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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장애인

“보이지 않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큰 축복입니다”

등록 2015-06-18 18:48

김치국씨.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김치국씨.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짬] 버클리 음대 첫 시각장애인 교수 김치국 씨
현대의학으로는 그가 잃어버린 시력을 찾을 수 없다. 네살 때 선천적 심장병 수술을 했다. 심장은 좋아졌으나 수술 후유증으로 망막이 떨어져 나갔다. 중도 실명자가 됐다.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암흑이다. 하지만 너무 어릴 때 시력을 잃어서인지 그에겐 보이는 것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없다고 한다.

“만약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보고 싶나요?” 자신을 위해 평생 애쓴 부모의 주름진 얼굴이나, 미국인 간호학 박사로 4년 전 결혼한, 사랑하는 부인 티파니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악보를 보고 싶어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대로 연주하고 싶어요.” 순간 목이 메며, 말이 막힌다. 안 보이니 점자 악보를 손가락으로 만져 외워서 연주를 해야 한다.

김치국(34·사진)씨는 미국 버클리음대 최초의 시각장애인 교수다. 5년 전, 29살의 최연소 교수로 임용됐다. 전세계에서 시각장애인들이 그에게 음악을 배우러 모여든다. 버클리음대 로저 브라운 총장은 그를 헬렌 켈러의 스승 앤 설리번에 비유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선천성 심장병 수술후유증 4살때 실명
피아노 재능 키우려 고교때 미국으로
버클리 음대 졸업뒤 29살 최연소 교수
세계 유일 ‘시각장애인 대상 작곡’ 강의

시력 찾는다면 “먼저 악보 보고 싶다”
자전에세이 “눈뜨기보다 가족 선택”

헬렌 켈러는 말했다. “만약 기적이 일어나 사흘 동안 볼 수 있게 된다면, 먼저 어린 시절 나에게 다가와 바깥세상을 활짝 열어 보여주신 사랑하는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어요.” 헬렌 켈러에겐 설리번 선생처럼, 그에겐 음악이 세상으로 가는 통로이자 빛이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이 축복이라고 한다. “시각장애인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빛을 모르는 사람일 뿐이니까요. 보이는 것 대신에 보이지 않는 것에 의지해 사는 이가 시각장애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특별한 축복을 받는 사람들이랍니다.”

시력을 잃은 그에게 부모는 피아노를 가르쳤다. 하루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기도원을 갔다. 예배 도중 전기가 나갔다. 어둠에 휩싸였다. 피아노 반주자는 당황했다. 그때 김씨의 어머니는 “치국아, 네가 나가서 피아노 쳐봐.” 깜깜한 실내에서 어린아이는 거침없이 건반을 눌렀다. 그에겐 전기가 만든 빛은 의미가 없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황홀함이었어요. 어둠이 나에겐 빛으로 다가온 거죠.”

그의 아버지는 혼자 길을 가며 눈을 감곤 했다고 한다. 몇발 못 가서 눈물을 흘리며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렇게 아들의 아픔이 부모의 가슴에 박혔다. 중학 시절 복잡한 컴퓨터 기기를 해체했다가 조립할 정도로 컴퓨터에 익숙했던 그는 컴퓨터 음악에 빠졌다.자판에 점자를 붙여 작곡을 시작했다. 부모는 그의 재능을 키워주고자 비장애인과 함께 배울 수 있는 미국 고교로 유학을 보냈다.

버클리음대에 들어간 그는 장애를 바라보는 미국 사회의 시선에 놀랐다. 기숙사 룸메이트가 동성애자였는데, 동성 애인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김씨는 학교 당국에 룸메이트를 바꿔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학교는 “당신의 룸메이트가 시각장애가 있는 당신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처럼,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당신도 이해하고 용납해줘야 하지 않나요?”

음대 시절 작곡을 하기 위해선 악보를 그려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악보를 본 적이 없다. 작곡자와 연주자, 관객이 음악을 공유하고 소통하기 위해선 악보가 필수적이다. 다행히 ‘시벨리우스’라는 비교적 어려운 프로그램을 익혀 악보를 그릴 수 있었다. “도전을 좋아해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즐기는 편이니까요.”

대학을 졸업한 김씨는 친구와 음악제작사를 만들어 영화음악에 도전했다. 동료가 영화 내용과 음악이 필요한 장면의 길이를 알려주면 그는 거기에 맞춰 음악을 작곡했다. “예를 들어 3분3초 19프레임에 한 남자가 달리기 시작해요. 3분50초 1프레임에서 달리던 남자가 서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상상해요.”

2010년 버클리음대에서 세계 최초로 생긴 시각장애 학생을 위한 정규 강의를 맡은 그의 제자 가운데는 시각에 청각 장애까지 안고 있는 학생도 있다. 인공와우를 끼고 드럼을 치는 그 학생은 남다른 박자감과 리듬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지난 4월 펴낸 자전에세이 <소리로 세상을 밝히다>(두란노서원)의 홍보차 잠시 귀국한 김씨는 “한국에서 시각장애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비장애인들과 함께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각장애인들만을 위한 학교에 가야 해요. 교육은 시각장애인 직업 재활에 대한 것이었고, 학문을 익히기 위한 프로그램은 부족했어요.”

그는 “장애는 불가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불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불편하고 부족한 것에 집중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장애에 묶이지 않고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어요. 보이지 않는다고 꿈꿀 수도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버지는 김치가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이라며 1남2녀의 이름을 지었다. 두 누나의 이름은 ‘김치다’와 ‘김치네’이다. “만약 눈이 보이는 것과 가족,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저는 주저 않고, 절대 눈뜨기를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은 나에겐 천사이고, 보지 못함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기 때문이죠.” 그가 웃는다. 빛을 잃은 그의 눈에서 환한 빛이 나온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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