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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해고자 없어져 ‘3호 방송차’와 함께 실직하고 싶습니다”

등록 2015-02-12 21:25수정 2015-02-12 22:20

전해투 이호동 위원장
전해투 이호동 위원장
[짬] 투쟁기금 모금 캠페인 나선
전해투 이호동 위원장
올해로 22년째, 출범 때부터 ‘해체’를 목표로 줄기차게 활동해온 단체가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해고자복직투쟁특별위원회(약칭 전해투)라는 긴 이름의 노동자 연대기구다. 1991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전국해고노동자모임으로 시작해 93년 결성된 전국해고자복직투쟁위가 모태다. 95년 민주노총 창립으로 산하기구를 겸하게 된 전해투는 7천여만원의 기금을 모아 상경투쟁을 하는 지역 해고자를 지원하는 농성장과 중고 승합차를 한 대 장만했다. 앰프와 스피커를 달아 거리투쟁을 격려하는 홍보활동에 나서면서 ‘방송차’로 불리게 됐다. 이 ‘1호 방송차’는 10년간 소임을 다한 뒤 폐차됐고, 전해투는 2006년 투쟁기금과 벌금 지원을 위한 모금 캠페인을 벌여 ‘2호 방송차’를 마련했다. 역시 중고 승합차(스타렉스)였던 2호 방송차는 8년간 24만㎞를 달린 끝에 ‘명예퇴직’을 앞두고 있다.

1996년 기금 모아 ‘1호 방송차’ 장만
2006년 중고 ‘2호차’도 수명다해
민주노동운동권 ‘공용 애마’로 제공

2002년 발전노조 ‘38일 파업’ 이끌어
해고자 347명 복귀한 뒤 홀로 책임
“노동자 연대 상징 방송차 함께 마련을”

“언제부터인지 방송차는 전해투 소유가 아니라 민주노동운동판의 ‘애마’로 공용차가 됐거든요. 특히 투쟁 현장에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연대의 상징’이지예. 그래서 전체 노동자와 민주시민들의 정성과 뜻을 모아 새로 마련할라꼬 합니다.”

전해투 이호동(49·사진) 위원장이 최근 ‘3호 방송차’를 포함한 투쟁기금 모금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취지다.

‘현대차 노조나, 기아차 노조나, 지엠대우차 노조에서 한 대 턱 내놔 주면 좋겠지만, 그렇게 손쉽게 구할 차가 아니라는 생각이랍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바퀴 한 짝, 전조등 하나가 되어 달리는 차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전해투가 그런 사람들의 조직으로 우뚝 서라는 참여와 관심, 응원의 과정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 차를 한가롭게 내버려두면 되겠느냐고, 이제 다시 우리 노동자들의 소리가 필요한 곳으로 어서 가자고, 슁슁 달리는 노동자-민중 투쟁의 힘찬 엔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송경동 시인은 ‘전해투 방송차와 투쟁용품 마련을 위한 후원 모금’ 안내문에서 “오래된 빚을 갚을 기회를 얻었다”고 소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방송차는 전화 한 통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려오는’ 24시간 상시 대기에, 원하면 ‘20~30년 투쟁 경력의 전설 같은 노동운동 선배’인 전해투의 간부들이 기꺼이 무료 대리기사로 무한봉사를 제공했다. 얼마 전 기륭전자가 중심이 된 ‘비정규직 법제도 전면폐기’ 오체투지 행진 때는 전해투 회원인 백형근씨가 방송차를 지키다 차 유리를 깨고 들어온 경찰들에 연행되어 구속된 상태다. 더구나 반납할 때 기름이라도 채워두면 “고맙다”고 되레 인사까지 받으니, 한번이라도 신세를 진 이들이라면 기꺼이 십시일반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금 속도는 예상보다 더딘 편이다. 그만큼 해고노동자를 비롯한 노동 투쟁 현장의 상황이 녹록지 않은 탓이다. “10년 넘도록 ‘해고자 졸업’은커녕 위원장도 ‘재수’를 하고 있다 아닙니꺼 ㅎㅎㅎ….” 경북 포항 출신으로 경상도 억양이 살짝 남아 있는 이 위원장의 목소리에서는 실망보다는 ‘낙관’이 담겨 있다.

그는 이래저래 ‘방송차’와 인연이 깊다.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그는 88년 한국전력에 입사한 뒤 2002년 한국발전산업노조 위원장이자 ‘국가 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공투본’ 공동대표로서 전력산업 구조개편 반대 ‘38일간 파업’을 이끌다 구속됐다. 이후 석방과 더불어 해고자 348명의 대표로 복직 투쟁에 나선 그는 2006년 발전해복투·공공부문해복투위(공해투) 위원장이자 전해투 위원장을 맡아 3년간 활동했다. 그때 ‘2호 방송차’ 모금을 주도했던 그는 2012년부터 전해투 대표로 다시 돌아왔다.

그사이 ‘38일간 파업’ 해고 동지 가운데 347명은 모두 복직되거나 새 길을 찾아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그는 홀로 ‘불법파업’의 책임을 지고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받아 ‘졸업’을 할 수 없게 됐다. “그나마 2005년 사면·복권을 받았으요, 그 유명한 ‘광복절 특사’ 주인공이라예.”

94년부터 한전노조 민주화 활동에 참여해 96년 노민추(김시자 열사 정신계승 및 한전노조 민주화추진위원회) 추진위원으로 노동운동에 본격 뛰어든 그는 2002년 파업 때 명동성당 농성을 끝내고 구속을 앞둔 상황에서도 특유의 ‘낙관 화법’으로 화제를 모았다. “사람들이 그라데요. 한 3년 구형 받을 거라고요. 감옥에 가면 담배 참기가 가장 어렵다는데 전 담배를 피울 줄 몰라서 상관없을 거 같아요.”

그때 다행히 수감 몇 달 만에 석방된 그는 복직투쟁 운동의 와중에도 대학원에 진학해 ‘노사관계의 해법’을 7년간 연구하기도 했다. 2004년 말 민주노총 공공연맹 위원장 임기를 마치면서 ‘해고자, 비정규직과 함께하는 활동’을 하겠다고 ‘공약’한 그는 2006년 서울 삼성동 한전 본사 앞에서 발전노조 천막설치 투쟁을 사수하다 부상당해 입원하는 등 작은 몸을 사리지 않으며 현장을 지켜왔다.

서울 정동 민주노총 본부 건물 13층에 자리한 전해투는 방송차만이 아니라 사무실까지 ‘노동자-민중 연대 투쟁의 공간’으로 개방해두고 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 때 무상입주한 ‘희망버스’를 비롯해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 현대차 비정규직공대위,보건복지개발원비정규직공대위, 밀양 송전탑, 유성, 쌍용차 희망버스, 세월호 진상규명, 사이버사찰 대응 등 갖가지 투쟁 논의가 이뤄지는 ‘산실’이 되고 있다. “위원장 자리의 컴퓨터도 누구든지 먼저 앉으면 임자라예.”

그 자신 복직의 길은 막혔지만 “수천명 해고노동자들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복직해서” 전해투가 더 이상 필요없는 세상이 오기를, 그래서 위원장에서 ‘자동 해고’되기를 그는 진정으로 바란다고 했다. 노동자투쟁연대 후원계좌(110-417-870332·신한은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사진 전해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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