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으로 자유의 몸이 된 김진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14일 부산 사하구 오케이오병원 병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크레인서 309일’ 김진숙씨 병실 인터뷰
크레인 생활 어떻게
운전석 아래 바닥서 새우잠
바람 불때마다 흔들려 토해
봄 안개 낄때면 공포 엄습해 자살 유혹 들었던 순간은
내가 협상 어렵게 한다고
노조원과 간부 충돌할때
희생해야겠구나 생각해 앞으로 무슨 일 할 건가
몸 추스르면 민주노총 복귀
정치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라면과 매운탕 먹고 싶다 35m 높이 선박크레인 위에서 309일을 머물다 지상으로 내려온 지 닷새째인 14일 김진숙(51)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그는 전날 밤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법원이 기각하면서 사복 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나 땅 위에서 외부인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됐다. 부산 한 병원에 옮겨 입원한 그는 겉으론 건강해 보였지만 병실을 잠깐 나설 때마저 황이라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의 부축을 받아야 할 만큼 잘 걷지 못했다. 김 지도위원은 언론이 자신을 지나치게 조명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휴대전화도 꺼놓았다. 그를 만나러 병실로 찾아갔다. -크레인에서 내려온 지 닷새째다. 몸 상태는 어떤가? “아직 어지럽다. 걸으면 땅이 흔들리는 것 같다. 균형감각을 잡으려면 한 달 정도는 지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당분간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크레인에서 309일이나 지냈다. 크레인 위 생활은 어땠나? “운전석 앞 바닥에서 잠을 잤다. 1인용 침대 크기였다. 몸을 뒤척이다가 철판에 부딪혀 온몸에 멍이 들었다. 비 오는 날엔 물이 흘러내려서 이불이 흠뻑 젖었다. 크레인에서 사계절을 보냈는데 봄이 가장 힘들었다. 봄 안개가 너무나 무서웠다. 주변이 보이지 않아 공포감이 엄습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크레인이 흔들려서 토하기도 했다. 놀이기구를 탄 기분이었다. 뱃멀미에 적응하듯이 차츰 나아졌지만 참 힘들었다.”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했는데. “솔직히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다. 크레인을 내가 가져간 것도 아니고(웃음),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우려가 없는데 굳이 구속할까 생각했다. 내가 내려가면 경찰에 스스로 출석해 조사를 받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구속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법원이 상식에 맞게 결정했다고 본다.” -크레인에서 보낸 하루 일과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안 그래도 귀가 밝은 편인데, 언제 경찰력이 투입될지 몰라서 자다가 깨는 일이 허다했다. 선잠을 자다가 보통 새벽 5~6시에 눈을 떴다. 누워서 뒹굴다가 아침 7시께 일어나서, 마를 달인 차와 사과 1개를 먹었다.(김 지도위원은 지난해 1~2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방침에 맞서 24일 동안 부산 영도조선소 앞에서 단식을 한 뒤 위가 나빠졌다.) 아침 8시30분께 아래에서 아침이 올라오면 먹고서, 트위터를 했다. 책이 올라왔지만 집중되지 않아서 제대로 읽지 못했다. 트위터로 검색하고 글을 올리곤 했다. 오전 11시30분쯤 아래서 올려준 점심을 먹고 또 트위터를 했다. 오후 1시30분부터 3시30분까지는 크레인 위를 왔다 갔다 하며 운동을 하고 얼굴을 씻고 나서 나를 찾아온 손님을 향해 손을 흔들고 휴대전화 통화를 했다. 오후 5시30분쯤 저녁을 먹고 또 걸으며 운동했다. 저녁 7시30분에는 크레인 밖 도로 길가에서 날마다 열리는 문화제를 지켜봤다. 문화제가 끝나면 잠에 들 때까지 트위터를 했다.” -왜 트위터를 했나? “(웃으며) 크레인에 올라갈 때까진 트위터가 뭔지도 몰랐다. 나는 기계문명과 친하지 않다. 지금도 그렇다. 나한테 음식 등을 올려주던 황이라씨가 ‘트위터를 해보라’고 권유하며 스마트폰을 올려줬다. 처음엔 사용법을 몰랐다. 하나하나씩 해보면서 기능을 익혔다. 2월27일부터 본격적으로 트위터를 했다. 트위트를 여니까 수백명이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다. 정말 신기했다.” -배우 김여진씨(1차 희망버스 때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의 관심이 각별했는데. “김여진씨는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통해 알았으나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어느 날 트위터를 하는데 그가 말을 걸어왔다. 면식도 없는 나를 위해 부산까지 달려와주고 내가 크레인에서 내려오던 날도 마중을 와줘서 너무나 고맙다.” -크레인 위에서 트위터는 어떤 존재였나? “예전에 교도소 독방에 수감된 적이 있다. 한달쯤 지나니까 말을 못하겠더라. 신문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크레인에 처음 올라갔을 때 휴대전화만 썼는데, 어느날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계좌번호’라는 단어가 기억나지 않았다. 책과 사람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올라간 크레인에서 2003년 목을 맸던 김주익 열사도 그랬을 것 같았다. 이때 황씨가 아이폰을 올려주며 권유했다. 트위터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지도 모른다. 트위터는 내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또 트위터가 희망버스를 움직였다. 트위터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말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자살 유혹은 없었나? “솔직히 여러 번 있었다. 주익씨는 무던하고 늘 웃었다. 호인이었다. 그분의 장례식장에 갔는데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장례식장에 온 것을 보지 못했다. 그만큼 인품이 됐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주익씨가 129일 동안 홀로 크레인에서 농성을 하다가 자살했다. 난 당시 주익씨가 자살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내가 첫날 이곳에 올라와 보니까 그 심정이 이해가 되더라.”
