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출국 당한 까지만 까풍 이주노조 위원장
[한겨레가 만난 사람] 강제출국 당한 까지만 까풍 이주노조 위원장
‘삐리리릭’. 지난 13일 새벽 5시, 기자의 휴대전화에 문자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날카로운 벨소리가 고요한 아침을 깨웠다.
‘[긴급] 청주외국인보호소에서 이주노조 지도부 강제출국 시도, 정문앞 대치중입니다.’
2시간 뒤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의 이정원 교육선전차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취재를 부탁했다. 지난달 27일 불법체류를 이유로 동시에 단속돼 청주외국인보호소에 갇혀있던 까지만(43·네팔) 위원장과 라쥬 부위원장(33·네팔), 마숨 사무국장(42·방글라데시)이 곧 강제출국당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16년전 입국해 착취·폭행 등 ‘모진 삶’
‘인간답게 살 권리’ 찾으려 노조활동
표적단속으로 지도부 전원 쫓겨나
“차별 없애려 노력한 게 범죄인가요?”
이주노동자 관련 사회단체 회원 20여명이 이들을 보호소 정문 앞을 가로막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날 이주노조 지도부 3명은 각기 본국으로 강제추방됐다. ‘표적단속’ 여부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나온 전격적인 조처였다.
유엔총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자유롭게 귀국할 권리 등 기본권 보장을 촉구하는 국제협약을 채택한 것을 기념하는 12월18일 ‘세계 이주민의 날’을 불과 닷새 앞두고, 이들은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건넜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받는 그날이 돼야 고향에 돌아갈 수 있죠. 그때까지는 안 갈겁니다.” 지난 7일 청주외국인보호소 면회실에서 희뿌연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만났던 까지만 위원장은 서툰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면회시간 내내 선한 웃음을 짓고 있던 그의 동그란 얼굴에 처음으로 단호한 기색이 비쳤다. 꼬박 16년 전인 1991년 12월, 그가 네팔에 있는 어머니와 두 동생의 생계를 위해 관광비자로 한국에 왔다. 브로커에게 100달러를 주고 수원에 첫 일자리를 얻었다. 서툰 솜씨로 욕조, 세면기를 만드느라 뚝딱거리고 한달에 쥐어지는 돈은 달랑 35만원. 한국말은 전혀 하지도, 듣지도 못했다. 일을 배우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그저 ‘눈치’로만 통했다. 회사 기숙사 식당 아주머니가 “저녁밥 안 먹을거죠?”라고 묻는 말을 오해해 적당히 “네”라고 대답했다가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어느날인가는 한국인 과장이 그를 따로 불러내더니 “왜 말을 잘 안 듣냐?”며 주먹으로 가슴을 여러차례 때렸다. “그런데도 따지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어요.” 그렇게 생활한지 6개월 뒤, 그는 네팔에 계신 어머니가 심장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네팔로 돌아갈 비행기 표값은 꿈도 못 꿨다.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몇달째 월급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92년말, 그는 서울 명동에 있는 인권센터 상담소로 향했다. “그때만 해도 노동조합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저 월급을 받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상담소에 가면 월급을 떼먹혔을 때, 일을 하다 다쳤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줬거든요.” 그러던 그가 ‘노조’에 눈을 뜨게 된 것은 2000년 한 네팔 친구를 인권센터에서 만나면서부터였다. 그 친구는 산업연수생제도의 폐해 등을 지적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이었다. 2003년말 고용허가제 도입에 반대하던 이주노동자들이 잡혀간 뒤 명동성당 단식농성에 합류했던 까지만 위원장은 그후로 줄곧 이주노조운동에 앞장서왔다. 그 뒤 2005년 이주노조 초대 사무국장, 지난해 수석부위원장을 거쳐 지난 2월 제3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아노아르 초대 위원장이 단속됐을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노조설립 초창기라 함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산업연수생제도가 바뀌고, 지난 1월 법원에서 이주노조 합법화 판결을 받았을 때에는 정말 뿌듯했어요. 