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돌보는 독립잡지 <멜랑콜리아> 전인수 편집장이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자신이 겪는 고통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캐나다에는 자신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놓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문화 주간 ‘벨 레츠 토크’(Bell Let’s talk)라는 게 있다. 10년 전부터 해마다 열리는 이 행사에선 자신이 겪은 정신적 어려움에 대해 옆 사람과 스스럼없이 공유하는 것이 장려된다. 이런 문화가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전 국민이 ‘코로나 블루’라는 정신적 침체기를 겪는 요즘, 우울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한숨도 제대로 못 자고 새벽 2시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깨어나는 날의 반복입니다.”
지난달 6일 이탄희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고백’이란 제목의 긴 글을 올렸다. 그는 3년 전부터 앓아온 공황 증상을 털어놓았다. “정신의학적으로는 절대 안정을 취하고 우선은 일을 멈춰야 한다고 합니다. … 며칠 밤을 새우다가, 국민들께 제가 가진 육체적, 심리적 한계를 숨김없이 고백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새벽 세시에 자신의 건강 상태를 상세히 밝히며 쓴 장문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8200여명이 좋아요를 눌렀고 2400여개의 댓글이 달렸다. “적당히 상황을 모면하고 둘러대는 모습을 스스로 용납하기 어렵다. 국민들께서 양해해주신다면 온전히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 의원의 담담한 글에 사람들은 응원과 격려를 해주었다. 최근 이 의원은 16일 열린 21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는 등 호전된 모습을 보였다.
일상에서 느끼는 다양한 마음의 병은 지금껏 감춰야 할 문제로 생각되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자신의 내면 경험을 드러내고 건강하게 치유하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외국 유명 배우나 국내 유명 인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서점가에는 마음의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이를 다스리며 일상을 살아가는 에세이들이 나오고 있다. 인터넷에 자신의 경험이 담긴 우울증 일기를 쓰거나, 인스타그램에 공황장애를 주제 삼아 웹툰을 그려 올리는 것은 더 이상 거리낄 일이 아니다. 자신의 병과 증상을 알리고 건강하게 일상을 영위하는 ‘새 문화현상’이다.
우울한 기분이 이어지고 일상에서 2주일 이상 피로감, 식욕과 수면의 질 하락을 겪으면 우울증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울증은 1년간 우리나라 국민 61만명이 겪는다고 정부는 추정한다. 강박이나 공황, 트라우마 등 일상에서 다양한 형태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불안장애도 1년간 국민 224만명이 경험한다고 추정한다. 우리나라 국민 네 명 가운데 한 명(25.4%)은 평생 한번 이상 정신건강 문제를 겪는다.(2016 정신질환 실태조사) 전 국민이 ‘코로나 블루’라는 정신적 침체기를 겪는 요즘, 마음 건강을 살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되었다.
조현병이 있지만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한마음의 집’ 사람들이 풋살 유튜브를 찍는 모습(왼쪽),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갖고 배달 일을 하며 우울증에 관한 독립잡지 <멜랑콜리아>를 만드는 전인수씨의 모습. 사진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인생의 주제가 된 나의 우울증
심리치유 독립잡지 <멜랑콜리아>를 만드는 전인수(34) 편집장은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자신이 우울증인지 아닌지, 어떤 병을 갖고 있는지 모르고 고민하며 헤매는 사람에게 의학적 진단 기준은 어쩌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의 경험이나 살아 있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자각할 수도 있다.
1인 출판으로 1년에 두 차례 독립잡지를 내는 전인수씨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저 단순히 성격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대학 때부터 우울증을 겪었는데, 병원에 다녀도 크게 나아지는 점이 없었다. 그러다 군대에서 트라우마적 상황을 겪게 되었고 사회불안장애까지 더해졌다. 다시 병원을 다니며 여러 가지 약을 먹어보던 중 성인 에이디에이치디(ADHD: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약이 본인과 가장 맞는다는 걸 알게 됐다. 집중력이 부족해 항상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자신의 모습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지난 2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전 편집장은 “제 증상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받는 데 10여년이 걸렸다”며 “너무 긴 시간을 돌아왔다”고 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외로움과 자책의 시간을 겪었던 전씨는 지금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잠깐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위로를 전해주고 싶었다. 어떤 병리학적 정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와 실질적인 정보를 전달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긴 방황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2018년부터 홀로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2년간 잡지사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6개월에 한번 나오는 책을 낸 것이다. 전씨는 “무엇보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고 했다.