-언제 자살을 떠올렸나?
“내가 크레인에 올라간 1월6일 노조 간부들이 노조원들과 충돌했다. 노조 간부들이 크레인에 접근하는 노조원들을 막은 것이다. 일부에선 내가 강경 일변도의 극단적 투쟁을 해서 협상을 어렵게 한다고 비난한다는 말을 듣고는 ‘누군가 희생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노조 집행부가 보고대회를 크레인 아래서 하지 않고 (떨어진) 단결의 광장에서 하는 것을 보면서도 (자살) 충동을 느꼈다. 상황 변화가 없을 때도 불쑥불쑥 그런 생각(자살)이 들었다. (옆에 있던 황씨를 가리키며) 그럴 때마다 크레인 아래에 있던 황씨를 보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가 그에게 ‘절대 안 죽는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노사가 잠정 합의안을 만들었을 때 정리해고자들의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겠다며 말을 아꼈다. 노사 합의안을 어떻게 생각하나?
“정리해고자들 입장에서는 100% 만족하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퇴직금과 학자금 문제에 불만이 많을 것이다. 나는 국회 권고안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근속 경력이 인정되는 재고용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리해고 철회라고 생각한다. 복귀를 기다리는 동안 주기로 한 2000만원의 생계비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 더구나 정동영 국회의원 등이 이번 일을 계기로 정리해고법을 바꾸는 데 나서겠다고 하니 기대된다. 이를 위해선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김 지도위원이 말을 멈췄다. 잠시 눈을 감았다. 눈가에 눈물이 비쳤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얘기를 꼭 지면에 실어달라”고 했다. “회사 쪽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던 쌍용차 노동자들이 벌써 19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이 2003년 김주익·곽재규 열사를 떠나보낸 뒤 아직도 아파하고 있는데, 다달이 장례를 치르는 쌍용차 노조원들의 심정은 오죽하겠는가.” 그는 “쌍용차 노동자들이 ‘소금길 천리길’에 나서는 등 희망버스를 물심양면 지원했다”며 “이제는 희망버스 핸들을 그들한테로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 고용 안정을 약속했던 회사가 정리해고를 강행한 것을 지켜본 정리해고 노동자들은 회사가 노사 합의안을 지킬지 의심도 하는데.
“과거엔 노사가 합의안을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국회가 중재했다. 회사 경영진이 이를 위반하면 경영진이 물러나야 할 것은 물론이고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본다.”
-앞으로 정치권에서 손짓할 것 같은데.
“벌써 내가 정치권에 발을 디딜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고 들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몸을 추스르면 크레인에 오르기 전까지 맡았던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책무를 열심히 할 것이다. 이미 10여년 전 민주노동당이 비례대표 1번을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거절했다.(심상정 전 의원이 1번을 받아서 당선됐다.) 정치를 하려면 마음이 없는 말도 해야 하고 한나라당 의원들과도 악수를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성정이 못 된다.”
