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S] 김도훈의 낯선 사람
조이 밀른
남편 몸에서 ‘병의 냄새’ 느낀 이후
밀른의 예민한 후각 연구한 의학계
파킨슨병 진단 AI 시스템 개발 중
조이 밀른
남편 몸에서 ‘병의 냄새’ 느낀 이후
밀른의 예민한 후각 연구한 의학계
파킨슨병 진단 AI 시스템 개발 중
조이 밀른은 후각으로 암 등 질병을 미리 판별할 수 있는지 전세계 과학자들과 협력 중이다. <비비시>(BBC) 유튜브 화면 갈무리
남편 몸에서 나기 시작한 냄새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슈퍼히어로는 앤트맨이다. 몸 크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은 생각보다 쓰임새가 많아 보인다. 대중교통도 공짜로 탈 수 있다. 고양이 등에 업혀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도 꽤 재미날 것이다. 욕조에 물을 채운 뒤 수영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장난감 요트를 띄운다면 카리브해에서 휴가를 보내는 슈퍼리치의 기분도 만끽할 수 있다. 25평짜리 집을 1천평짜리 대저택처럼 쓸 수도 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약간의 자괴감이 몰려온다. 슈퍼파워를 가진다면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가 되어야 마땅한데 나의 소시민적 상상력은 기껏해야 이 정도니까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블의 우주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슈퍼파워가 없다. 인간은 슈퍼히어로가 될 수 없다. 인간의 능력이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신비하거나 신기한 존재다. 종종 자연은 돌연변이를 만들어낸다. 슈퍼히어로도 기본적으로 돌연변이다. 거미에 물려 스파이더맨이 되거나 디엔에이(DNA)의 변화로 엑스맨이 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모르던 슈퍼파워를 뒤늦게 발견하는 일도 아주 가끔 벌어지곤 한다. 이를테면 어떤 인간은 타인의 병을 냄새로 진단할 수 있다. 그런 일이 마블 우주 바깥에서도 가능하냐고? 그렇다. 가능하다. 일흔두살 영국 여성의 이야기가 증거다. 스코틀랜드 퍼스시에 사는 조이 밀른은 남편을 파킨슨병으로 잃었다. 파킨슨병은 뇌의 도파민계 신경이 파괴되면서 움직임에 장애가 생기는 질환이다. 19세기 말 이 병을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한 영국 의사 제임스 파킨슨의 이름을 따서 파킨슨병이라고 부른다. 1천명에 1명꼴로 발생하는 병이니 생각보다 흔하다. 특히 한국인에게는 파킨슨병 발병 유전자가 있다. 다른 인종보다 발병이 더 잦다는 소리다. 60살 이상 한국인의 유병률은 10만명당 165.9명에 달한다. 미리 진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병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이 밀른의 남편도 파킨슨병으로 오랫동안 투병을 하다 죽었다. 그런데 조이 밀른은 전직 의사인 남편이 파킨슨병을 진단받기 6년 전부터 이상한 조짐을 느꼈다. 남편의 몸에서 묘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향수에 많이 쓰이는 사향(Musk)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조이 밀른 남편의 사향 냄새를 맡지 못했다. 남편도 자신의 냄새를 맡지 못했다. 조이 밀른은 그 모든 게 자신의 후각이 지나치게 예민한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몇년 뒤 남편이 파킨슨병을 진단받고 병원에 입원하자 조이 밀른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병원에 있는 다른 파킨슨병 환자들에게서도 남편과 똑같은 냄새가 났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을 정도로 확실한 냄새였다. 조이 밀른은 이를 스코틀랜드의 파킨슨병 전문 연구자들에게 알렸다. 다행히도 그 동네 연구자들은 그의 보고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생전의 남편과 조이 밀른. 로열 인스티튜션 유튜브 화면 갈무리
