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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쌍용차 김정우 “30년 노동운동 행복해요…연대의 삶 배웠잖아요”

등록 2022-02-12 09:47수정 2022-02-12 10:11

[한겨레S] 커버스토리
노동운동가 김정우의 정년 퇴직

쌍용차 투쟁의 주역 중 한 명 김정우씨…복직 3년 근무 뒤 정년
투쟁가가 어색했던 중졸 정비공이 운동가로 “덕분에 사람 됐죠”
“아이들 미래 위해 싸우는 당신들께 감사”란 시민의 말 못잊어
“혼자만이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다 함께 사는 것을 배웠어요. 함께 사는 방법, 나누는 방법, 그리고 베푸는 방법에 대해서 배운 거요. 노동운동을 안 했다면 그런 것을 알지 못했을 거예요.” 쌍용차 복직 투쟁 등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한 전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지난달 11일 오후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혼자만이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다 함께 사는 것을 배웠어요. 함께 사는 방법, 나누는 방법, 그리고 베푸는 방법에 대해서 배운 거요. 노동운동을 안 했다면 그런 것을 알지 못했을 거예요.” 쌍용차 복직 투쟁 등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한 전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지난달 11일 오후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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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사람에게 누가 관심이나 갖겠어요?”

인터뷰를 사양하던 이를 간신히 설득해 만났지만, 첫 대면치고는 분위기가 썰렁했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예전에는 <한겨레> 후원도 많이 했었는데 요즘은 잘 안 봐요. 보도가 마음에 안 들어”라며 불만부터 토로했다. 그러잖아도 난방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실내에 냉기가 더 흘렀다. 인터뷰 장소인 부인의 식당도 건물주가 건물 리모델링을 벌이는 바람에 영업을 하지 않아 어수선했다. 어려운 인터뷰가 되겠는걸.

“커피 할래요?” 둥근 양철식탁에 마주 앉자 날아온 물음에도 무뚝뚝이 묻어났다. “네.” “여기 잠깐 기다려요.”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그는 휑하니 밖으로 나갔다. 직선적인 상대일수록 끌려다녀선 안 되지. 인근 카페로 뒤따라가서 ‘커피는 제가 사겠다’고 지갑을 꺼냈지만, 그는 말없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컵을 하나씩 나눠 들고 가게로 돌아오고 나서야 말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얼마나 골때렸는데 처음에. 대한문 앞에 싸우러 갔는데 사람들이 자꾸 아메리카노를 사다 주는 거예요. 우리는 현장에서 늘 믹스커피만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쓴 걸 뭔 맛으로 먹나 했죠. 점심 먹고 사람들이 이걸 하나씩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는 미친놈들이라고 욕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도 이걸 들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하하.”

한국 노동운동사에 기록될 쌍용차 투쟁의 주역 중 한 명인 김정우(61) 전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하 호칭 생략)과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10년 가까운 투쟁 끝에 2018년 12월 말에 복직했던 그는 만 3년 일하고, 지난해 말 정년퇴직했다. 만남은 지난달 11일 오후 서울 상도동 상도역 근처에 있는 상도 실내포장마차에서 이뤄졌다.

김정우 전 금속노도 쌍용자동차 지부장은 지난해 연말 정년을 맞으면서 “연대의 정신을 실천하겠습니다”라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김 전 지부장이 지난달 11일 오후 부인이 운영하는 서울 상도동 상도실내포장마차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김정우 전 금속노도 쌍용자동차 지부장은 지난해 연말 정년을 맞으면서 “연대의 정신을 실천하겠습니다”라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김 전 지부장이 지난달 11일 오후 부인이 운영하는 서울 상도동 상도실내포장마차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형이 나설 차례” 요청에 투쟁 전면에

―늘 출근하다가 안 하니까 어때요?

“허전하죠. 매일 알람이 딱 오전 5시50분에 맞춰져 있었는데 알람을 삭제해서 자유로움은 있지만 뭔가 허해요.”

―하루를 주로 어떻게 보내요?

“여기 가게에서 집사람을 도와줘요. 음식도 나르고, 설거지도 하고, 계산도 해요. 이것저것 다 하는데도 집사람은 애들한테 ‘야, 저 짐 덩어리 좀 갖다치워라’고 해요. 하하.”

