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는 노동절인 지난 5월1일 ‘3년 전 만난 해고노동자들…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뒤 세상을 등진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자리에 모였던 또다른 해고노동자 13명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기획이었습니다.
한겨레는 그 후속 기획으로 13명의 해고노동자들 개개인의 세밀한 삶을 글과 사진으로 전하기로 했습니다. 이 기획은
‘다음 뉴스펀딩’을 통해서도 소개됩니다. 뉴스펀딩은 독자들의 후원을 받아 독자와 함께 기사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 생산 방식입니다.
한겨레와 다음은 뉴스펀딩을 통해 모아지는 후원금을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고통받는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단체인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잡고)에 전달할 것입니다. 1만원 이상 후원해주신 분들은 해고노동자 13명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초대가수의 공연을 볼 수 있는 토크콘서트에 초청할 계획입니다.
근로기준법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조항을 꼽으라면 노동계는 23조를 말한다.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 휴직, 정직, 전직, 감봉, 그 밖의 징벌을 하지 못한다.” 해고는 노동자들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기 때문에 법은 ‘정당한 이유’ 없는 해고를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조조정 압력을 받은 정부는 1998년 정리해고를 도입했다. 근로기준법의 정리해고 요건은 4가지다.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 합리적이고 공정한 해고 대상자 선정, 해고 회피 노력, (노동자 과반수가 참여한 노동조합 또는 노동자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와의) 사전 통보와 협의. 이중 법원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요건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다. 그런데 법원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에 대한 해석을 ‘인원 감축의 객관적 합리성→장래의 위기→일부 사업 부문의 손실→경영 판단’으로 계속 확대했다. 정리해고 소송에서 노동자 보다 회사의 입장이 존중되다보니 법원에서 “정리해고 무효” 판결을 받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렇게 애매모호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로 해고당한 당사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내가 왜 해고됐는지 모르겠다”다. 부당해고라도 어쨌든 회사에서 이유라도 설명하는 징계해고와 달리 정리해고는 “회사가 어렵다”는 말 외에는 듣기 어렵다. 그래서 정리해고자들은 한 번 정규직 일자리에서 밀려나면 갈 곳이 없다는 경제적 이유뿐 아니라 “내 잘못이 아니다”는 억울함 때문에 복직 투쟁에 나선다. 하지만 국회, 법원, 사회, 회사의 외면 속에 이들의 투쟁은 1년, 2년, 5년, 10년씩 길어지고 깊어진다. 10년간 싸우다보니 ‘민주노총 최장기 투쟁 사업장’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던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투쟁위원회처럼.
최일배씨는 복직을 위해 10년을 싸웠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1992년 코오롱 구미공장에 취직한 최일배(47)씨는 13년 뒤인 2005년 회사에서 정리해고됐다. 당시 코오롱 구미공장은 ‘경영악화’를 이유로 78명을 공장 밖으로 내보냈다. 쫓겨난 최씨는 해고자들과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투쟁위원회’를 만들었다. 단식, 농성, 집회를 반복하던 해고자들에게 2008년 9월 대법원은 “정리해고가 부당하지 않다”고 선고했다. 고되고 외로운 세월이었다. 2014년 최씨와 함께 남은 해고자는 12명에 그쳤다.
2014년 11월 “10년은 넘고싶지 않다”며 최씨는 40일간 곡기를 끊었다. 40일째가 되던 날에는 병원에 실려갔다. 그렇게 마지막을 쏟아부은 해고자들은 그해 12월 회사와 노사문화 발전기금을 만들어 정리해고자를 위해 쓰기로 합의하고 긴싸움을 접었다. “후회없이 싸웠고, 우리가 할 수 있는 120%를 다 쏟아부었어요. 복직을 얻어내진 못했으니 아름다운 합의라고 할 수는 없겠죠. 아쉬움은 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어요.”
사실 그 ‘아쉬움’은 이들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 “다 쏟아붓고 나면 시원할 줄 알았어요, 졌다고 인정할 줄 알았죠. 근데 지금 끝내기는 너무 아쉽고 억울한거에요.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매번 ‘이게 정말 마지막이다’는 마음으로 한 건데, 잘 안되면 그게 또 아쉽고. 그렇게 10년이 갔어요.”
최씨는 구미로 돌아왔다. 직책은 맡았지만 코오롱 복직 투쟁 탓에 집중하지 못했던 민주노총 구미지부 조직부장으로. 자신과 해고된 동료들을 위해 싸우던 그는 이제 모든 노동자를 위해 뛰고 있다. “구미가 1998년~2001년까지만 해도 노동운동이 활발했는데 2004년부터 서서히 흔들렸어요. 섬유 경기도 나빠지고 민주노총 소속 노조 활동도 어려워졌고요. 구미의 노동운동을 과거에 왕성했던 때로 돌리고 싶어요.”
