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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부모라는 ‘안전벙커’, 아이 잘못엔 눈물 쏙 빼는 ‘적당한 좌절’을

등록 2023-08-05 11:00수정 2023-08-05 12:37

[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
부모의 선물 ‘적당한 좌절’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30대 남성 영중(가명)씨는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갔지만 1년도 안 돼 퇴사했습니다. 다른 회사로 옮겼지만 역시 오래 근무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직장에 입사할 때마다 ‘오래 못 버티지 않을까’ 하는 걱정부터 했습니다. 입사 뒤 상사나 동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두고 싶어졌습니다. 조금 버티다가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거지? 이렇게 지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회의감이 들었고 결국 그는 세번의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고 난 뒤 음식점을 차렸습니다.

세번의 입사·퇴사 뒤 ‘사장님’ 됐지만

영중씨는 음식점을 개업하기 전 다른 사람들의 에스엔에스(SNS)에 올라온 사진들을 참고했습니다. 내부 인테리어를 예쁘게 했고 음식 사진을 찍어서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처음에는 음식점에 손님이 꽤 몰렸습니다. 회사에 다닐 때 월급보다 몇배가 되는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영중씨는 ‘내가 계속 회사에 있었다면 얼마나 큰 손해였을까? 지금처럼 잘되면 앞으로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고급 승용차와 명품 옷을 사고 에스엔에스에 올려 자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멋있다고 댓글을 달고 ‘좋아요’를 누르자 더욱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중씨 음식점 맞은편에 같은 업종으로 대형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곳에 손님이 몰리면서 영중씨의 음식점은 점점 손님이 줄어들어 가게 월세를 내기도 어려울 정도가 됐습니다. 영중씨는 그 레스토랑에 들어갔습니다. 규모가 컸고 종업원들도 세련되고 음식도 맛있어서 영중씨의 음식점으로는 도저히 경쟁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풀이 죽은 채 그 레스토랑에서 나왔습니다. 영중씨는 이 음식점을 다시 접고 싶었지만 투자한 돈이 있어서 그만둘 수도 없었습니다.

영중씨는 부모님을 찾아가 ‘사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자금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노후자금으로 모아뒀던 모든 돈을 영중씨에게 빌려줬습니다. 하지만 가게는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했고 부모님에게서 받아 온 돈도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영중씨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술만 마셨고 결국 음식점 문을 닫았습니다. 영중씨는 부모님 집에 의탁하다 우울한 기분에 빠져서 인근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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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 내 부모와 달라

외아들인 영중씨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큰 관심 아래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영중씨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줬습니다. ‘우리 아들이 기죽지 않게 하는 것’이 영중씨 부모님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영중씨는 어릴 때부터 형편에 맞지 않는 명품을 걸치고 다녔고, 부모님께 야단을 맞아본 적도 없었습니다. 친구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고 이르면, 부모님이 대신 나서서 싸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영중씨를 조금씩 멀리하게 됐고 영중씨는 결국 혼자서 지내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대학 생활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고민이 많았고 여러 차례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학교를 오래 다녔습니다. 중간에 다시 수능 공부를 하기도 하고 편입 준비를 하기도 했지만 성과는 없었습니다. 같은 과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수업을 듣고 집에 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검사 결과 영중씨는 심각한 우울증 증상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많은 것으로 나왔습니다. 타인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듣기 싫은 말을 하면 몹시 견디기 힘들어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바가 즉시 이뤄지지 않으면 화가 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에 잘 맞춰주지 않을 때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네가 뭔데 나한테 뭐라고 그래? 우리 부모님도 나에게 그런 적이 없었는데.”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영중씨의 부모님과는 다르게 특별한 대접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안전기지’는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존 볼비가 제시한 이론입니다. 안전기지란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으며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애착을 통해 형성되는데, 애착이란 강하고 지속적인 유대감을 말합니다. 가정과 부모가 대표적인 안전기지입니다. 그러나 안전기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들어주고 공감해준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영중씨의 부모님은 안전기지의 역할을 해줬지만, ‘적당한 좌절’의 경험을 봉쇄했습니다. 아이는 ‘적당한 좌절’을 경험하고 견디면서 마음의 맷집을 기릅니다. 적당한 좌절과 안전기지의 형성 모두 자존감 형성에 매우 중요합니다.

어린 시절 큰 잘못을 했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줬을 때 눈물이 나도록 혼나는 경험도 인생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때 자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분명히 알려주고 혼을 내야 자녀에게 ‘적당한 좌절’이 될 수 있습니다. 혼을 내는 사람에게는 일관된 원칙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감정을 배제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자녀는 ‘앞으로 이런 잘못을 다시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부모가 노후자금을 자식에게 모두 내어주는 것도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남의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좌절과 인내가 필요한 일인지를 알려주는 것 또한 진정으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영중씨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으면서 삶의 의욕이 생기고 미래를 부정적으로 대하는 태도도 줄어들었습니다. 자신의 문제점을 말해주는 사람들이 ‘좋은 선생님’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뒤 장사가 잘되는 음식점에 직원으로 취직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며 어떻게 하면 음식점 운영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 하나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가게 되었습니다. 가끔 음식점 사장님께 지적을 당하기도 하지만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견뎠고 ‘마음의 맷집’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동료들과 어울리면서 힘든 일이 있으면 나누고 협력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번 돈으로 부모님께 빌린 자금도 모두 갚았습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책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를 썼습니다. 글에 나오는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경우를 통합해서 만들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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