김정우가 해고된 뒤 2년여가 지난 2011년 12월 부인 조해숙(61)은 생계를 위해 실내포장마차를 차렸다.

―마지막 날 퇴근하고 나올 때 어땠어요?

“‘이제 동지들을 가까이서 볼 수 없구나’ 하는 마음이 확 오더라고요. 퇴근하고 나오는데 한 후배가 전화를 해서 ‘형, 빨리 기숙사 출입문으로 오세요’라고 해서 갔더니 몇 명이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자기들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웠나 봐요. 마지막으로 같이 사진 한 장 찍고 공장을 나왔지요.”

―복직투쟁 할 때 정년을 마치고 공장 문을 나올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때는 무급 휴직자들을 우선 복직시키는 데에 모든 생각이 꽂혀 있었어요. 무급 휴직자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정리해고자도 풀릴 수 있거든요. 그때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싸우느냐가 중요했지, 내가 공장에 돌아간다 못 돌아간다는 것은 아예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쌍용차 투쟁은 2009년 4월 정규직의 절반인 2646명의 노동자를 해고하면서 시작됐다. 대규모 정리해고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실적 악화 등 외부 요인도 있지만, 2004년 쌍용차 경영권을 인수한 중국 상하이차의 고의성 짙은 부실 경영이 큰 원인이라고 노조는 봤다. 투자와 공장 신설 등의 약속은 하나도 지키지 않은 채 하이브리드 엔진 등 쌍용차의 기술만 중국으로 빼돌렸다는 의혹이 짙었다. 정리해고 등 대규모 구조조정을 사쪽이 강행하자, 노조는 5월21일 평택 공장을 점거해 파업 농성을 시작했다. 파업 전날 옷가지 몇 개만 담은 가방을 메고 공장에 들어간 김정우도 이른바 77일간의 ‘옥쇄 파업’ 현장을 지켰다. 8월5일 경찰 특공대에 의해 강제진압된 뒤 공장에서 끌려나온 그는 운 좋게 훈방행 버스에 태워졌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 장면이 나온다. 그만큼 쌍용차 투쟁은 강렬했지만, 파업 뒤 뿔뿔이 흩어진 노동자들은 무력했다. 출퇴근 시간 평택 공장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외치는 노조원들의 구호는 메아리도 없이 허공에 흩어져 갔다. 절망감에 휩싸인 노동자들은 하나둘 세상을 등지기 시작했다. 해고 노동자들의 좌절감과 외로움이 끝없이 커져만 갈 때 김정우가 나섰다. 파업이 깨진 지 2년 만인 2011년 8월 그는 “이제 형이 나설 차례”라는 동료들의 요청에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을 맡았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철학자인 슬라보이 지제크가 2012년 6월29일 서울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분향소를 방문해 김정우 당시 지부장과 손을 맞잡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철학자인 슬라보이 지제크가 2012년 6월29일 서울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분향소를 방문해 김정우 당시 지부장과 손을 맞잡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연대자 없었으면 버티기 어려웠을 것”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분향소 싸움을 빼고는 김정우를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죠.”

―분향소를 처음 차린 때가 2012년 4월이었는데 왜 평택 공장이 아니라 대한문 앞이었어요?

“쌍용차에서 22번째 희생자가 나왔을 때였어요. 저랑 같은 정비 노동자 출신인 문기주 동지 등이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리자고 먼저 제안했어요. 당시 쌍용차 동지들 가운데는 평택 공장 현장을 사수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사람들로 의견이 나눠져 있었어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맞다, 서울로 가자’고 해서 대한문에 왔죠. 와 보니까 여기서 더 물러설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래서 평택에 있는 동지들을 다 서울로 오라고 해서 대한문 앞 싸움에 집중했지요.”

―왜 승부를 대한문에서 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제가 지부장이 됐을 때 희생자가 17명이었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5명이 더 세상을 떠났어요.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죽음을 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거든요. 그 희망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건 우리 싸움이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고, 그러려면 언론을 통해서든 어쨌든 간에 조그마한 소식이라도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봤어요. 벼랑 끝에서 바늘구멍 같은 희망을 하나라도 찾자는 심정으로 죽기 살기로 했어요.”

