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뒤 전국철도노조 서울본부 KTX 승무지부 김승하 지부장이 법정 앞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지금은 세살·다섯살배기 두 아들의 엄마가 된 오미선(36)씨한테 11년 전 고속철도(KTX)는 꿈의 첫 직장이었다. 우리 나이로 스물여섯이던 2004년 1월 공채 1기로 채용된 뒤 철도청(현재 코레일)의 경영연수원에 모여 승무 교육을 받았다. 그해 4월 고속철도가 본격 개통된 뒤 대전·대구·부산·광주 등의 노선을 하루에 한 차례씩 뛰었다. 무전기로 연결된 코레일 정규직인 열차팀장의 지시를 실시간으로 받으며 고속열차 승객의 안전과 편의를 살피고 객실을 돌았다. “1~2년 지나면 철도청 직원 수준의 대우를 해준다”는 회사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씨를 비롯한 고속열차 여승무원의 소속은 철도청이 아니었다. 고용주는 철도청에서 일하다 퇴직한 이들과 순직자 유가족의 원호사업을 위해 만들어진 홍익회였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공공기관의 정원이 느는 걸 막겠다며 이른바 ‘비핵심 업무’를 외주화하는 방침을 밀어붙였다. “열차 승무원 중 안내원의 업무는 파견법이 규정한 파견 대상 업무가 아니고, 독립적 업무 수행이 어려워 도급 대상 업무가 아니다”라는 노동부의 의견은 묵살됐다.
직접고용을 기대한 여승무원들한테 철도청은 이듬해 철도청이 100% 출자한 한국철도유통으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여승무원들은 홍익회에서의 열달짜리 근로계약에 이어 2005년 말을 시한으로 하는 단기계약을 맺어야 했다. 2006년 5월이 되자 철도유통은 여승무원들한테 철도청이 지분 51%를 가진 자회사 ‘케이티엑스관광레저’로 또 옮기라고 요구했다.
결국 오씨를 비롯한 고속철도 여승무원들은 이를 거부하고 파업에 들어갔다. 철도청은 전원 해고로 응수했다. 오씨는 26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안전 관련 업무이고 코레일 정규직과 같은 업무를 수행하는데도 직접고용하지 않고 계속 자회사를 전전하게 해 파업에 나섰다”고 회고했다. 삭발과 단식, 거리농성까지 여승무원들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권리를 찾으려 했으나, 정부와 코레일은 힘으로 누르거나 무시했다.
일터에서 쫓겨난 여승무원들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법의 문을 두드렸다. 1·2심 재판부는 오씨 등 여승무원 34명의 손을 들어줬다. 이들 법원은 “여승무원과 철도유통 사이의 업무 위탁은 위장도급에 해당해 직접 코레일이 여승무원을 채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철도유통은 도급회사로서 실체가 없고 이들 여성 노동자는 코레일 정규직인 열차팀장의 직접 지휘를 받았으므로 철도유통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2005년 1월부터 이미 코레일에 소속된 노동자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불안의 그림자는 추가로 소송을 낸 여승무원 115명에 대한 서울고법의 2012년 10월 판결에서 시작됐다. 여승무원 34명과 같은 사건이고 1심에서 승소한 115명한테 고법은 “여승무원과 철도청·코레일 사이에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성립돼 있다고 평가하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마침내 26일 대법원이 각각 여승무원 34명과 115명이 낸 소송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놨다. 결론은 34명 사건에 대한 하급심의 판단이 잘못됐고, 고속철도 여승무원은 코레일 직원으로 보기 어렵고 불법파견도 아니라는 115명에 대한 서울고법의 판결은 타당하다는 것이다.
9년 전 해고된 전직 여승무원이자 아이 엄마가 울먹이며 말했다. “대법원 판결을 납득할 수 없어요. 만약 이겼다면 여승무원 상당수가 일터로 돌아갈 텐데…. 국민들이 우리가 지금껏 얘기한 게 거짓이라 여길 거 같아 억울하죠.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누가 얘기 좀 해주면 좋겠어요.”
전종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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