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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발골수종으로 확진된 게 아니고, 의심된다는 거지?”
남매들만 있는 단체대화방에 암 의심 소견을 알리자, 둘째 여동생 제이(J)가 평소와 달리 이성적인 메시지를 보내왔다. 좀 전까지 주저앉아 울던 나는 조금 머쓱해진 느낌이었다. 제이와 내 감정 거리는 낮과 밤이 완벽히 다른, 한국과 우루과이 정도 아닐까. 그에게 왜인지 모를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사실상 확정이지.”
답을 하고 보니 불과 하루 전 내가 보낸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입원한 엄마에게서 같은 병실에 심한 코골이 환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보낸 것이었다. “(보호자로 병실에 들어갈 때) 이어플러그 챙겨 가야겠다 ㅋㅋㅋ” 엄마가 통증과 싸우며 두려워했을 시간에 고작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자지 못할까 봐 키득대던 내 모습이 있었다.
다발골수종.
면역항체를 만드는 형질세포가 혈액암으로 변해 주로 골수에서 증식하는 질환이다. 암세포가 뼈를 침범하는 경우가 많고 압박골절, 하지마비 등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엄마가 겪은 신장기능 이상, 척추 골절, 입맛 소실 등은 전형적인 다발골수종 증상이었다. 허리나 갈비뼈에 통증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대다수가 단순 관절염 등으로 판단해 치료 시기를 놓친다고 한다. 평균 발병 나이는 만 66살, 딱 엄마 나이다. 모든 설명이 엄마의 상태와 일치했다.
이미 혈액검사에서 다발골수종을 의심하는 지표들이 나왔다. 추가 검사로 진단명을 확정하는 일만 남았다. 우선 회사에 전화해 휴가를 연장했다. 엄마 ‘혼자’ 병명을 듣고, ‘혼자’ 외로운 시간을 견디고, ‘혼자’ 의료진으로부터 두려움의 말을 듣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오롯이 내가 의료진을 상대하는 것도 내 어깨를 누르긴 매한가지였다. 가장 먼저 의료진을 만나, 좋지 않은 뉴스를 듣고 이를 다듬어 동생과 엄마에게 전달하는 일은 4남매 맏이로 자란 내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나 혼자 이 일을 감당하긴 어렵다고, 아픈 엄마를 혼자 마주하는 일은 나도 무섭다고, 누구라도 내 옆에 있어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출장 중인 남편, 일하거나 돌쟁이 육아 중인 동생, 당장 달려올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다행히 병원 근처에서 일하는 친구 와이(Y)가 점심시간에 나를 찾았다. 와이와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서로를 안고, 함께 울음을 쏟아냈다. 위로란 그런 것이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감정을 공유하는 것, 그리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것. 타인에게서 전달된 체온은 내 감정을 터뜨리고, 또 수습하게 했다. 따뜻함의 무게를 느낀 나는 수시로 엄마를 안고, 엄마의 손을 잡는다. 엄마가 힘들어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나, 엄마를 돌본 뒤 집에 돌아갈 때, 또 함께 걸을 때, 나의 체온으로 엄마가 힘을 얻길 바란다.
울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이제 보호자로서 할 일을 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병원 알아보기다.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은 다발골수종 진료를 보는 의사가 한명뿐인데다, 의사 나이를 고려했을 때 경험 부족이 우려됐다. 서울 강남에 있는 병원 두곳에 소위 ‘다발골수종 권위자’로 꼽히는 의사들이 있었지만, 잦은 병원 진료와 갑작스러운 응급실행 등을 고려하면 집과 멀었다. 엄마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3차 병원의 의사를 찾았다. 그도 ‘권위자’로 꼽히는 이 중 하나였다.
문제는 병원을 옮기는 시점이었다. 당장 사흘 뒤부터 연이어 양전자 단층촬영(PET CT), 골수검사 등이 예정돼 있었다. 검사를 다 마친 뒤 옮기는 게 좋을지, 아니면 전원 뒤 검사를 받을지 결정해야 했다. 3차 병원은 예약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진단이 늦어지면 치료도 지연될까 걱정해서다. 포털 사이트 카페에 이런 내용을 올렸더니, ‘보호자 선배’들의 조언이 이어졌다. 덕분에 보호자 진료(환자 없이 보호자가 진료 보는 행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전원할 병원에 보호자 진료를 신청하고 하루 뒤 해당 병원 간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마다 골수검사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에, 골수검사 전 전원하는 게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진료 예약도 가까운 날짜로 잡을 수 있어, 검사 약물이 이미 도착해 취소할 수 없었던 양전자 단층촬영 검사만 받은 뒤 병원을 옮기기로 했다.
여동생 제이와 에이치(H)가 조카들을 데리고 번갈아 병원을 방문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실내 면회는 불가능했다. 실외에 배치된 보안요원들이 실외 접촉도 막고 있었다. 산책을 핑계로 건물 밖으로 나와 애들과는 10m가량 떨어져서 영상통화를 했다. 13개월짜리 손녀가 손뽀뽀를 날리자, 미간에 깊은 주름을 달고 휠체어에 앉아 있던 엄마가 그제야 웃었다.
지금이었다. 엄마에게 병명을 말해야 하는 시점이. 엄마의 컨디션과 분위기를 고려하면, 지금이 가장 심리적 타격이 적을 때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를 속일 생각은 없었다. 주변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면, 나도 환자에게 바로 말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진단명이 확정될 때까지 미룬 이유다. 간호사도 익숙한 듯 “환자에게 말할 때까지 비밀을 지켜드리겠다”며 고마운 공범이 돼줬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병실 침대 옆 서랍장에 ‘○○일 골수 검사’라고 적힌 메모가 붙어 있었다. 엄마가 언제든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게다가 며칠 뒤 전원도 해야 한다. 엄마에게 나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주려면, 최대한 담담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해야 했다. 쭈뼛거리지도, 머뭇거리지도 말자. 그리고 절대 울면서 말하지 말자.
“엄마, 아마도 암인 것 같아. 아직 확실하진 않은데, 다발골수종이라고 혈액암 일종이래.”
“….”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40년간 엄마를 봐왔는데 지금처럼 표정에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을 때가 없었다.
“최근엔 신약이 많이 개발돼서 예후가 좋대. 인터넷 찾아봤더니 10년째 잘 지내는 사람들도 있더라.” 예상 밖으로 담담한 엄마 반응에 당황해 말이 주절주절 나왔다.
“암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요동치는 속내를 딸에겐 드러내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미리 예상했던 내용이라 타격이 적은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저 엄마가 울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괜찮을 리 없기에 “괜찮냐”고 묻진 않았다.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해준 엄마가 고마울 뿐이었다.
휴가를 연장했다는 소식에 이모가 “고맙다”고 말한다. 민망한 마음에 “내 엄마, 내가 챙기는데 이모가 고마울 게 뭐가 있어”라고 되받아쳤다.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던 엄마가 또 “고맙다”고 말한다. 나는 “긴병에 효자 없다는데, 내가 한번 효자 해볼게” 호언하듯 말했다. 쉽게 지치지 않겠다는, 내게 하는 약속이다.
소소
갑작스레 ‘엄마 돌봄’을 하게 된 케이(K)-장녀가 고령화사회에서 청년이 겪는 부모 돌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