전씨는 지난해 두 권의 잡지에 이어 올해 세 권째를 준비 중이다. 한번 출간할 때 1천부를 찍는 이 잡지엔 우울증, 공황장애, 식이장애, 기면증, 성인 에이디에이치디 등 다양한 증상을 겪는 이들의 에세이와 손그림, 사진들이 실린다. “How to share sadness.”
잡지 맨 첫 장에 쓰인 문장처럼 ‘슬픔의 공유’는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되고 있다. 지난해 2호을 내기 위해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잡지 발행 비용을 모금하자 165만원이 모였지만 부족하다. 전씨는 매일 낮 서너시간씩 자신의 오토바이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해 생활비와 잡지 만드는 비용을 벌고 있다. 낮에는 배달, 저녁에는 1인 출판. 이제 전씨에게 우울증은 다스려야 할 병이자 인생의 주제가 되었다. 다음은 전씨와의 일문일답.
―본인의 정신적 어려움에 대해 공개적인 글을 쓰는 것, 결심하기 어렵지 않았나요?
“더 이상 잃을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증상을 공개하는 분위기가 요즘 흔해졌고, 제가 증상을 겪는다는 게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죠. 그보다는 적절한 참고 문헌이 부족해 항상 고민하면서 작업해야 했고 제가 만들고 있는 책의 만듦새가 부족하지는 않을까 하는 부분에서 늘 걱정했습니다. 좋은 기고자, 인터뷰이를 만날 수 있어 계속할 수 있었죠.”
―자신의 내면 경험을 공유하는 에세이, 웹툰, 유튜브 영상물들, 왜 지금 많이 나올까요?
“점차 사회가 경쟁적이고 치열해지면서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좀처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개개인의 자유로운 이야기들을 펼칠 수 있는 플랫폼 환경이 만들어진 것도 한몫했죠.”
―마음 건강에 관한 잡지를 만드는 생활에서 겪는 즐거움과 보람이 있다면요?
“저만큼 혹은 저보다 더 힘든 일을 겪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 큰 의미죠. 인생을 흔들어 놓을 정도의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지금 앞에 있는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려 하고, 더 배려하려 해요. 그들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어서 일하면서 편안함을 느끼고 연대감을 느꼈습니다. 그 감정이 저를 좀 낫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사회불안장애와 함께 2년간의 직장생활을 하던 때 겪었던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
“기업 시이오(CEO)들을 취재하는 잡지사에서 일했는데, 당시에도 사람을 만날 때 상당한 불편함을 느꼈어요. 물론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구나 알게 되기도 했죠. 인력 부족으로 홈페이지 관리 등 많은 일을 해야 했는데 그게 지금 편집장으로서 잡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일하다 보니 그냥 내가 잡지를 만들어도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웃음)
―한국의 일반적인 직장 문화에서 자신이 우울, 공황, 강박 등을 겪고 있다고 직장에 말해도 될까요?
“회사 분위기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론 아직까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가벼운 우울 정도는 공개할 수 있죠. 심각한 증상이라고 해도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보통 질환은 약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를 해도 질환을 공개하면 ‘쟤, 정신질환이 있어서 그래’라며 표적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결국 공개 자체로 상처받지 않을 수는 있지만 2차적으로 어려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이탄희 의원이 자신의 공황장애 증상을 밝혔는데요. 자신의 정신건강 상태를 알리고 사회생활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가장 이상적인 공개 방식이 아닐까요. 자신이 원하는 때, 원하는 방식으로 질환을 공개했고 사람들도 공감과 응원으로 응답했죠. 정신질환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의 모습 중 일부이기도 합니다. 매체에서 사건이나 이벤트로 가볍게 다뤄지는 것보다 일상을 영위하면서 병을 다스리고 살아가는 사례들이 많아질수록 사회 변화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 어느 정도 심하다고 보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리적 진단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우울하지만 우울증은 아니어야 하고, 활발하지만 조증은 아니어야 하며, 마르고 예뻐야 하지만 식이장애가 있으면 안 됩니다. 정신질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거부감이 큰 것 같습니다.”
―이 잡지가 추구하는 게 있다면요?
“모든 사람의 우울은 모두 다른 색깔이고, 약물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개선 방법을 개발하고 발견해야 합니다. 환자 개인의 의지가 매우 중요한데 지금까지 정신질환은 사회적으로 음성화돼 있었기 때문에 수동적 치료 과정만 제시됐습니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편하게 볼 수 있고 빠르게 자신의 삶에 적용해 볼 수 있도록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게 목표입니다.”
