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12일 가자지구의 알시파병원에서 미숙아로 태어난 팔레스타인 아기들이 한 침대 안에 누워 있다. AP 연합뉴스
지구 반대편에서의 전쟁. 그로 인해 죽는 생명들이 있다.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내 숨이 멎었다. 세 평 남짓 되는 공간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초음파 기구로 보이는 의료기기가, 그 옆에는 의료장갑을 낀 의료종사자가 망연히 서 있다. 바닥에 누워 있는 신생아 그리고 그 아기를 둘러싼 의료진과 가족.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금 태어난 아기라는 것을.
의료진 뒤로 산모로 보이는 여자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역시 다친 것으로 보이는 그의 옆에 갓난아기가 누워 있었다.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감싼 의료진 손만이 보였다. 입으로 코로 산소와 압력을 넣어 아기에게 숨을 불어넣으려는 노력만이 보였다. 그렇게 불어넣은 숨은 떠나가는 생명도 다시 아기 몸으로 불어넣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기의 작은 손을 꼭 잡은 아빠로 보이는 사내도 보였다.
■ 바닥에서 심폐소생술을 시도한 아기는 살았을까
보통 병원이라면 아기를 ‘방사보온기’ 위에 안착시키고 의료진은 서서 심폐소생술을 시도한다. 전시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병원에서 방사보온기는 사치였다. 바닥에 눕힌 아기를 살리려 노력하는 의료진과 함께 누워 있는 산모 그리고 옆에 무릎 꿇은 아빠. 누구도 겪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전쟁 한복판의 병원 전경이었다. 간절한 아빠의 손이 닿아 그 아기는 살았을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가자지구의 사정이라면 살았더라도 이미 저물었거나 곧 저물어갈 생명이 되리라.
최근 보도된 자료에 따르면 가자지구의 가장 큰 병원, 알시파병원에서는 전력과 의료자원 부족으로 벌써 미숙아 6명을 포함한 환자 20명이 사망했다. 신생아중환자실 아기는 대부분 미숙아라 체온조절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주는 인큐베이터 안에서만 안정적으로 클 수 있다.
또 호흡이 불안하면 산소요법이나 기도 삽관으로 호흡을 돕는다. 인큐베이터를 쓸 전력도 없다면 인공호흡기나 산소탱크는 충분히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 차가운 병원 바닥에 누워 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아기가 살았더라도 이제 살 수 없는 병원에 남겨진 것이다.
여러 매체를 통해 세상에 퍼진 사진 속에서는 신생아중환자실 아기들이 한 침대에 누워 분유나 모유를 공급받는 듯했다. 초록색 천으로 아기들을 감싸고 그 위로 하얀 테이프를 둘러놓았는데 온도조절이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여러 아기가 코로 산소나 압력을 넣어주는 호흡치료를 받는 것처럼 보였다. 곧 산소도 바닥나고 전력도 아예 공급되지 않는다면 인공호흡기나 인큐베이터 같은 의료기기는 아예 쓸 수 없게 된다. 쉽게 말해 일찍 태어나 체온조절이 되지 않고 자가호흡이 되지 않는 아기는 죽을 것이다. 아기뿐만이 아니다. 인공호흡기가 필요한 중환자실 환자는 모두 죽게 된다. 신장 투석을 받거나 생을 유지하는 의료기기를 쓰는 환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
■ 어린 소년이 나르는 더 어리고 작은 아기
대부분의 병원에는 전기를 쓰는 의료기기가 필수다. 전기가 나갈 수도 있으니 큰 병원은 자가로 전기를 만드는 응급 발전기를 구비해둔다. 하지만 허리케인으로 홍수가 난 지역에서는 지하실에 있는 응급 발전기가 무용지물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병원이나 응급상황에 대비하고 연습도 한다. 신생아중환자실에서는 응급상황 시 간호사가 두 개의 큰 주머니가 든 앞치마를 맨다. 그 주머니 안으로 작은 미숙아 둘을 넣고 계단으로 탈출할 수 있다. 인공호흡기를 달았거나 많은 산소와 공기가 필요한 아기는 어떨까. 과감하게 포기하거나 둘이 한 조로 한 아기를 맡을 수 있다. 그러면 기계를 대신해 손으로 산소와 압력을 넣어줄 수 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세상에 뿌려진 알시파병원에서 찍힌 비디오가 있다. 의료진과 가족이 신생아중환자실 아기들을 품에 안거나 손과 팔 위에 얹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생경한 모습이었다. 여러 사람이 줄지어 아기를 나르는 모습. 얼핏 봐도 의료지식이라고는 없는 사람도 아기를 안아 옮기고 있었다.
아기 얼굴이 하얀 솜 같은 것으로 덮였다. 추위를 막으려 노력한 것이었겠지만, 아기는 호흡이 어려울 수도 있다. 급박하게 아기를 옮기는 사람 중 한 명은 키가 작은 십 대 소년이었다. 아마 그 아기와 피를 나눈 형제일 것이다. 어린 소년이 더 어리고 작은 아기를 나르는 모습에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왠지 아기들보다 그 소년의 사연이 더 절실할 것 같아서, 작은 몸으로 자기보다 작은 아기를 구하는 용기가 가상해서 소년을 안아주고만 싶었다. 어린 소년에게 뛰어놀 운동장과 찰 공을 마련해주지 못한 어른이라 미안함도 커져만 갔다.
■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될 수 있는가
옮겨진 아기들이 한 병상에 누워 우는 영상도 봤다. 우렁찬 울음소리가 병원 곳곳을 쩌렁쩌렁 울렸다. 크게 울 정도로 건강하니 조금 안심되려다가도 그렇게 울지 못하는 아기들은 이미 죽은 것만 같아서 슬픔이 밀려왔다. 미숙아는 호흡이 안정되기 전까지 코를 통해 산소나 압력을 넣어준다. 현시점, 병원에는 그런 장비가 없거나 쓸 여건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감히 예상하건대 심하게 아픈 아기나 어른은 다 죽었으리라.
저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나는 지구촌 세계시민으로서 자격이나 있는가. 저 아기들의 얼굴이 내 아기들, 또 나와 피를 나눈 자들의 아기 얼굴과 겹쳐 보이지 않는다면 난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 수 있는가. 저 아기들이 계속 우렁찬 소리로 세계를 울리기를, 언젠가 세상을 뒤흔들 큰 사람으로 자랐으면 소원이 없겠다. 비록 전력이 없더라도 아기들이 서로의 체온으로, 또 의료진의 체온으로 그 온기를 이어갔으면 좋겠다. 우리도 그 온기를 더해줄 목소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스텔라 황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병원 소아과 신생아분과 교수·<사랑은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다> 저자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손바닥만 한 초미숙아부터 만삭아까지 돌보는 스텔라 황 교수가 어린 생명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3주마다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