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린 건 둘째치고,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가장 힘듭니다.” 웃음 많은 그가 이젠 눈치 보며 화장실을 찾는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서다. 시스템 구축을 의뢰한 고객사(원청)로 파견돼 출퇴근한 지 아홉달째다. 올 상반기, 일주 5일 동안 9시에 출근해 밤 11시가 되어야 회사를 나섰다. 집에 닿을 즈음 ‘오늘’은 항상 ‘내일’이 되어 있었다. 이달 들어서는 일요일도 사라졌다. “초과근무 수당은 받아본 적이 없어요. 다들 그러려니 하는 것도 정말 이상합니다.” 동료 여직원들은 생리불순을 견뎌내고 있다. 올해 2월부터는 아침 7시께 시작하는 영어학원을 시작으로 회화를 공부하고 있다. 컴퓨터 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지난해 처음 취업한 새내기 개발자 ㅎ(26)씨는 입사 2년도 채 안 돼 정보기술(IT) 강국,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국내 정보기술 인력의 국외 누수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산업인력공단은 아이티 분야 출신으로 공단을 거친 국외 취업자가 2003년 56명에서 지난해 499명으로 9배 증가했다고 밝혔다. 국내 최대 규모로 정보기술 인력의 일본 취업을 알선하는 오제이티코리아 쪽은 “2년 전부터 취업 희망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데, 경력사원보다 신입사원 희망자가 더 많아지는 추세”라며 “최근 한달 30여건 가운데 절반이 신입”이라고 말했다.
외국의 노동 현실은 국내와 대단히 다르다. 기본적으로 ‘야근=무능’이란 인식이 확고하다. 오스트리아에서 전산기술자로 일하는 이안톤(29)씨는 “2년 동안 회사 다니면서 주말에 일한 적은 딱 두 번”이라고 말했다. 8년 전 캐나다로 취업 이민 간 한 정보기술자는 “한국은 인력 구하기가 편해서인지 프로젝트 예산 편성 때부터 인건비를 먼저 절감 수단으로 삼는 게 문제”라며 “캐나다는 주간 최대 초과근무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고 소개했다.
지난해 토종 아이티업체에서 국내 소재의 미국 업체로 자리를 옮긴 10년차 개발자 김아무개(38)씨는 “나는 돈 버는 기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퇴근 시간은 이제 오후 4시30분이다. “이직 초기 뭘 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는 그는 “원청과의 철저한 협의 기획을 토대로 야근 수요가 없고, 야근은 비용과 직결돼서 사전 보고와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소모품이 되기 싫어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수없이 이직하면 빈자리는 매번 ‘초짜’가 메운다”며 “국내 아이티산업 자체가 부실해지는 ‘시한폭탄 돌리기’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냐”고 반문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오혜정 인턴기자(이화여대 법학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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