우리가 힘들게 싸워, 이렇게 한걸음씩 앞으로 나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고향에 있는 어머니 생각에 네팔로 돌아갈 마음을 먹은 적도 여러차례였다. 실제로 비행기 티켓을 끊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랑 같이 싸워온 이주노동자 동지들을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나에게 ‘인간의 권리가 뭔지’ 처음으로 가르쳐준 사람들이니까요.” 까지만 위원장의 까만 눈망울에 촉촉한 물기가 어렸다. 그가 ‘동지’로 여기는 마숨 사무국장 역시 “가족들한테 떳떳해질 때까지 귀국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96년 브로커에게 400만원을 주고 한국에 왔어요. 4명이 같은 비행기를 탔는데, 똑같은 넥타이를 매고 옷에 영문 스티커를 붙였죠. 어떤 브로커를 통해 들어오는 사람인지 구별하기 위해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게 그가 ‘짐짝’ 취급을 받으며 한국에 들어온 지 40일 뒤 태어난 딸은 어느새 13살의 ‘소녀’가 됐다. “당연히 딸이 보고싶죠. 그런데 외환위기 때는 일하던 회사 사장에게 속아 모았던 1300만원을 사기 당하고, 의료보험 적용을 못받는 위장수술까지 한 뒤 6개월 동안 일을 못하고 나니 완전히 빈털털이가 됐거든요.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죠. 한국에서 받은 차별대우도 인간으로서 겪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 차별을 없애기 위해 뭔가 하고 싶었어요. 그럼 딸한테 떳떳해질테니까….” 면회실에서 마숨 사무국장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라쥬 부위원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이주노동자들이 당당하게 스스로 싸움에 나서야 해요. 우리 권리는 우리가 찾는 거니까. 정부는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지만, 차별을 없애려고 노력한 게 문제인가요? 우리 입을 막는 건 명백한 노동탄압입니다.” 그는 최근 불법체류 합동단속으로 300여명이던 이주노조 조합원은 100여명으로 줄었다고 했다.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청주외국인보호소에서 나가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고 말하던 까지만 위원장과의 만남은 그날의 면회가 ‘마지막’이었다. 지난 14일 네팔에 도착한 그는 한국의 동지들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동지 여러분, 우리는 강제로 납치되듯, 아무도 모르게 14시간이 걸려 네팔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가게 돼서 미안합니다.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내가 범죄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네팔에서 한국으로 가는 이주노동자들을 교육하고 한국의 노동운동에 대해 알려줄 겁니다. 그렇게 연대하면 한국의 동지들을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인간답게 살 권리’ 찾으려 노조활동
표적단속으로 지도부 전원 쫓겨나
“차별 없애려 노력한 게 범죄인가요?”
강제출국 전날인 12일 청주외국인보호소 면회소에서 노동조합 동료들과 만난 이주노조 지도부. 왼쪽부터 까지만 위원장, 마숨 사무국장, 라주 부위원장.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받는 그날이 돼야 고향에 돌아갈 수 있죠. 그때까지는 안 갈겁니다.” 지난 7일 청주외국인보호소 면회실에서 희뿌연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만났던 까지만 위원장은 서툰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면회시간 내내 선한 웃음을 짓고 있던 그의 동그란 얼굴에 처음으로 단호한 기색이 비쳤다. 꼬박 16년 전인 1991년 12월, 그가 네팔에 있는 어머니와 두 동생의 생계를 위해 관광비자로 한국에 왔다. 브로커에게 100달러를 주고 수원에 첫 일자리를 얻었다. 서툰 솜씨로 욕조, 세면기를 만드느라 뚝딱거리고 한달에 쥐어지는 돈은 달랑 35만원. 한국말은 전혀 하지도, 듣지도 못했다. 일을 배우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그저 ‘눈치’로만 통했다. 회사 기숙사 식당 아주머니가 “저녁밥 안 먹을거죠?”라고 묻는 말을 오해해 적당히 “네”라고 대답했다가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어느날인가는 한국인 과장이 그를 따로 불러내더니 “왜 말을 잘 안 듣냐?”며 주먹으로 가슴을 여러차례 때렸다. “그런데도 따지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어요.” 그렇게 생활한지 6개월 뒤, 그는 네팔에 계신 어머니가 심장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네팔로 돌아갈 비행기 표값은 꿈도 못 꿨다.