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강원 삼척 동양시멘트 공장 앞에 모인 ’삼척으로 가드래요’ 행사 참석자들이 하청 노동자를 동양시멘트 정규직으로 복직시키라는 중앙노동위원회의 판정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전종휘 기자
동양시멘트 하청 노동자들은 원래 원청인 동양시멘트 소속 노동자라는 게 고용노동부와 노동위원회의 판단입니다. 그런데도 이들 노동자는 지난해 2월 해고당했습니다. 11일은 이들이 해고된 지 500일 되는 날입니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불법집회를 주최한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지만, 정부와 노동위원회 결정을 따르지 않는 기업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동양시멘트 노동자들의 500일 싸움을 5가지 장면으로 짚어봤습니다.
1. 차별에 항거해 노동조합을 만들다
강원 삼척에서 시멘트 공장을 운영하는 동양시멘트는 수십 년 전부터 하청업체한테도 원청과 같은 일을 맡겼습니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원청인 동양시멘트 소속 노동자의 지시를 받아 그들과 거의 같은 일을 했습니다. 석회석을 캐서 가공을 하고 시멘트 제품을 포장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임금은 동양시멘트 노동자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최저임금에 더해 몇십원에서 몇백원 정도를 더 얹어 받는 수준이었습니다. 게다가 원청 노동자들과 달리 휴가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복지 등에서도 각종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공장 식당에서 원청 노동자보다 밥을 먼저 먹는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 일도 있었습니다. 참다못한 하청업체 동일과 두성의 노동자들은 2014년 5∼6월 잇따라 노동조합을 만들고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청업체가 어용노조를 만들어 조합원을 빼가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2. 묵시적 근로계약관계를 인정받다
노동자들이 부당한 차별에 항의하며 진정을 냈습니다. 고용노동부 태백지청은 2015년 2월13일 하청업체 동일과 두성에서 일하는 노동자 250여명과 동양시멘트 사이의 묵시적 근로계약 관계를 인정하고 동양시멘트 쪽에 이들 노동자를 즉각 직접 고용하라고 통보했습니다. 묵시적 근로계약 관계란, 동양시멘트가 형식적으로는 하청업체와 계약을 맺고 하청업체 노동자의 고용은 이들 하청업체가 한 것처럼 돼 있으나 실제로는 동양시멘트가 애초부터 이들 노동자를 직접 고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들을 보면, 고용부 판단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동일과 두성의 사무실은 동양시멘트 공장 안에 있습니다. 모든 집기소유와 운영을 사실상 동양시멘트가 했습니다. 사장들도 모두 동양시멘트 출신입니다. 하청 노동자의 임금을 얼마나 줄지, 매일 누구한테 어떤 일을 시킬지, 휴가나 복지 문제는 어떻게 할지도 모조리 동양시멘트가 결정했습니다. 하청업체의 실체를 인정할 수 없고, 하청업체는 오로지 동양시멘트가 이들 하청업체 노동자의 직접 고용을 피하기 위해 설립한 ‘유령회사’에 불과하다는 게 고용부 판단입니다.
고용부가 노동자의 진정을 받아 묵시적 근로계약 관계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묵시적 근로계약 관계 인정은 ‘진짜 사장’을 찾아 싸우는 하청 노동자들이 얻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처방입니다. 이때만 해도 노동자들은 “싸움이 금방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3. 번개 해고, 싸움이 시작되다
고용부가 2월13일 묵시적 근로계약관계 판단을 노동자들한테 통보한 지 1시간 만에 동양시멘트는 하청업체 동일에 도급계약 해지 통보를 했습니다. 그리고 동일은 나흘 뒤 소속 노동자 101명한테 해고예고를 통보하고, 28일엔 해고를 단행했습니다.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입니다. 노동자 61명은 강원지방노동위원회(강원지노위)에 해고가 부당하다는 판정을 내려달라고 구제신청을 했습니다. 강원지노위는 6월 5일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판정 결과를 내놨습니다. 강원지노위도 이들 노동자는 입사 때부터 이미 동양시멘트 소속이라며 고용부와 같은 판단을 했습니다. 이어 동양시멘트 사규나 동양시멘트와 정규직 노조와 맺은 단체협약을 보면, 회사가 누군가를 해고하려면 그에 걸맞은 사유를 근거로 인사위원회를 열어서 결정해야 하는데 회사 쪽 노무대행기관에 불과한 하청업체 동일이 해고 통보를 한 것은 위법이라는 판단도 같이 내렸습니다.
