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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힘내세요…죽지 마세요…하나가 되면 삽니다”

등록 2011-09-04 21:31수정 2011-09-05 11:10

이소선씨가 지난해 10월30일 저녁 서울광장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추모 40주기 문화제에서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이소선씨가 지난해 10월30일 저녁 서울광장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추모 40주기 문화제에서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이소선씨 힘겨웠던 삶
3살 작은 선녀란 이름 주신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일본군에 잡혀처형 당했다

어머니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1970년 11월13일 세상을 떠나기 전, 온몸에 붕대를 감은 아들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노동자들은 캄캄한 암흑세계에서 일하고 있는데, 나는 더 볼 수가 없었어요. 내가 죽어 작은 창구멍 하나 낼 테니까, 노동자·학생들과 힘을 합해 그 창구멍을 조금씩 넓히는 데 힘을 보태주세요. 어머니가 이걸 실천하지 않으면, 나를 지금까지 키운 것이 위선이 되는 거예요.”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을 보며 “내 몸이 가루가 돼도, 너와 약속한 것은 지킬게”라고 울부짖었다. 곧 아들의 숨은 끊어졌다. 전태일의 나이 스물두살, 어머니 이소선의 나이 마흔한살 때다. 이소선이 40년 넘게 ‘살아 있는 전태일’,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1929년 경북 달성군(현재 대구 달성군)에서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소선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다. ‘작은 선녀’라는 뜻의 ‘소선’이라는 이름도 아버지가 지어줬다. 아버지는 이소선이 세살 때 일본군에게 잡혀 처형을 당했다. 학교 문턱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이소선은 일제 강점기인 16살 때 방직공장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탈출하는 등 고단한 삶을 살았다. 18살에 남편 전상수씨와 결혼하고, 1년 뒤인 1948년에 장남 태일이가 태어났다. 부산의 옷 수선집 작업대 위에서 둘째 아들 태삼이를 낳을 정도로 이소선은 늘 가난에 시달렸다. 가족들은 대구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다시 서울로, 먹고살기 위해 떠돌아다녀야 했다.

아들 태일이가 서울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준수 등을 요구하며 스스로 몸을 불살라 숨진 뒤 이소선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자식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이소선을 노동현장에 뛰어들게 했다. 그 현장에서 이소선은 아들을 분노하게 했던 노동현실을 보며 똑같이 분노했다.

41살 22살 아들 하늘로 보내며 울부짖었다
“내 몸이 가루가 돼도 너와 약속 지킬게”

1970년 11월27일 ‘노동권’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던 시절, 전태일의 친구들과 이소선은 우리나라 민주노조운동의 불을 지핀 청계피복노조를 설립했다. 청계피복노조는 농성과 단식 등의 투쟁을 통해 하루 15시간에 이르던 노동시간을 줄여가고, 일주일에 하루 휴무를 얻어내는 등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해 나갔다. 이소선은 노조 고문 등으로 활동하면서 끼니를 거르는 노동자를 위해 만든 ‘노조 식당’에서 매일 국수를 삶는 등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또 헌옷을 주워다가 팔아 노조활동을 지원했다. 이소선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언제나 달려가 기댈 수 있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노동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이소선을 두려움을 모르는 투사로 만들었다. 청계피복노조 초기 노사협의회가 열리지 않자, 이소선은 대통령을 만나겠다며 청와대 앞에 온종일 쪼그려 앉았다. 사실상 ‘농성’이었다. 농성을 시작한 지 한달 만에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했고 노사협의회가 시작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청계피복노조의 성공으로 1970년대 원풍모방, 동일방직 등 민주노조가 곳곳에서 결성됐다. 위협을 느낀 군사독재 정권은 이소선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이소선은 1977년 6월 청계피복노조 일을 도와주던 장기표씨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된 뒤 열린 재판에서 판사를 향해 “당신들은 부모들이 소 팔고, 논 팔아 공부 갈차 노니까, 이따위밖에 재판을 못하냐. 힘없는 노동자를 도와준 게 죄라고 심문을 하냐”고 꾸짖었다.(구술 일대기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중에서) 이소선은 법정모독죄로 1년 동안 첫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클릭하면 확대)
이소선은 노동자들이 싸우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두려움 없이 맞섰다. 1978년엔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과 연대투쟁을 하다가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 “기독교회관에서 형사들이 내 두 다리를 잡고 질질 끌며 계단을 내려왔어. 등과 어깨가 계단에 쾅쾅 부딪쳤지. 난 죽지 않으려고 머리만을 바짝 쳐들고 1층까지 끌려왔어. 골병들지 않은 데가 없어.”(2009년 12월 <한겨레> 인터뷰 중에서) 이렇게 그의 몸은 멍들어갔지만, 이소선은 기꺼이 노동자들의 든든한 어머니가 됐다.

1986년에는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를 만들어 1993년까지 회장을 맡았다. 1989년 135일간의 의문사 진상규명 농성에 이어 1998~99년 의문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422일 동안 장기 농성을 벌였다. 의문사 특별법은 2000년 국회를 통과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씨는 회고록에서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들만이 할 수 있는 모성의 승리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80살 쌍용차 공장밖 도로아픈 몸 이끌고
번쩍 두팔 들어올리며 “우리가 있다. 힘내라”

이소선이 가장 간절히 원한 것은 노동자들의 단결이었다. “전체 노동자가 힘을 모아 인간다운 권리를 꼭 찾아야 합니다. 노동자 여러분, 힘내세요. 언젠가는 노동자가 승리합니다.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면 삽니다. 하나가 되면 이깁니다.”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나거나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을 하게 되면 언제나 ‘단결’을 외쳤다.

이소선은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어렵게 투쟁하는 사업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갔다. 지난 2009년 7월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쌍용차 노동자들이 장기 농성을 할 때도 이소선은 아픈 몸을 이끌고 그들을 찾아갔다. “공장 안에 있는 사람들 힘내세요. 절대 죽으면 안 되니까 소금 찍어서 밥 먹고 살아서 싸워 이겨야 해요.” 이소선은 공장 밖 도로에서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우리가 있다. 힘내라”고 소리쳤다.

이소선은 쓰러지기 직전인 지난 7월 초, 부산 한진중공업 85호기 크레인에서 농성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을 무척이나 걱정했다고 한다. “그 사람 어떤 생각으로 올라갔는지 다 알아. 김진숙 죽을까봐 걱정이 돼 잠을 못 자겠어. 제발 죽지 말고 내려와서 같이해요. 내려와요. 내 소원이야. 진숙씨 내 말 듣고 내려와요.” 다리가 너무 아파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어 부산에 내려가지 못했던 이소선은 영상을 통해 김 지도위원에게 ‘죽지 말라’고 호소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소선은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였다.

김소연 기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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