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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11년 걸린 삼성 백혈병 사과…“유미야, 약속 지켜 기쁘다”

등록 2018-11-23 20:53수정 2018-11-23 20:57

삼성-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
삼성전자 “병으로 고통받은 직원·가족에게 진심으로 사과”
황상기씨 “어떤 사과도 충분치 못해…삼성의 다짐으로 수용”
23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서 삼성전자 김기남 대표이사(왼쪽부터),김지형 조정위원장 반올림 황상기 대표가 협약서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3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서 삼성전자 김기남 대표이사(왼쪽부터),김지형 조정위원장 반올림 황상기 대표가 협약서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1년 만에 받아낸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한마디를 놓고 황상기(63)씨는 울지도 못했다. 2007년 3월 스물둘 꽃 같은 나이의 딸 유미를 떠나보낸 아버지 황씨는 23일 삼성전자와 국회의원들을 앞에 놓고 “딸과의 약속을 지키게 되어 참 기쁘다”는 말을 뱉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었다. 노모는 병들어 돌아온 손녀딸을 본 충격에 세상을 떴고, 그의 아내는 딸의 죽음 이후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속초 거리를 누비던 택시기사 황씨는 그동안 운전대를 놓은 채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거리를 헤매야 했다. 그의 입가엔 알듯 말듯 옅은 미소만 맴돌았다.

황씨는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대표 자격으로 이날 삼성전자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을 열었다. 11년에 걸친 그의 처연한 싸움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먼저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병으로 고통받은 직원들과 그 가족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김 대표 뒤를 이어 연단에 선 황씨는 그의 사과를 “다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오늘 삼성전자 대표이사의 사과는 솔직히 직업병 피해 가족들에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지난 11년간 반올림 활동을 하면서 수없이 속고 모욕당했던 일이나 직업병의 고통,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픔을 생각하면 사실 그 어떤 사과도 충분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사과를 삼성전자의 다짐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황씨는 비뚤배뚤한 글씨체로 직접 적어 온 원고를 천진한 목소리로 읽어갔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감사’를 건넸다. 김지형 조정위원장, 도움말을 준 연구자들, 삼성이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타이르고 설득한 국회의원들, 노동시민사회 단체들과 활동가들, 1023일 농성 동안 농성장을 지킨 수많은 지킴이들까지.

황씨 딸 유미씨는 속초상고를 졸업한 뒤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의 반도체 라인에서 일하다 입사 2년 만인 2005년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딸의 골수이식 수술 뒤 찾아온 삼성의 과장은 딸의 사표를 받아 가며 500만원을 손에 쥐여주려 했다. “삼성에 돈이 이것밖에 없으니 이걸로 해결하자”고 했다. 산재로 인정해달란 황씨의 요구에 과장은 “반도체 공장에선 화학약품을 쓰지도 않고 취급도 안 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했다. 황씨의 눈물겨운 싸움이 시작된 순간이다.

황씨는 병의 원인을 밝히겠다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 등에 걸린 다른 노동자들의 존재가 그로 인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딸이 숨진 이듬해인 2008년 3월 반올림이 출범했다. 황씨의 이야기는 2014년 영화 <또 하나의 약속>으로 만들어졌다.

황씨를 비롯한 수많은 피해자 가족과 활동가들의 노력으로 마련된 이날 협약식에서 삼성전자는 회사 누리집에 사과문과 함께 지원보상 안내문을 게재하고 피해자에게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을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또 사태 재발 방지와 사회공헌의 일환으로 500억원의 산업안전보건 발전기금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기탁하기로 했다. 이 돈은 전자산업안전보건센터 건립 등 여러 산재예방 사업에 쓰인다.

이날 행사장에는 우원식·한정애·강병원(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을 비롯해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심상정 의원, 안경덕 고용노동부 노동정책실장 등도 참석했다. 행사를 준비한 법무법인 지평 쪽은 “이번 합의가 양 당사자 간 보상 합의를 넘어 사회적 합의란 취지”라고 설명했다. 삼성과 반올림 쪽에 중재 제안을 한 바 있는 심상정 의원은 “이번 합의가 정치권에도 중요한 숙제를 던졌다. 국회에서 노동안전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황씨는 지난 7월 조정위의 중재 방식에 대해 합의하는 서명식 자리에서는 소감을 밝히다 눈물을 흘렸다. 기존 방식으론 합의가 불가능하다 판단한 조정위는 당시 양쪽이 조정안을 조건 없이 수용할 것을 사전에 합의하라고 제안했다. 이를 삼성전자와 반올림 양쪽이 받아들이면서 사태 해결의 물꼬가 트였다.

황씨는 이날 “제 딸 유미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게 돼 기쁩니다. 하지만 유미와 제 가족이 겪었던 아픔을 잊을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분들이 이런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만들어질 지원보상위원회와 “실은 노동자들이 땀 흘려 일해서 만든 돈” 500억원을 운용할 산업안전보건공단 등 관련된 이들이 그 아픔을 절대 잊지 말아달라고 두 손 모아 당부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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