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몇달째 월급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92년말, 그는 서울 명동에 있는 인권센터 상담소로 향했다. “그때만 해도 노동조합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저 월급을 받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상담소에 가면 월급을 떼먹혔을 때, 일을 하다 다쳤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줬거든요.” 그러던 그가 ‘노조’에 눈을 뜨게 된 것은 2000년 한 네팔 친구를 인권센터에서 만나면서부터였다. 그 친구는 산업연수생제도의 폐해 등을 지적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이었다. 2003년말 고용허가제 도입에 반대하던 이주노동자들이 잡혀간 뒤 명동성당 단식농성에 합류했던 까지만 위원장은 그후로 줄곧 이주노조운동에 앞장서왔다. 그 뒤 2005년 이주노조 초대 사무국장, 지난해 수석부위원장을 거쳐 지난 2월 제3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아노아르 초대 위원장이 단속됐을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노조설립 초창기라 함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산업연수생제도가 바뀌고, 지난 1월 법원에서 이주노조 합법화 판결을 받았을 때에는 정말 뿌듯했어요. 우리가 힘들게 싸워, 이렇게 한걸음씩 앞으로 나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고향에 있는 어머니 생각에 네팔로 돌아갈 마음을 먹은 적도 여러차례였다. 실제로 비행기 티켓을 끊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랑 같이 싸워온 이주노동자 동지들을 남겨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나에게 ‘인간의 권리가 뭔지’ 처음으로 가르쳐준 사람들이니까요.” 까지만 위원장의 까만 눈망울에 촉촉한 물기가 어렸다. 그가 ‘동지’로 여기는 마숨 사무국장 역시 “가족들한테 떳떳해질 때까지 귀국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96년 브로커에게 400만원을 주고 한국에 왔어요. 4명이 같은 비행기를 탔는데, 똑같은 넥타이를 매고 옷에 영문 스티커를 붙였죠. 어떤 브로커를 통해 들어오는 사람인지 구별하기 위해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게 그가 ‘짐짝’ 취급을 받으며 한국에 들어온 지 40일 뒤 태어난 딸은 어느새 13살의 ‘소녀’가 됐다. “당연히 딸이 보고싶죠. 그런데 외환위기 때는 일하던 회사 사장에게 속아 모았던 1300만원을 사기 당하고, 의료보험 적용을 못받는 위장수술까지 한 뒤 6개월 동안 일을 못하고 나니 완전히 빈털털이가 됐거든요.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죠. 한국에서 받은 차별대우도 인간으로서 겪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 차별을 없애기 위해 뭔가 하고 싶었어요. 그럼 딸한테 떳떳해질테니까….” 면회실에서 마숨 사무국장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라쥬 부위원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이주노동자들이 당당하게 스스로 싸움에 나서야 해요. 우리 권리는 우리가 찾는 거니까. 정부는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지만, 차별을 없애려고 노력한 게 문제인가요? 우리 입을 막는 건 명백한 노동탄압입니다.” 그는 최근 불법체류 합동단속으로 300여명이던 이주노조 조합원은 100여명으로 줄었다고 했다.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청주외국인보호소에서 나가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고 말하던 까지만 위원장과의 만남은 그날의 면회가 ‘마지막’이었다. 지난 14일 네팔에 도착한 그는 한국의 동지들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동지 여러분, 우리는 강제로 납치되듯, 아무도 모르게 14시간이 걸려 네팔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가게 돼서 미안합니다.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내가 범죄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네팔에서 한국으로 가는 이주노동자들을 교육하고 한국의 노동운동에 대해 알려줄 겁니다. 그렇게 연대하면 한국의 동지들을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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