동양시멘트는 강원지노위 판정을 인정할 수 없다며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중노위는 지난해 11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중노위는 하청 노동자 101명의 해고가 부당하다는 강원지노위 판정이 옳다면서 강원지노위는 인정하지 않았던 부당노동행위까지 인정했습니다. 이들 노동자를 해고한 게 노동자들의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저질러진 짓이라는 점을 인정한 것입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은 이를 부당노동행위라고 일컫습니다. 중노위는 해고자 가운데 노조 조합원이 아닌 이는 50명인데, 이 가운데 36명은 해고 직후 동양시멘트의 다른 하청업체에 재입사해 일하고 있는 점 등 여러 가지를 부당노동행위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4. 회사의 버티기, 법은 노동자 편이 아니다
지난해 8월 삼표그룹이 법정관리 상태에 있던 동양시멘트를 인수했습니다. 고용 문제 등에 대한 모든 법적 책임도 삼표그룹에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회사 쪽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고용부와 중노위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중노위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냈습니다. 고용부 결정은 회사 쪽이 안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회사 쪽의 수용을 강제할 수 있는 처벌 조항도 없습니다.
중앙행정부처의 결정문이 무기력하게 바람에 나부낄 때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본사 앞에서 끊임없이 집회를 열고 법원에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내는 한편 3보 1배로 제 몸을 땅바닥에 내던지는 것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최창동 노조 지부장과 간부 등 13명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과 형법(업무방해, 모욕, 상해) 위반 혐의로 구속된 뒤 기소됐습니다. 1심 재판을 맡은 춘천지법 강릉지원은 지난 1월 최 지부장 1년 6개월 등 노조 관계자 9명한테 징역형을 선고했습니다. 노동조합을 탈퇴한 이들에겐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항소심 재판부가 4월 최 지부장 등한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이들은 풀려났습니다.
노조 조합원들은 지난해 8월 이후 서울 종로에 있는 삼표그룹 본사 앞에서 노숙농성을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조합원들은 한여름에 농성을 시작해 떨어지는 낙엽과 퍼붓는 함박눈, 활짝 핀 개나리꽃을 지켜본 뒤 다시 뙤약볕 아래 섰습니다. 그새 자회사를 만들어 소송을 취하한 뒤 재입사하라는 삼표 쪽의 권유에 넘어간 조합원들이 하나둘 떠났습니다. 많을 땐 80여명에 이르던 조합원은 해고 500일을 맞은 7월 11일 현재 23명만 남았습니다.
5. 노동자들 “끝까지 간다”
7월 9∼10일 강원 삼척에선 동양시멘트 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 복직 투쟁을 지지하는 ‘삼척으로 가드래요’ 행사가 열렸습니다. 전국에서 200여명이 모였습니다. 참석자들은 동양시멘트 삼척우체국 앞에서 집회를 연 데 이어 동양시멘트 공장 정문 앞까지 행진했습니다. 그리고 고용부와 중노위 판정을 이행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저녁에는 삼척해변에서 문화제가 열렸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최창동 지부장은 “우리는 고용노동부 결정이 너무 완벽하게 나와 투쟁이 진짜 오래가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대법원까지 갈 각오를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직 하청 노동자들이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 1심 결과도 안 나오고, 회사가 낸 중노위 판정 취소처분 소송 1심 결과도 안 나왔습니다. 언제 대법원 선고가 날지 알 수도 없습니다. 시간은 늘 사용자 편이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소송의 끝을 바라보고 가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최 지부장은 끝을 보겠다고 말합니다. 노동자들이 만날 지기만 하는 역사를 바꿔보고 싶다고 합니다.
이날 저녁 참석자들은 저마다 풍등에 불을 붙여 날려 보냈습니다. 정규직과 동일한 업무를 외주화해 싼값에 일을 시키고 나중에는 고용 책임을 나 몰라라 하는 기업들의 만연한 행태와 국가의 무기력에 맞서 싸우는 동양시멘트 하청 노동자들이 이기기를, 그래서 한국 사회의 무분별한 외주화에 브레이크가 걸리길 기원했습니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