―대한문 앞 분향소는 많은 사람들이 쌍용차 투쟁에 마음을 보태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당시 저희가 운영하던 인터넷 카페(쌍차77동지회)가 있었어요. 하루에 20~30명에 불과했던 방문자 숫자가 차츰 늘기 시작하길래 사회가 우리한테 관심을 갖고 있구나라는 걸 알았어요. 그러면서 해고자들이 자꾸 희망을 얘기하기 시작했죠.”

시민들의 온·오프라인 방문이 늘수록 당국은 대한문 앞 분향소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경찰과 서울 중구청은 분향소를 기습 철거해 그 자리에 화단을 만들기도 했다. 쌍용차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구하면서 대한문 앞에서 41일간 단식 농성을 하기도 했던 김정우는 분향소 철거에 맞서 싸우다가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2013년 6월 구속돼 1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다. 대한문 앞 분향소는 그의 구속과 함께 사라졌다가 서른번째 희생자가 나온 직후인 2018년 7월, 5년 만에 다시 설치됐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문재인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로 해고자 전원을 순차적으로 복직시킨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그해 12월 마지막 날 김정우 등 1차 복직자 71명은 해고된 지 거의 10년 만에 평택 공장으로 출근했다.

―당시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때였는데 어떻게 그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분향소를 오래 지킬 수 있었어요?

“연대의 힘이죠. 그런 연대가 없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버틸 수 있었겠어요? 시민들이 분향소를 방문해 조문하는 것 자체가 다 연대였죠. 그게 저희를 지탱해줬어요.”

―그런 게 실감이 되던가요?

“그 전에는 연대하러 내가 여러 곳으로 다녔죠. 집회하러 가고 싸움하러 다니고 했지만, 그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실감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막상 연대자들을 맞이하는 입장이 됐잖아요. 그때서야 이렇게 사람들이 마음을 나눠주는구나를 알았죠. 물심양면이라는 말이 정확해요. 해고자들이 돈도 없어 모금을 하는데 사람들이 만원짜리든 오천원짜리든 천원짜리든 돈을 넣어주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어요. 그 마음들이 너무 신기한 거예요. 당시 우리 구호가 ‘연대는 생명이요, 해고는 살인이다’였는데 그 연대의 중요성을 실제로 느꼈어요. 연대자들이 없으면 우리가 살 수가 없었죠. 그건 어떤 투쟁사업장도 마찬가지예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어요?

“얘기하다 보니까 두 가지가 생각나네요. 한번은 일흔이나 여든쯤 되는 어르신이 지나가면서 ‘미안하네, 젊은이들. 내가 나이를 먹었는데 자네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모자 쓰고 덩치는 요렇게 쪼그마한 분인데 지금도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 또 한 분은 3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꼬맹이를 데리고 지나가면서 ‘고맙습니다’라고 해요. ‘왜요?’라고 물었더니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당신들이 이렇게 싸워주는 거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했어요. 가슴이 멍하고 심장이 뜨거웠어요. ‘우리가 제대로 못 해서 이렇게 당신들이 고생한다’는 말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오랜 싸움이었지만, 해고자 전원이 복직한 것은 노동운동사에서 의미가 큰 것 같아요.

“해고자가 왜 반드시 공장으로 들어와야 되는지 알아요? 돌아가지 못하는 전례를 남기면 안 되기 때문이죠. 공장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갔다가 나와야지 후배들이 힘을 얻죠. 역사는 그런 거죠. 그래서 물러서지 않고 싸웠던 거예요.”

2013년 2월23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연설을 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2013년 2월23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연설을 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2012년 8월28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서울 청계천 버들다리에 있는 전태일 동상에 꽃을 바치려 하자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팻말을 든 채 동상 앞을 막아서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2012년 8월28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서울 청계천 버들다리에 있는 전태일 동상에 꽃을 바치려 하자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팻말을 든 채 동상 앞을 막아서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정비소 차려준다는 회유도 거절

김정우는 1990년 쌍용차 구로정비소에 특채로 입사했다.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회사한테 찍혀서 1998년 하반기에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 지정 정비공장에 잠깐 파견 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구로정비소에서 지냈다. 이곳에서 자동차 정비공 김정우는 노동운동가로 성장했다. 그는 2001년 대우차(1998년 대우차가 쌍용차 인수)의 정리해고 반대 투쟁 때는 노조의 조직3부장을 맡았으며, 2002년부터 약 2년간은 쌍용차 노조의 정비지회장으로 일했다.

