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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법원 “제화공, 개인사업자 아닌 노동자…퇴직금 주라”

등록 2016-10-02 18:49수정 2016-10-02 21:49

“회사가 업무지시·근로시간 통제”
재하청받은 제화공에까지 인정
2000년 이후 원청서 ‘소사장제’ 강제
노동자 지위 잃어 4대 보험 못 받아
고용부도 특수고용직으로 분류

2000년 이전엔 제화공은 모두 ‘노동자'였지만 대형 패션업체가 노무 비용을 줄이려고 ‘소사장제'를 잇달아 도입하면서 현재는 월급이나 퇴직금을 받는 이가 거의 없다. 신발창과 굽을 만드는 저부 공정을 하는 한 제화공의 모습.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제공.
2000년 이전엔 제화공은 모두 ‘노동자'였지만 대형 패션업체가 노무 비용을 줄이려고 ‘소사장제'를 잇달아 도입하면서 현재는 월급이나 퇴직금을 받는 이가 거의 없다. 신발창과 굽을 만드는 저부 공정을 하는 한 제화공의 모습.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제공.
지난 30일 서울 성수동 낡은 건물 2층의 구두 공장. 35년 차 ‘구두장이' 홍노영(54)씨가 패턴(구두본)을 대고 가죽을 칼로 자르고 있었다. 가죽에 바르는 강력접착제 냄새가 코를 찌르고 가죽을 ‘툭~ 툭' 두드리는 작은 망치 소리가 시끄러웠다. 수제 구두는 구두의 윗부분을 제작하는 갑피(제갑)와 신발창과 굽을 만드는 저부 공정으로 나뉘는데 홍씨는 갑피 공정을 맡는다.

또 다른 35년 차 ‘구두장이' 민호식(57)씨는 저부 공정에서 일한다. 갑피를 신발창에 붙이고 밑창·굽·깔창 작업해 구두를 완성하는 것이다. 민씨는 “꽉 막힌 공간에서 강력접착제를 마시면서 쪼그려 앉아 일하는 제화공들은 원인 모를 질병에 걸리고 있지만, 산재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아 하소연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2000년 이전엔 제화공은 모두 ‘노동자'였다. 4대 보험에 가입됐고 학자금과 퇴직금도 나왔다. 그러나 대형 패션업체가 노무 비용을 줄이려고 ‘소사장제'를 도입해, ‘개인사업자’로 전환했다. 영세한 하청업체들까지 줄줄이 그 길을 좇아갔다. 이에 따라 현재는 5000여명에 이르는 성수동 제화공 가운데 월급을 받는 이는 거의 없다. 회사가 마련한 공장에서, 회사가 제공한 작업 기계와 비품, 재료를 이용해 구두를 만들지만, 월급이 아니라 공임(켤레당 5500원 정도)을 받는다. 4대 보험과 퇴직금은 사라졌고 개인사업자로 등록해 3.3% 세금까지 내야 한다. 고용노동부도 제화공을 특수고용직으로 분류해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홍씨는 “노동자로 일할 때는 임금이 매년 조금씩이라도 올랐는데 공임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며 “아침 7시에 나와 밤 10시까지 일해도 하루 10만원을 벌기 힘들다”고 말했다. 홍씨와 민씨를 비롯한 제화공 47명은 2014년부터 “노동자로 인정해 퇴직금을 달라”며 원청업체 탠디, 소다와 하청업체 기쁨제화, 베라슈 등을 상대로 잇따라 소송을 냈다.

법원은 원청업체는 물론 하청업체에서 일한 제화공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서울동부지법 민사1부(재판장 염원섭)는 지난달 21일 1심을 뒤집고 기쁨제화와 베라슈에서 일한 민씨 등 노동자 3명이 낸 퇴직금 지급 청구 소송에서 “1인당 퇴직금 284만~993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심은 “근로자로 일하다가 형식만 도급계약으로 전환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도급계약을 맺고 작업을 시작했기에 근로자로 볼 수 없다”고 원고 패소 판결했지만, 항소심은 그 판단을 뒤집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업체 관리자들이 작업현장을 돌며 제화공의 작업 순서나 불량품에 대한 수정 지시를 내리는 등 지휘 감독했고 매일매일 주는 작업량에 따라 근로시간도 사실상 통제했다”며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밝혔다. 또 “업체의 공장에서, 업체가 제공한 작업 기계와 비품, 재료를 이용해 작업했고 단가도 업체가 사실상 결정했다”며 업체에 전속된 노동자로 봐야 한다고 했다.

앞서 법원은 홍씨처럼 원청업체와 소사장 계약을 맺은 이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 2월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재판장 정창근)는 홍씨를 비롯해 탠디에서 퇴직한 노동자 9명에게 1인당 1152만~4598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제화공들은 2000년 2월 일괄적으로 사업자등록을 했는데 이는 스스로 퇴직했다기보다는 강제적·형식적으로 소사장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원?하청업체에서 일하는 모든 제화공이 노동자로 인정받은 셈이다. 민주노총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정기만 지부장은 “고용부는 법원의 판단에 따라 제화업계를 근로감독 해달라”고 요구했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는 “사용자가 노무 비용을 낮추려고 '탈근로자' 정책을 펴면서 생겨나는 특수고용직종은 노동자로 보호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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