툭 터놓고 이야기한다는 것
“팀장님은 중요한 보고를 앞두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온다. 몸이 간지러우니 일에 집중이 되지 않고, 온 사방으로 신경이 곤두선다. 보고를 마치고 나면 잠시 열병을 앓는다. 어린아이도 아니면서.”
“뒷자리 차장님은 하루 종일 다리를 떤다. 일이 쌓여 있을 땐 아들 생일이어도, 본인 몸이 아파도 집에 가지 못한다. 하루는 그 이유가 뭐냐 물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총 쏘기 게임에서 적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우두커니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한다.”
“옆 파트 과장님은 모든 사람을 싫어한다. 일단 아무 이유도 없이 싫어하고 난 후 그 사람을 좋아해야만 하는 이유를 하나씩 발견해 나간다. 왜냐고? 그 사람이 자기를 싫어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어딘가 잘못된 사람은 나뿐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나만 빼고 다 이상한 것 같다.”
―에세이 <불안장애가 있긴 하지만 퇴사는 안 할 건데요>(2020, 위즈덤하우스) ‘이상한 나라의 한 대리’ 중 일부분
작가 ‘한 대리’는 회사에 가는 게 무서워서 글을 쓰게 됐다고 한다. 한 대리는 지금껏 불안함에 쫓겨 공부를 열심히 했고, 쉴 틈도 없이 빼곡한 시간표로 학점을 땄으며, 동기 중 가장 빠르게 직장을 찾았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될까봐 늘 웃었고 혹시라도 무능력해 보일까 주어진 일을 지나치게 서둘러 끝냈다. 그러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고 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일하는 꿈을 꾸었고 집에서도 마음 편히 쉴 수는 없었다고 한다. 작가는 불안장애를 갖고 직장생활을 하는 평범한 일상을 주제로 에세이를 냈다.
어디 한 대리만의 일일까. 몇 해 전부터 서점가에는 자신이 겪은 우울, 불안, 조울병, 조현병 등 정신의학적 위기를 밝히고 그 경험을 공유하는 책들이 많아지고 있다. 기분부전장애를 겪은 작가의 정신과 상담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2018)가 2년 전 큰 반향을 일으켰고 <조금 우울하지만, 보통 사람입니다>(2018) 등 여러 책이 이어서 나왔다. 올해에만 조울병과 함께 사는 직장인 이야기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노르웨이 심리학자가 자신의 조현병 경험을 고백한 책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 등이 나와 있다. 출판계에 이런 책이 인기 있는 이유는 그만큼 많은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정신의학적 위기를 경험하고 살기 때문일 것이다. 출판뿐만 아니라 에스엔에스(SNS)에 웹툰으로, 유튜브 채널로 마음의 병에 관해 이야기하는 콘텐츠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자신의 병에 대해 툭 터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황을 더 건강하게 만든다. 캐나다에는 나의 정신건강에 대해 드러내놓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문화 주간 ‘벨 레츠 토크’(Bell Let’s talk)가 있다. 10년 전부터 해마다 1월께 열리는 이 행사에선 옆 사람과 자신이 겪은 심리적 위기에 대해 공유하는 것을 장려한다.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없애기 위한 인식개선 문화 활동이다.
장창현 느티나무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2006년 호주의 총리도 치료를 위해 총리직을 내려놓으며 자신의 우울증을 공개한 적이 있다. 공인이 본인의 마음의 병을 오픈하는 것은 ‘이게 숨기지 않아도 될 문제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치료를 받으면 되는 거구나’라는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며 중요한 시민적 경험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마음의 병을 가진 분들이 의료의 틀 안에서 ‘환자’라는 이름으로 수동적으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정신건강 치료는 단순한 의학 지식이나 약 처방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증상을 겪고 있는 ‘당사자’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 대인관계, 인간으로서의 고뇌 등 종합적으로 접근해야 당사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 100명 중 7명 우울증 “과소진단”
광고회사 직원 유튜버 ‘우엉ueong’은 지난달 심리상담 서비스를 이용하고 브이로그를 찍어 올렸다. “회사도 심리상담을 권장할 정도로 (광고)업계가 야근이 많고 업무 강도가 세다 보니 내 멘탈이 건강한가, 아픈가도 잘 모르겠어요. 정신력이 강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요즘 무너지는 걸 느껴요. 상담을 통해 스스로 진단해보려 해요.”
