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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약탕기+오선지 ‘덩더꿍 처방’

등록 2006-07-04 18:28수정 2006-07-05 14:15

“자 따라 해 보세요. ‘더어엉 덕 더 쿵 덕’” 이승현(43) 경희동서신의학병원 한방음악치료센터장이 한 환자에게 장구로 질병 치료에 도움이 되는 장단을 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자 따라 해 보세요. ‘더어엉 덕 더 쿵 덕’” 이승현(43) 경희동서신의학병원 한방음악치료센터장이 한 환자에게 장구로 질병 치료에 도움이 되는 장단을 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세계 첫 개원 경희대 한방음악치료센터
오선지에 걸쳐 있는 주전자 형태의 전통 약탕기에서 다양한 음표들이 수증기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겠습니까?

쉽지는 않을 겁니다. 한약재를 넣어 끓는 물에 우려내는 약탕기가 도대체 오선지와 무슨 관련이 있기에. 약탕기에서 한약냄새 짙게 풍기는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게 아니라 4분음표, 8분음표 같은 것들이 나온다는 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지 … .

상상력의 빈곤을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양교육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별개로 존재해 온 약탕기와 오선지의 연관성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여기서 힌트 하나 드리겠습니다. 약탕기는 한방을 뜻하고, 오선지는 음악을 뜻합니다. 곧 한방과 음악이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방의 원리는 목화토금수(木火土水)의 오행을 기본으로 한약, 침, 뜸 등을 이용해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있습니다. 음악을 질병 치료에 이용할 때 그 원리도 이와 통한다는 겁니다. 음악도 한의학적인 원리에서 보면 목화토금수 차례로 상응하는 각치궁상우(角徵宮商羽)의 다섯음(오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서울 강동구 상일동에서 문을 연 경희동서신의학병원 4층의 ‘한방음악치료센터’(센터장 이승현 경희대 교육대학원 한방음악치료전문교육자과정 주임교수)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최초로 한방의 오행 원리를 음악치료에 접목한 곳입니다.

센터 입구 벽에는 글머리에 상상해볼 것을 권유한 상징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여러가지 음표를 피워 올리는 약탕기가 오선지 오른쪽에서 중앙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앙증맞게 자리잡고 있지요. 오선지에는 한방음악치료의 영문 약자(OMMT: Oriental Medicine Music Therapy)가 새겨져 있습니다.

센터는 환자 상담실과 입원환자 치료실, 외래환자 치료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방음 설비를 갖춘 치료실에는 장구·북·소고·꽹과리·징 등 국악기와 피아노·마라카스·우드블록·차임벨 등 서양악기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한방음악치료는 1회 40분씩 모두 10회를 받아야 합니다. 주된 치료 내용은 환자가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것입니다. 물론 음악에 문외한이라도 한방음악치료사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이승현 센터장은 첫 치료에 앞서 치료 방향을 결정합니다. 환자를 의뢰한 곳의 진료기록부를 토대로 환자와 상담을 벌여 질병 치료에 적합한 장단·가락·음색 등으로 구성된 한방음악치료법을 처방하는 겁니다.


센터는 지난달 26일부터 병원의 다른 진료과에서 의뢰한 환자를 대상으로 하루에 서너명씩 한방음악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고창남 경희대 한의대 교수는 “중풍 환자들은 뇌의 손상만큼이나 우울증을 겪는다”며 “중풍 환자 서너명을 센터에 의뢰해 보니 굉장히 만족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방음악치료는 기존 한방치료의 보조수단이기 때문에 센터는 환자를 독자적으로 받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음악의 힘은 위대합니다. 언젠가는 한방음악치료가 한약 또는 침 치료와 대등하게 취급되는 그런 날이 올 것입니다.

한방음악치료는 국악기뿐만 아니라 피아노 같은 서양악기도 사용한다. 피아노를 전혀 못 치는 사람일지라도 커다란 악보에 그려져 있는 형형색색의 음표와 똑같은 색깔의 피아노 건반을 따라 치기만 하면 된다.
한방음악치료는 국악기뿐만 아니라 피아노 같은 서양악기도 사용한다. 피아노를 전혀 못 치는 사람일지라도 커다란 악보에 그려져 있는 형형색색의 음표와 똑같은 색깔의 피아노 건반을 따라 치기만 하면 된다.