변성민씨에게 해고는 큰 상처로 남아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끝난 싸움’이라도 해고의 상처는 깊다. 대우자동차판매(대우자판) 정리해고자였던 변성민(45)씨는 인터뷰 중 “더 안 물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우자판은 지엠대우 자동차를 판매하는 대리점을 운영했다. 그런데 지엠대우가 자동차 판매권을 도로 가져가면서, 2011년 대우자판은 판매직 노동자 220여명을 해고했다. “2년 동안 집에 들어간 날을 다 합치면 한 달밖에 안돼요. 220명 중 생계가 힘들어서 포기한 사람이 120명이나 됐으니 힘든 시간이었죠. 외환위기 때도 적자가 안났던 알짜배기 회사였는데, 대우자판의 건설 사업이 힘들어지자 지엠대우에 줘야할 판매 대금을 주지 않으면서 판매권을 빼앗긴거죠. 잘못은 회사가 했는데 그 피해는 노동자들의 몫이었어요.”
대법원은 여지없이 회사 쪽 손을 들어줬다. 그래도 2년을 버틴 끝에 2013년 새 회사가 운영하는 울산 버스공장 채용이라는 합의를 끌어냈다. 하지만 정규직은 아니었다. 합의 뒤 변씨는 울산공장에 가는 대신 의료연대본부 서울지부에서 노조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노조일이 제 삶의 전부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려면 국민 대다수인 노동자의 삶이 나아져야 하고 그 핵심에 노동조합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임금·단체협약 교섭이 한창인 요즘 변씨는 늘 바빴다.
합의 도장을 찍었다고 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해서 과거가 지워지지는 않았다. “합의할 때 며칠 동안 많이 울었어요. 아쉽고, 아쉬웠거든요. 할만큼 했다고 말하지만 위로가 안됐어요. 시간 지나 생각하니 더 싸워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송기웅씨는 복직했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복직하고 제일 먼저 한게 해고자들이 돈을 모아 신분보장기금을 만든 거에요. 언젠가 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요. 4년10개월 싸우다보니 돈이 없으면 안되겠더라고요.” 포레시아배기시스템코리아(포레시아) 노동자 송기웅(46)씨는 정리해고로는 드물게 대법원에서 부당해고를 인정받아 지난해 4월 복직했다. 1년째 다시 회사에서 자동차 머플러를 만들고 있지만, 정리해고의 경험은 그의 마음 속에 ‘불안’을 심었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포레시아는 2009년 5월26일 26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했다. 이중 19명이 복직 투쟁을 나섰고, 10명이 공장 앞에 천막 농성을 세웠다. 돌아가면서 대리기사 등 일용직으로 생계 활동에 뛰어들었다. 해고는 도둑처럼 찾아왔다. 한 푼없이 복직 투쟁을 이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줄일 수 있는게 식비더라고요. 그래서 10명이서 하루에 1000원, 2000원 정도로 식비를 썼어요. 참치 하나에 김치 놓고 밥이랑 먹으면 끝이었죠.”
‘고생 끝의 낙’이 포레시아 해고자들에게 찾아왔다. 2014년 3월27일 대법원은 해고자들이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구제재심판정취소’ 소송에서 “정리해고는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지방노동위원회·중앙노동위원회·서울행정법원까지 패소했던 소송이 서울고법에 이어 대법원에서 승소로 뒤집힌 것이다. 대법원은 포레시아와 노조가 2008년에 맺은 ‘고용보장 확약’을 근거로 “사용자가 노동조합과 정리해고를 제한하기로 하는 단체협약을 체결했다면…그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정리해고는 원칙적으로 정당한 해고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4년10개월을 “이긴다”는 믿음으로 버틴 송씨였지만 ‘마지막’이 될수도 있는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10일 간 잠을 못잤다. 서울고법이 해고자 손을 들어줬지만 “파기환송되면…”이라는 가정이 그를 괴롭혔다. 회사의 당당한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다. 패소하면 떠맡게 될 회사쪽 소송 비용도 그를 짓눌렀다. 회사쪽 법률대리인은 김앤장이었다. “결국 판결 날 저 혼자 쓰러졌어요. 그 말 한마디에 끝나는 거잖아요. 선고하는 데 고개도 못 들겠고, 선고 듣고도 나와서 다리가 풀리고.”
그러나 해고 노동자의 복직은 동화 속 해피엔딩과 같지 않다. 송씨가 속했던 금속노조 포레시아지회는 정리해고를 겪으면서 110명이던 조합원이 20명으로 크게 줄었다. 그만큼 노조의 힘과 목소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 “정리해고 한 번 되고나니까 승소해서 복직해도 어차피 소수 노조에요. 회사가 ‘너네 노조하면 저렇게 정리해고 된다’는 걸 보여줬잖아요. 그러니까 노동강도가 심하고 불만이 있어도 다들 말을 못해요.”
포레시아가 복직하고 1년 뒤인 지난 3월, 포레시아에서 자동차로 1시간 떨어진 경기도 이천시 하이디스테크놀로지에서 79명이 정리해고됐다. 포레시아 같은 경기도 중소기업이었다. 같은 금속노조 소속 노조라 마음은 아프고 신경은 쓰이지만 일에 치여 한 번 가보지 못했다. “쌍용차 같은 대기업은 정리해고 되면 그래도 주목을 많이 받지만 우리나 하이디스 같은 중소기업은 이슈가 안되요. 그래도 본인들이 억울하니까 그 긴 시간에도 떠나지 못하고 싸우는거죠.”
글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