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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악마의 탈

등록 2013-09-06 19:41수정 2013-09-08 15:01

정민석 아주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
정민석 아주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
[토요판/몸] 정민석의 해부하다 생긴 일
어느 의과대학이든지 1년 선배가 후배한테 뼈를 가르치는 전통이 있다. 해부학 학기의 직전 방학에 모여서 뼈를 가르친다. 내가 속한 의과대학에서는 일주일 동안 가르치며, 학생은 해부학 실습실과 뼈를 제공받는다.

일주일 동안 선배는 호되게 가르친다. 날마다 밤새워 뼈를 외우게 한다. 방학에 미리 뼈를 외우면, 학기 중에 시신 해부를 잘할 수 있다. 또한 선배가 시키는 대로 하면, 해부학 선생이 시키는 공부도 이겨 낼 수 있다. 따라서 뼈를 가르칠 때에는 무섭지 않던 선배도 악마가 된다. 실제로 의과대학에서 1년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 꼴등인 선배도 일등인 후배를 얼마든지 꾸짖으면서 가르칠 수 있다.

가르치는 선배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후배와 친해지는 것이다. “가르칠 때에는 후배가 선배한테 어려워하고, 가르친 다음에는 고마워한다. 이것이 바람직한 선후배 관계이다.” 1년이 지나면 그 후배가 선배 자격으로 뼈를 가르친다. “1년 전에 내가 겪었던 것을 내 후배도 겪게 해야지. 선배의 사랑을 맛보게 해야지. 악마의 탈을 쓸 시간이다. 흐흐.”

의과대학 선후배는 졸업한 다음에 부속병원에서 전공의(레지던트) 선후배가 되기 쉽다. 전문의가 된 다음에도 동업자로서 평생 본다. 따라서 학생 때 좋은 선후배 관계를 맺으면 든든하다.

학기가 시작되면 해부학 실습실에서 동료 관계가 두터워진다. 시신을 꼼꼼하게 해부하는 것은 엄청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다. 따라서 학생끼리 서로 보살펴야 한다. 때로는 힘들어하는 동료를 위해서 대신 해부한다. 많은 구조를 외우려면 학생끼리 해부한 시신을 가리키면서 토론해야 한다. 공부가 모자란 동료를 위해서 개인교사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아끼고 돌보면 친해질 수밖에 없다.

친구와 함께 산에 갔다고 치자. 계곡에서 편하게 놀면 심심해져서 심술궂은 장난을 치게 되고, 그러다가 싸우기도 한다. 꼭대기까지 힘들게 오르면 서로 아끼고 돌보게 되고, 그러다가 더 친해진다. 마찬가지로 의과대학 학생은 모진 환경에서 더 친해진다.

학생끼리 친해지는 데 크게 이바지하는 사람이 나 같은 해부학 선생이다. 나는 학생을 칭찬하지 않고 꾸짖기만 한다. “학생이 중요한 구조를 찾지 않으면 소중한 시신을 헛되게 만든다. 따라서 꾸짖어야 한다. 꾸짖을 시간도 모자라는데 칭찬할 여유가 있겠는가?” 꾸짖는 명분이 맞건 틀리건, 나는 모든 학생의 적이다. 내가 없으면 학생은 입을 모아서 나를 욕하고, 그러다가 더 친해진다. 공동의 적이 있으면 뭉친다.

의과대학 학생은 졸업할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는데, 선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동료를 형제처럼 생각하겠노라.” 실제로 의사는 힘을 모아서 환자를 치료한다. 외과 의사가 수술하려면, 마취과 의사뿐 아니라 영상의학과 의사, 진단검사의학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의사가 동료를 형제 또는 자매처럼 생각하고 도우면 의사뿐 아니라 환자도 행복해진다. 이 동료 관계, 그리고 선후배 관계가 싹트는 곳이 바로 해부학 실습실이다.

실습실에서 같은 조의 학생끼리 언제나 사이가 좋을 수는 없다. 다음처럼 꾸짖기도 한다. “이 자식아! 네 탓에 우리 조의 해부가 엉망이잖아. 너 같은 놈은….” 꾸지람을 들은 동료도 거칠게 대꾸한다. “너 지금 뭐라고 말했어? 씩씩…” 꾸짖은 학생은 동료의 손에 들려 있는 해부 칼에 눈길이 간다. “진정해라. 이제부터 말조심하겠다.” 해부 칼 덕분에 학생은 동료를 존중하는 예절을 배우며, 이 예절은 의사가 된 다음에도 필요하다. 해부 칼이 널려 있는 실습실은 역시 좋은 배움터이다.

정민석 아주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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