한방음악치료 개발 이승현 교수
오행원리 맞춤음악으로 오장육부 조율

한방음악치료라는 새 영역을 개척한 이승현(43) 경희대 교육대학원 교수 겸 경희동서신의학병원 한방음악치료센터장은 이화여대 음대를 나와 경희대 한의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색 경력을 갖고 있다.

“학부 때부터 국악에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음악과 한의학이 밀접하다는 사실은 지난 1990년에 석사 학위논문을 쓸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됐지요. 음악과는 전혀 관련 없는 한의학 책에서 국악의 오음 음계인 ‘궁상각치우’를 언급한 것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석사논문을 쓰기 위해 서양의 음계와 전통음악의 오음 음계 자료를 정리하던 중 한의학의 최고 이론서로 동양사상의 원류를 형성해온 〈황제내경〉을 만난 것이다. 이 책은 음양오행의 원리를 설파하면서 오행의 목화토금수가 그 순서에 따라 오음의 각치궁상우, 오장의 간심비폐신(肝心臂肺腎) 등과 상응하고 있음을 밝혀 놓았다. 예를 들어 황제가 그의 신하인 기백에게 외부 환경과 인체의 오장육부가 서로 대응하는 관계를 물었을 때 기백은 “바람은 목기(木氣)를 자양할 수 있고, 목기는 신맛을 내고, 신맛은 간을 기르고 … 목기가 변화하면 … 오음 음계 중에서는 각이 되고 … .”라고 설명했다.

음대 다닐 때 한의학 원리 깨닫고, ‘각궁상우’ 해답 찾아내려 한의대로…
임상시험 통해 교과 확인, 듣기만 하는 서양음악치료와 달리 환자가 직접 연주 몸·마음 자유

이런 오행 원리는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는 삼육대 음대 강사로 일하던 90년대 중반 서양의 음악치료법을 배우면서 그 한계를 느끼는 계기로 작용했다.

“서양 음악치료는 단지 좋은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치료 대상자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치료 대상자도 자폐아, 발달장애아, 약물중독자 등 사회적 부적응자에 국한되어 있어요. 하지만 자폐아만 해도 아주 다양합니다. 도통 말을 하지 않지만 학업능력이 뛰어나거나, 말은 하지만 인지능력이 부족하거나, 인지능력은 있지만 사회생활이 어려운 사례도 있지요. 자폐아의 상태에 따라 음악치료의 내용도 달라져야 하는 거구요. 하지만 서양 음악치료법으로는 맞춤음악 치료가 불가능하고, 중풍과 같은 신체적 질병도 치료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때 그는 돌파구를 찾고자 경희대 한의대를 찾아가 박찬국 교수(현재 함소아의학연구소 소장)에게 한의학에서는 〈황제내경〉에서 거론된 오음이 어떻게 쓰이는지, 음악치료 개념은 있는지 등을 물었다.

당시 박 교수는 자신도 경희한의대 예과 2학년 때 오음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서울대 음대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음악적 해석을 얻지 못했던 과거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당돌한 음대 강사에게 한방음악치료에 대한 논문을 써 볼 것을 권했다.

“주말마다 한의대생들과 어울려 종일 공부를 했습니다. 음악의 중요성을 논한 맹자, 논어, 대학 같은 유교 경전까지 읽었지요. 99년 정식으로 한의대 연구조교 발령을 받은 뒤에는 한의대 수업을 들으면서 한방과 음악치료의 연계점을 찾는 공부에 전념했어요.”

