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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2000일씩이나 됐는데 억울하잖아요”

등록 2013-06-07 20:17수정 2013-06-08 13:16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성당 종탑 위 고공농성장에 만난 여민희·오수영씨. 두 사람은 최장기 비정규직 투쟁사업장인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재능교육지부 소속 조합원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A href="mailto:khan@hani.co.kr">khan@hani.co.kr</A>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성당 종탑 위 고공농성장에 만난 여민희·오수영씨. 두 사람은 최장기 비정규직 투쟁사업장인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재능교육지부 소속 조합원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커버스토리]종탑 위 재능교육 조합원들
단체협약 원상회복과
해고자 전원복직 요구하는
최장기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
임금 받으며 일하면서도
노동자로는 인정 못 받는
특수고용직 설움은 계속됐다

원래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성당의 계단은 4층 높이의 종탑까지만 이어져 있었다. 그 위로 올라가려면 콘크리트 벽에 ‘ㄷ’자 형태로 얼기설기 박아놓은 녹슨 철근을 손으로 하나씩 더듬어가며 벽을 타야 했다. 마지막 철근을 잡은 채 종탑 밖으로 몸을 빼니 한평 반 남짓한 공간이 펼쳐졌다.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재능교육지부 조합원 여민희(39), 오수영(38)씨의 고공농성장이다.

“사람이 올라왔던 흔적은 없었어요. 저기 피뢰침 관리를 위해 드나들겠다고 덮개식 문을 만들어놓은 것 같은데, 오랫동안 열지 않았는지 문을 고정해놓았던 철사에 녹이 많았어요.” 오씨의 손끝은 성당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매달린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십자가 끝에 매달린 작은 피뢰침이 보였다.

지난 6일 오전 ‘재능교육 선생님’이었던 여민희, 오수영씨를 피뢰침 옆에서 만났다. 계단도, 난간도 없는 그곳에 두 사람은 용케도 소형 텐트를 쳐놓았다. 이날은 두 사람이 고공농성을 벌인 지 121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계절은 겨울에서 봄, 다시 여름으로 바뀌었다. 재능교육지부 농성은 1995일째다. 지난 2월26일 농성 1895일을 넘기며 한때 기륭전자분회가 갖고 있던 ‘최장기 비정규직 투쟁사업장’ 이름은 재능교육지부가 물려받았다.

“단체협약 원상회복과 해고자 전원복직 등 두 가지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면 내려갈 거예요. 지난 2월 처음 올라올 때만 해도 농성 2000일째가 되기 전에는 내려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넉달을 넘길 줄은 몰랐어요.”

오씨가 말한 단협 원상회복과 해고자 11명 전원복직은 사실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재능교육지부의 이런 요구 속에는 노동자이면서 노동자 취급을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설움이 녹아 있다. 특수고용직 노동자란 사업주에게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노동자이면서도, 법적으로는 개인사업자나 위탁계약자로 분류돼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등 노동관련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이들을 가리킨다. 당연히 근무 중 다쳐도 산재보험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여씨와 오씨 등 학습지교사나 화물차 운전자, 퀵서비스 기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등이 대표적인 특수고용직 노동자다. 노동계는 이런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25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7년 12월21일 이 싸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 요구는 임금제도 개선이었어요. 우리가 재능교육 노조(재능교육지부)를 만든 것이 1999년 11월이었고, 그해 12월 노동부로부터 정식 설립신고 필증까지 받았으니 엄연한 합법 노조인데도 회사는 느닷없이 단협을 파기하고 선생님들에게 노조 탈퇴를 강요했어요. 노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였어요.” 오씨의 설명이었다.

2000일 가까이 싸우는 동안 노사간 불신이 싹텄다. 재능교육 사쪽은 지난해 8월28일 재능교육지부와의 협상 과정에서 노조에 대한 20억원 손해배상 청구소송 철회와 해고자 복직을 약속했다. 재능교육지부가 회사안을 받아들이면 단협 원상회복도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노사 양쪽의 입장이 거의 일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여씨의 설명이다.

“농성 투쟁 이전인 2007년만 해도 우리는 단협도 있는 노조였고, 다들 멀쩡히 근무하던 선생님이었어요. 원래 있던 단협도 일방적으로 없앤 건 회사잖아요. 이제 와서 ‘현장에 복귀해야 단협 체결을 논의할 수 있다’고 말하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2000일 가까이 되는 장기투쟁은 여씨의 가슴 한구석에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마음’, 억울함을 낳았다. “2000일씩이나 됐는데 억울할 수밖에 없잖아요. 노조 만들겠다고 한 뒤로 정사원이 될 수 있는 기회도 몇번씩 포기했어요. 저는 그냥 학습지교사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 노동조합이 있는 재능교육에, 노동자의 이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재능교육지부의 오랜 투쟁은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암담한 현실을 알리는 구실도 했다. 당장 정부는 지난 5월26일 특수고용직 노동자도 4대 보험(국민연금·건강보험·고용보험·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충남 부여군 조합공동사업법인을 방문한 자리에서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시간제 일자리 확대 정책을 설명하며 특수고용직 노동자에 대한 처우 개선도 약속했다. 현 부총리는 이날 기자 간담회를 열어 “특수직 노동자들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해줘야 한다. 이들에 대한 임금과 보험의 차별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오씨는 정부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당장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앞으로 어떤 구체적인 추진계획을 내놓는지 살펴봐야 해요. 참여정부 때도, 이명박 정부 때도 특수고용직 노동자에게 4대 보험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문제는 현실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는 것이었는데, 이번 정부는 어떤 구체적 해법을 내놓을지 모르겠어요.”

참여정부는 2007년 특수고용직 4개 직군(레미콘기사·학습지교사·골프장 경기보조원·보험모집인)의 산재보험 가입을 허용했는데, 그 내용은 사업주가 내야 할 보험료를 절반 깎아주는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강제가입이 아니라 임의탈퇴가 가능하도록 한 탓에 현재 이들 4개 직군의 산재보험 가입률은 8.3%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부도 2011년 7월 택배·퀵서비스 기사의 산재보험 확대적용 대책을 내놓았다. 문제는 역시 가입 방식이었다. 택배기사는 산재보험료를 사업주와 노동자가 5 대 5로, 퀵서비스 기사는 보험료 전액을 노동자가 내도록 했다. 원래 보험료 전액을 사업주가 부담하는 산재보험은 강제가입이 원칙인데, 택배기사는 임의탈퇴가 가능하도록 했고 퀵서비스 기사는 아예 임의가입 형태였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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