―노조 활동은 언제부터 했어요?

“쌍용차 이전부터였어요. 1989년 서울 강남 뱅뱅사거리의 한 정비공장에 취직했는데 노조를 만들던 선배들과 동료들이 저에게도 같이 하자고 해서 동참했어요. 야유회를 가면 사회를 도맡고 노래도 잘 부르는 등 활동성이 괜찮아서 그랬는지 쟁의부장을 하라길래 뭔지도 모르고 받았죠. 하하. 노조 창립식에서 사람들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뒷자리 앉아 들으면서 속으로 ‘아, 자식들 뭣같은 노래 하네. 뭐 이런 노래가 다 있어?’ 그랬죠. 하하.”

그러나, 정의감 강한 김정우는 그 뒤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한 동료와 심하게 다퉈서 해고될 정도로 노조 활동에 열심이었다. 지방노동위에서 부당해고 판정을 받아 복직했으나, 1990년 회사가 아예 문을 닫는 바람에 직장을 잃은 뒤 블랙리스트에 올라 한동안 취업을 못했다. 고객으로서 그의 손재주를 눈여겨봤던 쌍용차 고위 간부의 추천으로 구로정비소에 입사했다.

―노조 활동으로 해고당하는 등 고생했으면 새 회사에서는 조용히 살려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왜 노조 활동을 계속했어요?

“해고됐을 때 서울 관악구 난곡 입구의 한국노총 금속노련 지부에 자주 가서 상담을 했어요. 민주노총이 출범하기 전이었는데 활동가들이 친절하게 해줘서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 알았죠. 게다가 쌍용차에 들어갔는데 근무 환경이나 노동조건이 강남의 정비공장만도 오히려 못했어요. 임금도 낮고 작업 환경도 완전 개판인 등 부당한 일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외면해요. 수습을 끝낸 지 얼마 안 돼 정비지부 대의원이 될 정도로 열심히 노조 일을 했어요.”

―구로청년회 등 지역활동도 했더군요?

“네.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회사 앞 전봇대에 구로노동상담센터 포스터가 붙어 있는 걸 보고 상담센터에 찾아갔죠. 거기서 노동법을 공부했고, 역사교실에 참가해서 우리나라의 비틀린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그러면서 세상의 문제를 알게 되면서 더 확고한 분노를 느끼고 그랬죠.”

―홍보 포스터만 보고 갔다고요?

“세상과 사회에 대해 배우고픈 마음이 있었어요. 강남의 정비공장에서 노조 할 때 조금 맛봤거든요. 그때 서울대 출신의 젊은 부부가 우리한테 풍물을 가르쳤는데, 풍물을 배우면서 사회문제에 처음으로 눈을 떴었죠.”

김정우 전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복직한 뒤인 2019년 12월 평택공장 조립 라인에서 자동차 조립을 하고 있다. 사진 김정우 제공
김정우 전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복직한 뒤인 2019년 12월 평택공장 조립 라인에서 자동차 조립을 하고 있다. 사진 김정우 제공

구로정비소의 핵심 활동가였던 김정우는 회사 쪽으로부터 회유도 많이 받았다. 한번은 회사 고위 간부가 강원도 양양의 고향 집으로 찾아가 ‘근처 낙산에 정비코너를 하나 만들어줄 테니 조용히 살라’고 제안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노동 현장을 배신할 수 없었”던 그는 당연히 거절했고, 그 간부는 얼마 뒤 회사를 관뒀다. “그분한테는 죄송하죠. 저를 특채했고 아껴주기도 했지만, 사장이 될 수 있었던 분인데 제가 노조를 계속하는 바람에 위에서 찍혀서 관뒀거든요. 다행히 저를 나쁘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와는 지금도 자주 연락하면서 지낸다고 했다.

―운동을 그만두고 싶거나 도망치고 싶을 때는 없었어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늘 정면돌파하면서 살아왔죠.”

―30년 넘게 노동 현장에서 싸웠는데 돌아보면 어때요?

“동지들이 있어서 행복했죠. 또 연대자들이 있어서 행복했고요.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눈을 떴죠. 그게 가장 행복한 거죠. 한마디로 사람이 됐죠. 사람이 된 거예요. 하하.”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해서 눈을 떴다면요?

