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 평화지퍼 대표.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짬] 캄보디아 교육 기부 평화지퍼 이승철 대표
삼동친목회 결성때 서기 맡아
70년대 청계피복 노조 이끌어 한국희망재단에 1억 내놓아
캄보디아 낡은 학교에 새 건물
“장학금 지원도 계속 할 것” 이 대표는 전태일(1948~70)의 친구다. 알고 지낸 시기는 딱 두 달이다. 70년 추석 이후 친구 최종인의 소개로 태일을 만났다. 태일은 그해 11월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몸을 불살랐다. 이 두 달은 두 친구의 삶에서 결정적인 시기였다. 69년 6월 바보회 결성 이후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 좌절을 경험한 태일은 1년 만에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9월에 12명의 재단사와 함께 삼동친목회를 만든다. 진정과 호소에 무게중심을 둔 바보회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투쟁 전망을 가진 조직이었다. 태일은 회장, 승철은 서기에 뽑혔다. 그 뒤 두 달, 많은 일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실태 설문조사, 노동청 진정, 첫 언론 보도의 감격 그리고 시위. 그는 전태일을 만나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태일이가 죽은 직후 장기표(현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김문수(전 경기도지사)씨와 같은 지식인들과 만나면서 의식이 바뀌었죠. 그 전엔 기술을 배워 돈을 많이 벌자고 생각했다면 차츰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음엔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내가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지요.” 그는 70년 11월27일 청계피복노조 결성을 이끌었다. 이듬해 2월부턴 아예 노조 상근을 했다. 전두환 정권이 81년 노조를 강제 해산할 때까지 그는 늘 노조의 중심에 있었다. 81년엔 옥고도 치렀다. 70년 12월부터 결혼식을 올린 77년 4월23일 전날까지 그는 전태일의 어머니 고 이소선씨 집에서 살았다. 노조 활동에 매달리느라 돈벌이를 못했던 탓이다. 어머니에게 교통비를 받아 쓰기도 했다. 신혼집도 어머니의 쌍문동 판잣집 옆에 구했다. 그렇게 노동운동 현장을 지키던 이 대표는 84년 1월 ‘노동운동’ 대신 생활을 택했다. 지퍼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한때 직원을 10명까지 쓴 적도 있지만 지금은 직원 5명에 매출은 연 30억원가량 된다. “태일이나 어머니에게 항상 마음의 죄를 짓는 것 같았죠.” 교육 기부에 나선 데는 그런 부채감도 작용했다고 그는 밝혔다. 태일은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잠시 야간학교에 다니던 15살 무렵, 태일은 일기에 “정말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고 적었다. 이때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추억했다. 이 대표 역시 정규 교육과정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고향인 전남 나주의 초등학교 재학 시절 전교 회장도 하고 성적도 뛰어났지만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18살이던 67년 서울의 한 인쇄소에서 일하던 그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친구 권유로 그 이듬해 평화시장에 들어갔다. 처음엔 재단 보조 일을 하다 69년 겨울부터 재단사가 됐다. 당시 재단사 월급은 3만5천원이었다. 10년 경력 공무원 급여 수준이었으니 제법 큰돈이었다. 국내에도 도움이 절실한 학생들이 있을 텐데 왜 해외 교육 원조를 하기로 맘먹었는지 궁금했다. “학생 개인을 도와주는 것보다는 여러 명을 돕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학교나 유치원을 지어야 하는데 한국은 물가가 비싸 엄두를 내기 힘들죠. 그러다가 8년 전쯤 티브이에서 타이의 미얀마 난민촌에 한국 사람들이 지어준 학교를 본 적이 있어요. 그때 나도 한번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요.” 이 대표는 현지에서 직접 확인해보니 “너무 잘 지어져 흡족했다”며 앞으로도 희망재단을 통해 캄보디아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지원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책을 많이 보는 편이라는 이 대표는 “학력과 공부를 연결짓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면서도 “(한국 사회는) 간판이 없으면 사람들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수학은 판단을 정확히 하기 위해, 국어는 말을 정확히 하고, 역사는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기 위해 배우죠. 인생에서 필요한 것을 잘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꼭 간판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청계노조 활동 초기인 71년 서울 문리대생과 저녁에 만나 고교 교과서로 공부하기도 했다. “김문수씨와는 71~74년 자주 만나 공부도 하고 토론도 했어요. 그가 나한테 대학에 진학해 학생운동을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 진학하려 했으나 74년 민청학련 사건이 나면서 무위로 돌아갔죠.” 이 대표가 청년 시절 온힘을 다해 쟁취하려고 했던 노동생존권엔 어떤 변화가 있을까? “미싱사나 재단사들의 노동환경은 객관적으로는 좋아졌지요. 하지만 다른 직종과 비교해선 여전히 그때만큼이나 어려운 것 같아요.” 70년대는 미싱 위에 쳐놓은 전깃줄에 하룻밤이 지나면 먼지가 눈처럼 쌓였고 점심을 싸 올 수 없어 굶는 시다도 많았다고 했다. “지금은 미싱사들이 업주와 고용관계가 아니라 생산량에 따라 보수를 받는 계약을 맺지요. 시간 늦게 일해도 많이 받지를 못합니다. 여전히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지요. 공장들도 동네 지하나 건물 2층 등 서울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노동운동도 이젠 유명무실하게 되었지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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