그는 집에서 휴대폰으로 앱을 내려받아 영상 통화로 상담을 받았다. 앱 화면에서 전문가 여럿의 경력 소개글을 보고 자신이 상담받을 전문가를 선택한 뒤 직장, 대인관계, 결혼/육아, 취업/진로, 금전/사업, 외모 등 자신이 현재 어려움을 겪는 항목을 체크했다. 이어 우울, 스트레스, 화병, 불안, 섭식, 공황, 불면, 강박 등 나의 증상에 대해서도 입력하고 시간을 예약했다.
대체휴가일에 느지막이 일어나 점심을 먹고 상담을 받은 우엉은 상담이 끝나자 휴지로 눈물을 조금 닦으며 말했다. “제가 힘든지 모르고 있었는데 상담을 해보니 힘든 게 맞더라고요. 살다 보면 마음에 응어리가 많이 지고… 주변 사람들이나 친구들과 푼다고 해서 풀리는 것도 아니에요. 상담센터에 따로 가야 하나 고민했는데 집에서 전화로 할 수 있어 좋았어요.”
한국 직장인들은 우울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이를 제대로 진단받거나 치료받지 않고 있다는 조사가 있다. 논문 ‘한국 직장인에서 우울증의 인식과 태도 조사 및 우울증이 근무에 미치는 영향’(2015)에서 16~64살 직장인 1천명을 대상으로 우울증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다. ‘한번이라도 의료인에게 우울증 진단을 받은 적 있다’고 답한 이는 74명(7.4%)이었다. 같은 조사도구로 측정한 영국 26%, 유럽 평균 20%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저자 홍진표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논문에서 “실제 유병률이 낮다기보다 우울증임을 잘 모르거나 의심되어도 의료기관을 찾는 비율이 낮아 과소진단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논문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은 적이 있는 직장인 중 31%만 병가를 내거나 결근을 했고, 나머지 69%는 아파도 업무를 계속하고 있었다. 우울증에도 업무를 지속한 이들의 72%는 △집중력 저하 △결정 과정에서의 실수 △단순 업무처리의 어려움 △하루 일과를 계획하지 못함 등의 인지증상을 경험했다. 논문은 “우울증 상태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은 흔히 인지증상을 겪는다. 우울증으로 인한 생산성 손실이 치료와 관리에 드는 비용보다 높다”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직장 문화는 우울증을 앓고 있음을 공개하기 어렵고 그에 대한 적절한 조처를 취하기도 어렵다. ‘직장 내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는지’ 질문했더니, 전체 응답자의 212명(21.2%)이 ‘알고 있다’(7.5%) 또는 ‘아마도 한 명 이상 우울증을 앓고 있을 것’(13.7%)이라 답했다. 다섯 명 가운데 한 명꼴로 직장 동료의 우울증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지하게 된 과정을 보면, 스스로 공개한 경우는 33.9%에 불과했으며 응답자가 스스로 추정한 경우 60.8%, 그 외 다른 동료가 공개한 경우 8.5%, 의사 진단서 제출로 알게 된 경우 7.5% 차례였다. ‘직장 동료의 우울증을 인지했을 때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응답자들은 ‘우울증 관련 대화를 회피하겠다’ 30.2%,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28.8%, ‘도움을 제안하겠다’ 28.8% 순으로 답했다.
생산성과 직결…심리상담 지원하는 회사들
최근엔 회사가 심리상담을 지원하는 등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직장인 김지훈(가명·28)씨는 올해 초 회사에서 직장 내 갈등을 겪었다. 친구에게도, 부모에게도 위로받기 어려웠다. “부모님에게 ‘회사에서 ○○ 때문에 힘들다’라고 소상히 설명하기 쉽지 않고, 바쁘게 사는 친구들을 내 말 들어주느라 소진시키고 싶지도 않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씨는 회사가 비용을 지원하는 전문심리상담업체를 통해 점심시간 가까운 상담센터를 찾았다. 전문가에게 다섯 차례 상담을 받은 김씨는 “전문가는 내 이야기를 듣고 그저 감정을 토닥여주는 게 아니라, 제가 나쁜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도록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최근 많은 기업들이 직원을 대상으로 심리상담 지원을 하고 있다. 정신건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직원의 정신건강이 기업 생산성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2018년 감정노동자가 정신건강 문제를 겪으면 회사가 적절한 상담을 지원해야 하는 감정노동자보호법이 제정됐고, 2019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면서 건강한 조직문화의 필요성이 높아진 것도 한몫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