“혼자만이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다 함께 사는 것을 배웠어요. 함께 사는 방법, 나누는 방법, 그리고 베푸는 방법에 대해서 배운 거요. 노동운동을 안 했다면 그런 것을 알지 못했을 거예요.”

―노동운동을 통해 사람이 됐다면 그 전에는 어땠는데요?

“활동량 강한 청년이었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죠. 20대 때 쿠웨이트 사막 한가운데로 돈 벌러 갔던 사람이에요. 뜨거운 사막에서 하루 5시간 이상을 안 자고 일했어요. 잠을 안 자는 만큼 돈이니까요. 그만큼 돈을 최고로 여겼었죠.”

김정우 전 쌍용차 지부장이 2014년 4월1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보석으로 석방된 뒤 한상균 전 지부장 등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김정우 전 쌍용차 지부장이 2014년 4월1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보석으로 석방된 뒤 한상균 전 지부장 등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봉제공장 시다와 중동 건설현장 노동자 출신

김정우는 1976년 양양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와서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가방 만드는 봉제공장에서 시다 일부터 시작했다. 미싱 기름독 때문에 허벅지에 수포가 생기는 등 몸이 아파 봉제공장을 그만두고는 현대건설 직업훈련생으로 들어가 자동차 정비를 배웠다. 직업훈련생 시절 충주댐과 서산 간척지 등 건설 현장에서 차량정비 보조로 일했으며, 1985년에는 정비공으로 현대건설의 쿠웨이트 건설 현장에 갔다.

―15살 어린 나이에 노동을 시작했군요.

“당시 집안에 빚이 많아서 학교를 더 다닐 수가 없었어요. 고교 과정은 훗날 방송통신고로 마쳤죠. 시다와 미싱사 일을 했기 때문에 <전태일 평전>을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창문에 갇혀 있다시피 한 소녀들에 대한 얘기가 정확하게 내 기억과 같거든요. 김진숙 동지가 쓴 <소금꽃나무>에도 버스 안내양이라든가 미싱 시다 생활 얘기가 나오잖아요. 그것 읽으면서도 많이 울었어요. 내가 직접 겪은 일이니까 교감이 더 쉽게 되더군요.”

―노동운동에 대한 조언을 한다면요?

“그런 것까지는 못 해요. 내게 그런 질문은 어려운 질문이야.”

―그래도 아쉬움이라든가 개선하면 좋겠다는 건 있지 않겠어요?

“하나가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하나 되는 게 어렵지. 얼마 전 진보 진영이 대선 후보를 통합하려다가 깨졌잖아요. 나는 항상 비례대표 10석을 얻었던 민주노동당 시절을 기억하는데 지금은 왜 그렇게 안 되는지가 가장 아쉽고 큰 슬픔이죠.”

―왜 하나가 안 될까요?

“나를 안 버리는데요 뭐. 다 자기 욕심이잖아요. 이념과 이런 게 다르기도 하고요. 그런 것들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니까 힘든 것 아닌가 싶어요.”

―노동 현장도 마찬가지인가요?

“현장이 더하지.”

김정우 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이 지난달 11일 &lt;한겨레&gt;와 인터뷰 도중 과거를 회상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김정우 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이 지난달 11일 <한겨레>와 인터뷰 도중 과거를 회상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짧은 대답 뒤에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아, 배고파, 이제 그만해요. 내 인생이 오늘 다 털렸네. 이래서 인터뷰 안 하려고 했었는데…”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거른 그의 뱃속이 오후 3시가 넘도록 비어 있었다.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 생각과 몇가지 더 대답을 듣고 싶은 욕심에서, 부인이 사다 놓은 김밥 한 줄로 늦은 점심을 때우는 그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노동운동가 아닌 생활인으로서의 구체적 계획이 뭔지’를 끝으로, 더 묻지 않았다. “투쟁하면서 몸이 너무 많이 망가졌어요. 이제 힘쓰는 일은 더 못해요”라는 말이 마음 아프기도 했지만, 정년 이후의 삶에 대해서 이미 그가 답을 내놨다는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김정우는 퇴직하는 날 페이스북에 “생존권을 찾기 위한 그 길 위에서 만난 모든 님들께 고개 숙여 격하게 감사드립니다”라며 “연대의 정신을 실천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그가 걷는 길을 가끔씩 바라만 봐도 족할 것 같았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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