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교육출판회사의 계열사에 입사해 팀장으로 일했던 ㄱ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직장상사 ㄴ씨로부터 수차례 성희롱을 당했다. ㄴ씨는 마우스를 잡고 있는 ㄱ씨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거나, 일대일 면담에서 ‘팀장은 웃을 때 예쁘다’ ‘본인이 예쁜 것을 아냐’ 등 업무와 무관한 발언을 했다. 이후 ㄱ씨는 ㄴ씨가 다른 여성 직원에게도 불쾌한 신체접촉을 하는 등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고 지난 5월17일 사내 고충신고 절차에 따라 회사에 ㄴ씨를 신고했다.
하지만 회사는 적절한 분리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ㄴ씨에게 감봉 3개월의 징계처분이 내려졌지만, 회사는 ‘건물이 한 개 층이라 분리할 공간이 없다’며 ㄴ씨를 ㄱ씨와 불과 6~7m 떨어진 자리에 배치했다. 시야를 가릴 칸막이를 설치해달라는 요구조차 거절했다. ㄱ씨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지만, 회사는 유급휴가를 거부했다. 되레 ㄱ씨는 가해자 ㄴ씨가 상반기 인사평가 평가자로 참여한 가운데 인사평가에서 가장 낮은 ‘디(D) 등급’을 받았다. ㄱ씨는 “가해자는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고, 나에게 보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걱정이 컸다”며 결국 지난 8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회사를 상대로 ‘고용상 성차별’ 시정신청을 냈다.
4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지방노동위원회(노동위)는 ㄱ씨가 시정신청을 한 지 두 달 만인 지난달 30일 심문회의를 열고 ㄱ씨의 주장을 받아들여 ‘일부 시정’ 판정을 내렸다. 노동위원회의 ‘고용상 성차별 시정신청 제도’가 시행된 이후 시정 판정이 내려진 첫 사건이다. 지난 5월 개정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고평법) 시행에 따라 사업주가 모집·채용 등에서의 차별과 성희롱 피해를 입은 노동자에게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을 경우 피해 노동자는 고용상 성차별 시정 신청을 낼 수 있다. ㄱ씨는 △근무장소 변경 △회사의 유급휴가 거부 △낮은 인사평가 결과 등에 대해 시정신청을 냈다.
ㄱ씨는 꼬박 두 달에 걸쳐 ‘일부 시정’ 판정을 받았지만, 여전히 노동위가 어떤 사안을 차별이라고 판단했는 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법원 판결은 판결문이 나오지 않더라도 선고 당일 주문을 통해 간단한 판결 취지를 알 수 있지만, 노동위 판정은 한 달 뒤 판정문을 받기 전까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위 판정문이 회사에 송달돼야 노동위의 시정명령이 이행될 수 있다. ㄱ씨는 “노동위 판정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판정 내용도 알 수 없어 답답하다”고 호소했다. 노동위에서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회사는 조직개편을 진행했고, ㄱ씨는 팀원이 1명도 없는 팀에 배치됐다. 고평법은 성희롱 피해노동자의 의사에 반하는 직무 배제·재배치를 금지하고 있다. 규정을 이유로 판정 세부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던 노동위는 이날 <한겨레> 보도가 나가자 유급휴가 미부여·공간 미분리·낮은 인사평가를 차별로 인정했다고 ㄱ씨 대리인에게 뒤늦게 통보했다.
일각에서는 성희롱 피해 노동자 차별시정 사건은 임금·승진 차별과 달리 신속하게 운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ㄱ씨를 대리한 배현의 노무사(노무법인 ‘노동을 잇다’)는 “사업주의 성희롱 피해노동자 조치의무 위반은 노동위의 판단이 늦어질수록 피해가 가중되는데 이를 개선할 방법이 필요하다”며 “노동위 조사관이 사건 초기부터 적극적인 현장조사를 하는 등 빠른 판정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재 노동위에는 성희롱·성차별 전담 조사관도 없는 실정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이 중노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제도 시행 이후 지난달 23일까지 노동위에 접수된 고용상 성차별 관련 사건은 전국에서 11건으로, 5건은 여성노동자의 임금·승진·배치상 차별 사건, 6건은 성희롱 피해노동자에 대한 사업주의 조치의무 위반과 불리한 처우 관련 사건이었다.
박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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