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정신과의원에서 환자 보호자가 진료 접수를 하고 있다 김봉규 기자
“중증 정신질환자가 의사한테 피해망상을 갖게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지금도 몇몇 환자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진료실에 도끼를 가져온 환자도 있었다.”(대형종합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ㄱ)
“레지던트 시절에 (환자한테 맞아) 갈비뼈 두 군데가 부러진 적이 있다. 정신과 진료 현장이 의사와 환자 둘이 마주 앉는 비밀스러운 공간이다보니,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때가 종종 있다. 가끔씩은 두려울 때도 있다.”(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ㄴ)
“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한테 살해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그 환자가 다른 사고를 쳐서 교도소에 들어가는 바람에 위협이 현실화되진 않았다. 아픈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딜레마적인 상황이다.”(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ㄷ)
정신과 의사들이 조심스럽게 평소 겪었던 공포를 털어놓고 있다. 그동안 공개적으로 털어놓을 수 없던 두려운 마음이다.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진료 도중에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뒤에야, 이들은 입을 열었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일하는 ㄹ은 “폭력은 늘 겪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신과 의사치고 “안 맞아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거의 입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다.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 증상 때문에 그렇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처벌이 아니라 치료하면 해결될 문제다.”
임세원 교수 사건은 정신과 의사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겼다. 정신과 의사라면 누구에게나 닥칠 지 모를 일이라는 두려움도 물론 있겠지만, 그래도 의사가 환자를 믿고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게 해야 한다는, 의사로서의 소명의식과 괴로움이 크다. “모든 사람들이 정신질환자 입원 기준을 강화해서 오랫동안 (사회 밖으로) 못 나오게 해야한다고 이야기할 때 ‘그래도 그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정신과 의사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정신과 의사가 피해자가 됐으니…환자들이 마치 위험하고 범죄를 일으키는 집단으로 매도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한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전문의로 근무 중인 의사 ㅁ의 말이다.
임 교수의 동료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로 구성된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안전한 진료 환경’만이 아니라 ‘완전한 치료’를 강조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모든’ 정신질환자가 아니라 ‘치료받지 않은’ 정신질환자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임 교수와 함께 근무했던 전문의 ㅂ은 “정신과 의사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 강하게 이야기 안하려고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정신질환자가 문제’라는 여론으로 확 쏠릴 수 있기 때문”이라며 “퇴원한 중증 정신질환자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방치한 구조 자체를 국가가 해결해줘야 하는데, 환자들이 낙인 찍힐 것을 우려해 병원에 안 다니는 결과로 이어질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ㄱ 교수 역시 “치료받지 않은 중증 정신질환자가 위험한 건 사실이지만 치료를 잘 받으면 위험하지 않다. 결국 그들이 치료를 잘 받을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를 추모하는 그림. 한 의사가 그를 추모하며 그렸다.
3일 오전 보건복지부는 대한의사협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등 의료계 관계자들과 함께 대책회의를 열어, 안전한 진료 환경 구축을 위한 정책 대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복지부는 지난 2일 진료실 내 대피통로(후문), 비상벨, 보안요원 배치 등 정신과 진료 현장의 안전실태를 파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당사자인 정신과 의사들은 비상벨이나 대피통로 같은 안전장치에 대한 큰 기대가 없다. 대학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인 ㅅ은 “진료실에 비상벨이 설치돼있긴 하지만 오작동이 많아서 나중에는 둔감해지게 된다”며 “입원해야 한다고 환자에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나 증상이 악화된 위험한 시기에는 진료실에 보안요원을 미리 부르기도 하지만, 임세원 교수 사건처럼 오랜만에 외래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라서 사전에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막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큰 정신질환자를 경찰관과 의사의 동의를 받아 ‘응급입원’시키는 경우가 많은 서울시립은평병원과 같은 곳에는 비상벨, 대피통로, 보안요원 배치 등의 안전장치들이 대부분 이미 작동 중이다. 중증 정신질환자 비중이 높아, 의료진 폭행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탓이다. 하지만 서울시립은평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의사 ㄹ은 안전장치가 해법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환자가 더 나빠지기 전에 치료를 시작할 수 있고, 심해지면 입원시키는 시스템이 잘 돌아가야 이번 사고 같은 일이 방지된다. 그런데 돌아가던 시스템이 망가져서 이번 사건이 터진 게 아니다. 우리는 아예 공적인 시스템 자체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아무 것도 없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정신과 의사들이 충격과 두려움을 넘어, 참담한 슬픔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황예랑 박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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