리들을 위해 해마다 저수지 앞 논에다 먹잇감을 놓아 주다보니, 저수지 주변에 오면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게 안내를 맡은 철원지역 생태사진가 진익태씨의 설명이었다.
철새 먹이주기 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두루미보호협회 철원지회가 지난해 독수리 먹잇감으로 토교저수지 앞 논에 가져다 놓은 것은 소 30마리, 돼지 100여마리, 닭 5000여마리에 어치에 이른다. 소와 돼지는 축산농가에서 키우다 폐사해서 어차피 매립해야 하는 사체를 얻어 온 것이고, 닭은 문화관광부 예산 지원을 받아 구입한 것이다. 전춘기 두루미보호협회 철원지회장은 “올해는 아직까지 도착한 독수리가 100여마리 밖에 안돼서 먹이주기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논에 소나 돼지 사체를 가져다 놓았을 때 100여마리가 넘는 독수리들이 한꺼번에 달려 들어 뜯어 먹는 모습은 아프리카의 초원을 연상시키는 장관”이라고 말했다.
고지로 가는 길은 ‘사파리’
탐방객들이 저수지 둑 위에 올라가 멀리 저수지 가운데 수면 일부를 뒤덮다시피한 철새떼를 관찰하고 있을 때, 어느 방향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또 다른 새들이 수백마리씩 무리를 지어 탐방객들 머리위를 지나 저수지 안쪽으로 날아갔다. 아침 일찍 주변의 논으로 날아가 배를 채운 뒤 쉬려고 돌아 오는 쇠기러기떼였다. 진씨는 “쇠기러기들은 토교저수지 물 위에서 잠을 자고 쉬면서 하루에 두 번씩 주변 논으로 날아가 먹이를 먹고 돌아오기를 반복한다”고 말했다.
토교저수지에서 다음 목적지인 아이스크림고지로 가는 길은 ‘두루미 사파리’ 관광로라고 불러도 좋을 듯 했다. 농부들도 찾지 않는 초겨울의 들판에서 여유로워진 두루미들은 40~50m쯤 떨어진 도로로 지나가는 자동차 따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로 왼쪽 논 바닥에 서 있는 두루미 가족 3~4마리가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면, 도로 오른쪽 논 바닥에 있는 새로운 두루미 가족들이 눈에 들어오는 식의 ‘관광’이 20여분 동안 이어졌다.
“저기저기, 고라니잖아”
1999년부터 철원 지역에서 철새를 조사하고 있는 진씨는 “철원을 찾는 두루미는 해마다 꾸준히 늘어나 현재는 시베리아나 중국 북부 등지에서 한국으로 날아오는 두루미의 90% 이상이 철원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두루미들이 유독 철원을 찾는 이유는 뭘까? 진씨는 “인간의 출입이 통제된 가운데 안전하게 먹이를 구할 수 있는 넓은 평야, 아무리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물이 나오는 샘통 등의 조건이 철원으로 두루미를 불러들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탐방단에 참가한 폴 힐리 국제두루미재단 컨설턴트는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지역의 훼손되지 않은 자연은 통일 이후 한국에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는 자산”이라며 “남북이 함께 협력해서 앞으로 비무장지대를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행사를 주관한 환경운동연합의 황호섭 생태보전국장도 “민통선 지역에서는 산악으로 이뤄진 동부지역에 비해 철원을 비롯한 서부 평야지역이 개발압력에 극히 취약할 수 밖에 없다”며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라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훼손될 수도 있는 만큼, 어디까지 보존하고 개발한다면 어떻게 어디까지 개발할지에 대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탐방행사의 마지막은 고라니가 장식했다.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 있는 철의삼각 전망대에 올라 북쪽을 살피던 탐방객들의 눈에 옛 남방한계선 철책과 새로 만들어 세운 철책 사이의 좁은 풀밭에 노란 물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혹시나 해서 전망대에 근무하는 군인이 돌을 던지자 고라니 한 마리가 튀어 달아났다. 고라니는 폭이 20여m 밖에 안되는 두 줄의 철조망 사이에서 금방 숨을 곳을 찾지 못했지만, 그 속에서 안전하다는 것은 터득한 모양이었다. 60~70m 가량 서쪽으로 달리고는 이내 멈춰서서 천천히 철책을 따라 걸어갔다.
철원/김정수 기자 jsk21@hani.co.kr
생태도시 심포지엄 현장탐방 참가자들이 두루미들을 관찰하기 위해 아이스크림고지에 오르고 있다. 김정수 기자 jsk21@hani.co.kr
토교저수지 수면에 내려 앉은 철새들을 관찰중인 생태도시 심포지엄 현장탐방 참가자들. 김정수 기자
철의삼각전망대 앞 풀밭에서 낮잠을 즐기다, 한 군인이 던진 돌에 놀라 깨어난 고라니.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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