그는 마침내 2003년 2월 ‘오행으로 분류한 음악이 누에의 형질변화에 미치는 영향-한방음악치료를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한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농촌진흥청의 협조를 받아 6개의 실험세트를 마련한 뒤, 5개 세트에는 목화토금수의 오행으로 나눈 음악을 틀어주고, 나머지 1개 세트에는 아무런 음악도 들려주지 않은 결과 누에의 형질변화가 세트별로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목의 기운에 해당하는 각음이 담긴 음악을 틀어준 세트에서는 누에의 알이 9일 만에 가장 먼저 알껍질을 깨고 부화했다. 나머지 실험세트에서는 11일 만에 부화했다. 용출력이 강한 속성을 지닌 목 기운이 딱딱한 겉 표면을 깨고 곧게 뻗어나가도록 한 셈이다.

오행 음악별로 누에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는 사실은 사람한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질병 치료에도 응용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에 따라 그는 실제로 혈액암 환자와 중풍환자를 대상으로 오행 음악을 이용한 한방음악치료 임상시험을 했다. 한의사와 함께 공동작업을 통해 각각의 환자가 어떤 증상을 갖고 있는지, 음·양·허·실 등의 병증을 분별하는 변증(辨證)을 해낸 뒤 해당 증상 치료에 적합한 음악을 들려주고 직접 연주하게 했다. 그 결과 오행음악 치료를 받은 혈액암 환자군에서는 백혈구 수가 치료받기 전보다 증가했고, 면역 수치를 말하는 절대호중구수도 커졌다. 중풍 환자들도 특수진단 장비로 뇌사진을 찍어 오행음악 치료군과 그렇지 않은 대조군을 비교해본 결과 치료군에서 뇌경색 부위의 뇌혈류가 유의미하게 호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런 임상 결과를 토대로 비허보기음악요법, 칠정치료음악요법, 오행리듬요법, 구음요법, 오행음악감상요법 등 모두 17가지 음악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었고, 최근에는 마침내 세계 최초의 한방음악치료센터를 탄생시켰다.

“공자는 ‘시로 흥하고, 예로 서고, 음악으로 이룬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란 말로 음악의 중요성을 일깨웠습니다. 한방음악치료센터는 이토록 중요한 음악을 오행원리에 따라 환자별로 맞춤음악으로 처방함으로써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까지 치료하기 위해 닻을 올렸습니다.”

경희동서신의학병원 한방음악치료센터의 치료실 한쪽에는 징, 마라카스, 우드블록 등 장단과 리듬을 구현해낼 수 있는 동·서양의 타악기들이 준비되어 있다.
경희동서신의학병원 한방음악치료센터의 치료실 한쪽에는 징, 마라카스, 우드블록 등 장단과 리듬을 구현해낼 수 있는 동·서양의 타악기들이 준비되어 있다.

“세마치 장단 따라 응어리 뱉으니 편안”
한 중풍환자의 체험

2년 전에 중풍 치료를 받은 정남수(가명·49)씨는 최근 두통이 생기고, 오른쪽 손끝이 저려오는 증상이 나타나 경희동서신의학병원 한방음악치료센터에서 치료를 받기로 했다. 센터장인 이승현 박사는 정씨와 상담을 통해 꿈을 많이 꿔 잠이 부족하고, 소변을 찔끔찔끔 자주 보는 증상을 추가로 확인했다.

이 박사는 정씨가 병에 대한 염려증과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고, 기혈순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감각신경 마비증세가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하고 오행 가라앉히는 효과가 뛰어난 수기(水氣)를 위주로 한 처방을 내렸다.

정씨는 치료실로 이동해 한방음악치료사의 지도에 따라 5분간 복식호흡법을 배운 뒤, 10분간 ‘덩~덩덕쿵덕’ 세마치 장단을 입으로 따라하고 장구로 치면서 속에 있는 응어리를 발산했다. 이어 5분간 맑은 소리를 내는 차임벨 연주를 한 뒤, 20분간 장구를 이용해 북편으로 ‘쿵’ 치고 4박자 동안 가만히 있는 방법으로 수기 리듬을 직접 연주한 그는 수기 음악을 감상하면서 모두 40분의 첫번째 한방음악치료를 체험했다.

정씨는 “한방음악치료를 받아보기는 처음이라 낯설지만 치료를 받고 나니 몸이 무척 편안하다는 느낌이 든다”며 “처방대로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 건강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글 안영진 기자 youngjin@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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