김 지도위원은 “몸이 나으면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싶다. 위가 나으면 라면과 매운탕도 먹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부산/글·사진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운전석 아래 바닥서 새우잠
바람 불때마다 흔들려 토해
봄 안개 낄때면 공포 엄습해 자살 유혹 들었던 순간은
내가 협상 어렵게 한다고
노조원과 간부 충돌할때
희생해야겠구나 생각해 앞으로 무슨 일 할 건가
몸 추스르면 민주노총 복귀
정치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라면과 매운탕 먹고 싶다 35m 높이 선박크레인 위에서 309일을 머물다 지상으로 내려온 지 닷새째인 14일 김진숙(51)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그는 전날 밤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법원이 기각하면서 사복 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나 땅 위에서 외부인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됐다. 부산 한 병원에 옮겨 입원한 그는 겉으론 건강해 보였지만 병실을 잠깐 나설 때마저 황이라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의 부축을 받아야 할 만큼 잘 걷지 못했다. 김 지도위원은 언론이 자신을 지나치게 조명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휴대전화도 꺼놓았다. 그를 만나러 병실로 찾아갔다. -크레인에서 내려온 지 닷새째다. 몸 상태는 어떤가? “아직 어지럽다. 걸으면 땅이 흔들리는 것 같다. 균형감각을 잡으려면 한 달 정도는 지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당분간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크레인에서 309일이나 지냈다. 크레인 위 생활은 어땠나? “운전석 앞 바닥에서 잠을 잤다. 1인용 침대 크기였다. 몸을 뒤척이다가 철판에 부딪혀 온몸에 멍이 들었다. 비 오는 날엔 물이 흘러내려서 이불이 흠뻑 젖었다. 크레인에서 사계절을 보냈는데 봄이 가장 힘들었다. 봄 안개가 너무나 무서웠다. 주변이 보이지 않아 공포감이 엄습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크레인이 흔들려서 토하기도 했다. 놀이기구를 탄 기분이었다. 뱃멀미에 적응하듯이 차츰 나아졌지만 참 힘들었다.”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했는데. “솔직히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다. 크레인을 내가 가져간 것도 아니고(웃음),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우려가 없는데 굳이 구속할까 생각했다. 내가 내려가면 경찰에 스스로 출석해 조사를 받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구속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법원이 상식에 맞게 결정했다고 본다.” -크레인에서 보낸 하루 일과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안 그래도 귀가 밝은 편인데, 언제 경찰력이 투입될지 몰라서 자다가 깨는 일이 허다했다. 선잠을 자다가 보통 새벽 5~6시에 눈을 떴다. 누워서 뒹굴다가 아침 7시께 일어나서, 마를 달인 차와 사과 1개를 먹었다.(김 지도위원은 지난해 1~2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방침에 맞서 24일 동안 부산 영도조선소 앞에서 단식을 한 뒤 위가 나빠졌다.) 아침 8시30분께 아래에서 아침이 올라오면 먹고서, 트위터를 했다. 책이 올라왔지만 집중되지 않아서 제대로 읽지 못했다. 트위터로 검색하고 글을 올리곤 했다. 오전 11시30분쯤 아래서 올려준 점심을 먹고 또 트위터를 했다. 오후 1시30분부터 3시30분까지는 크레인 위를 왔다 갔다 하며 운동을 하고 얼굴을 씻고 나서 나를 찾아온 손님을 향해 손을 흔들고 휴대전화 통화를 했다. 오후 5시30분쯤 저녁을 먹고 또 걸으며 운동했다. 저녁 7시30분에는 크레인 밖 도로 길가에서 날마다 열리는 문화제를 지켜봤다. 문화제가 끝나면 잠에 들 때까지 트위터를 했다.” -왜 트위터를 했나? “(웃으며) 크레인에 올라갈 때까진 트위터가 뭔지도 몰랐다. 나는 기계문명과 친하지 않다. 지금도 그렇다. 나한테 음식 등을 올려주던 황이라씨가 ‘트위터를 해보라’고 권유하며 스마트폰을 올려줬다. 처음엔 사용법을 몰랐다. 하나하나씩 해보면서 기능을 익혔다. 2월27일부터 본격적으로 트위터를 했다. 트위트를 여니까 수백명이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다. 정말 신기했다.” -배우 김여진씨(1차 희망버스 때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의 관심이 각별했는데. “김여진씨는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통해 알았으나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어느 날 트위터를 하는데 그가 말을 걸어왔다. 면식도 없는 나를 위해 부산까지 달려와주고 내가 크레인에서 내려오던 날도 마중을 와줘서 너무나 고맙다.” -크레인 위에서 트위터는 어떤 존재였나? “예전에 교도소 독방에 수감된 적이 있다. 한달쯤 지나니까 말을 못하겠더라. 신문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크레인에 처음 올라갔을 때 휴대전화만 썼는데, 어느날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계좌번호’라는 단어가 기억나지 않았다. 책과 사람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올라간 크레인에서 2003년 목을 맸던 김주익 열사도 그랬을 것 같았다. 이때 황씨가 아이폰을 올려주며 권유했다. 트위터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지도 모른다. 트위터는 내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또 트위터가 희망버스를 움직였다. 트위터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말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자살 유혹은 없었나? “솔직히 여러 번 있었다. 주익씨는 무던하고 늘 웃었다. 호인이었다. 그분의 장례식장에 갔는데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장례식장에 온 것을 보지 못했다. 그만큼 인품이 됐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주익씨가 129일 동안 홀로 크레인에서 농성을 하다가 자살했다. 난 당시 주익씨가 자살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내가 첫날 이곳에 올라와 보니까 그 심정이 이해가 되더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벌이던 85호 선박 크레인의 높이 35m에 있는 운전석 내부.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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