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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치열함과 결별 뒤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

등록 2023-05-21 08:00수정 2023-08-16 18:59

[한겨레S] 이병남의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
‘치·치·집’과 ‘느·조·심’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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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와 노화라는 새로운 현실을 맞닥뜨리면서 저는 몸과 마음 모두 힘든 2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근력 강화 훈련을 하면서 달라진 ‘지금 여기’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편안해졌지요. 무력감과 우울감에서도 조금씩 벗어났습니다.

노년의 ‘지금 여기’를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저는 ‘느·조·심’(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현직에 있던 50대까지 제 삶은 ‘치·치·집’(치열하고 치밀하고 집요하게)이었습니다. 그러나 60대가 된 뒤 제 삶은 달라져야 했습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나 당위, 머리를 굴려서 만든 관념적인 지향도 아니었습니다. 은퇴와 노화에서 오는 어색함과 불편함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면서 이전의 삶과는 ‘결별’해야겠다는 자연스러운 생각이었습니다.

젊었을 땐 목표를 달성하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기 위해 치열하고 치밀하게 일해야 했습니다. 집요함도 필요했습니다. 온 마음을 쏟아서 일에 집중하고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고려하면서 전략적으로 접근했습니다.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라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1만시간의 법칙’은 집요함의 정수입니다. ‘치·치·집’은 학교나 직장 그리고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습니다.

현직 때만 필요한 치열함과 집요함

그렇게 ‘치·치·집’으로 21년 동안 회사에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당시에 선진적인 미국과 유럽의 다국적 기업들의 사례를 심도 있게 공부하고 우리만의 지배구조와 평가보상제도, 리더십 교육프로그램 등을 만들었지요. 새로운 아이디어로 제안하고 추구하고 또 성취했습니다. 제가 해놓은 일들에 대해 후배들이 고마움을 표시할 땐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모든 것들을 모두 제가 한 것이었을까요. 때를 잘 만나서, 또는 상사·동료·후배 등 좋은 사람들 덕분에 된 일은 아니었을까요.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 여러 차례 힘든 고비가 있었습니다. 승승장구란 없지요. 때론 행운으로, 때론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고비를 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치·치·집’은 성공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니까요. 사실 제 실력이나 능력이란 것도 제 노력만으로 얻어지는 건 아닙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타고난 부분도 있고, 부모님과 가족의 힘도 컸지요.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 성취를 이룬 청년의 시기가 지나갔다고 해서 아쉬워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참 편안하고 자유로워졌습니다.

활동성의 극치인 여름을 지나 가을과 겨울로 여겨지는 은퇴와 노화의 계절로 접어들면 삶의 모드가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계절이 바뀌면 몸속 호르몬의 분비도 변하기 때문이지요. 은퇴란 내가 더 이상 현실적인 성취를 위해서 과거처럼 ‘치·치·집’으로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입니다. 우선 내 신체적 조건이 달라졌습니다. 전과 같이 빨리 움직였다가는 다칩니다. 느려짐은 당연한 변화입니다. 게을러지는 게 아닙니다. 느려져도 괜찮습니다. 느려짐을 받아들이고 느려짐 속에서 즐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분석적 사고력과 집중력도 이제는 전과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둔해지는 건 아닙니다. 통합적 사고력은 오히려 더 커지고 깊어지기도 합니다.

현직에 있을 때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로 출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도착 다음날 아침, 호텔방에서 창을 여니 높은 톤의 남성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시내 전체에 울려 퍼졌습니다. 호텔에 물어보니 하루에 5번 육성으로 예배를 알리는 것(아잔)이랍니다. 처음엔 너무 강한 소리라서 귀에 거슬렸습니다. 그런데 계속 듣다 보니 달랐습니다. 아잔 소리는 출장 기간 내내 점점 더 익숙해지고 반갑고 평화롭게 느껴졌습니다. 고 틱낫한 스님이 만든 프랑스의 영성공동체인 플럼빌리지에서는 하루에 몇차례 종을 치면 모든 사람들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그 종소리에 마음을 집중한다고 합니다. 한국 산사에서도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하기 전 범종이 울리면 모두가 그 소리에 마음을 모읍니다. 천주교에서는 하루에 세번 종을 치면서 삼종기도를 드립니다. 이렇게 인류의 오래된 종교 전통에서는 일상에서 밖으로 치닫던 마음을 잠시 안으로 돌리는 시간을 갖습니다. 고요함과 정적 속에서 나의 본래 모습과 함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생명의 근원적 에너지 소스에 접속해 충전하려는 노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은퇴 뒤 느려짐 당연…소중한 사람과 관계에 집중

나를 들뜨게 하고 의욕을 돋우던 바깥의 요란함과 북적거림이 이제는 나를 지치게 만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남의 좋은 평가로 마음이 흥분되는 것도, 나를 칭송하는 박수 세례도 불편함과 소음으로 여겨지지요. 그래서 조용함을 선호하게 됩니다. 고요함 속에서 얻게 되는 평화로움과 지혜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과거와 같이 나를 흥분시키고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는 외부의 자극들을 좇아 바쁘게 지내기보다는 심심하게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됐습니다. ‘일 없음’(무사함)이 가장 좋다고 느껴지게 됩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는 평범한 상태가 가장 좋다고 여겨지게 됩니다. 달콤하고 자극적인 디저트보다 숭늉 한 그릇이 더 좋아지기도 합니다. 또 심심하다는 것은 마음 심(心) 자 두개, 즉 마음과 마음의 물길이 열리고 또 섞이면서 행복해지는 것이지요. 외양적이고 사회적인 성취보다는 내게 소중한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것 또한 심심하게 지내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퇴 뒤 ‘느·조·심’ 하는 노년의 삶에서는 쓸쓸함과 무력함이 아닌 또 다른 의미에서의 ‘치·치·집’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 대상과 내용이 달라집니다. 젊고 현직에 있을 때와는 달리 현실적 성취(doing)와 인정욕구에 대한 집착은 줄어들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확인하고 그 관계 속에서 상호 스며듦을 통해 행복해지고자 하는 ‘치·치·집’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와 같이 돈, 권력, 지위, 명예라는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성취와 인정을 통해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치·치·집’과는 다르지요. 지금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나 자신의 ‘존재 그 자체’(being)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면서 ‘느·조·심’ 속에서 작동하는 또 다른 모습의 ‘치·치·집’, 그건 집착하지 않는 노력이란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지내는 저를 보면서 친구는 ‘노성백’(노화 속에 성장하는 백수)이라고 부릅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게 집요하게 사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 은퇴 뒤 삶의 방향은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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