“저주인 동시에 축복인 능력” 에든버러대학의 틸로 쿠나스 박사는 2012년 조이 밀른의 후각을 테스트했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건강한 사람을 6명씩 모았다. 각각의 실험 대상자들이 오랫동안 입었던 티셔츠를 조이 밀른에게 건넸다. 티셔츠 냄새만으로 파킨슨병 환자인지 아닌지를 판정해달라고 했다. 밀른은 12명 중 11명의 파킨슨병 여부를 알아맞혔다. 놀라운 일이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다. 12명 중 밀른이 오판한 것으로 여겨졌던 나머지 1명 역시 실험이 끝난 지 8개월 뒤 파킨슨병을 진단받은 것이다. 파킨슨병은 엑스레이, 전산화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같은 진화한 임상 검사로도 미리 발견할 수 없는 병이다. 도대체 어떻게 스코틀랜드의 평범한 여성은 파킨슨병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보통의 인간 능력을 뛰어넘는 슈퍼파워를 갖게 된 걸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냥 그 능력을 타고난 것이다. 조이 밀른의 슈퍼파워는 여러 국가에서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다. 가장 좋은 소식은 2022년 초 중국으로부터 전해졌다. 저장대와 톈진중의약대 등 공동 연구팀은 밀른의 사례를 연구한 뒤 파킨슨병을 미리 진단할 수 있는 인공지능 후각 시스템을 개발했다. 밀른이 맡은 냄새는 환자들의 피지로부터 나오는 냄새였다. 파킨슨병 환자들의 몸에서는 효모, 효소와 호르몬이 더 많이 발생한다. 피지도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이 분비된다. 연구팀은 파킨슨병 환자와 건강한 사람들의 몸에서 피지를 채취한 뒤 휘발성인 유기화합물을 인공지능 후각 시스템으로 분석했다. 그러고는 파킨슨병 환자들에게서 건강한 사람과 달리 세가지 냄새 화합물(옥탄올, 페릴알데하이드, 헥실아세테이트)이 분비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직 인공지능 후각 시스템은 조이 밀른의 코처럼 완벽하지는 않다. 파킨슨병 환자를 찾아내는 정확도는 70% 정도다. 이미 시작된 연구는 점점 발전할 것이다. 곧 우리는 환자의 냄새로 파킨슨병 여부를 완벽하게 진단할 수 있는 의학적 기술을 보유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2022년 9월 <가디언> 기사에 따르면 조이 밀른은 후각으로 암이나 결핵 같은 다른 병을 구분할 수 있는지 여부를 밝혀내기 위해 전세계 과학자들과 협력 중이다. 스코틀랜드의 작은 도시에 살던 평범한 여성으로서는 좀 부담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는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능력을 일종의 ‘저주’라고 말한다. “맞아요. 이건 저주일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탄자니아에서 결핵 관련 연구를 했고 미국에서는 암 연구를 돕고 있어요. 그러니 이건 저주인 동시에 축복이기도 합니다.”
질병을 감지하는 예민한 후각을 가진 조이 밀른. <비비시>(BBC) 유튜브 화면 갈무리
작은 ‘슈퍼파워’를 각성하는 순간 나는 조이 밀른의 말에서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슈퍼히어로 영화 중 한 편일 <스파이더맨>의 대사를 절로 떠올린다. “큰 파워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는 유명한 대사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이미 탄생한 슈퍼히어로들과 살아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가만 생각해보면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처럼 슈퍼브레인을 가진 채 태어나 지구와 우주와 시간의 비밀을 밝혀낸 사람들도 일종의 슈퍼히어로다. 타인의 작은 불행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높은 사회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도 슈퍼히어로다. 그들이 자신의 파워를 각성하는 순간 인류의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 세상에는 수많은 슈퍼히어로가 이미 우리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사실을 일깨워주는 건 누군가의 작은 슈퍼파워도 농담으로 간주하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이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슈퍼파워가 있을 것이다. 어젯밤 출장 갔다 온 남편 몸에서 다른 여성이나 남성의 냄새를 분명하게 맡을 수 있다면? 급하게 뿌린 페브리즈 향에서도 그 냄새를 구분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한 슈퍼파워다. 비록 지금 당신의 슈퍼파워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데에만 제대로 활용되겠지만, 뭐 어떤가. 캡틴 아메리카도 말하지 않았던가. “때로는 다시 시작하는 게 최선이야”라고.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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